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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전성기 시절, 로만 브리튼 위치(진붉은색 표시)

 

기원전 43년, 로마 제국이 브리튼 섬(지금의 영국)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터를 잡고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로 삼은 곳이 런던이다. 최초 런던은 ‘론디니움’(Londinium)으로 불렀다. 켈트어로 ‘강’이라는 뜻을 가진 ‘Lond’이라는 단어와 고대 브리튼어에서 파생된 ‘강인함’을 뜻하는 단어인 ‘Londinos’, 그리고 여기에 로마가 점령하여 세운 도시들에 붙여진 ‘정착지’라는 뜻의 라틴어 접미사 ‘-ium’가 붙어 'Londinium'으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로마가 창작 과정을 거쳐 직접 명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브리튼 섬에 거주하던 켈트족이 부르던 지명이 로마식으로 변경된 것이라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후 브리튼 섬에서 로마가 물러난 뒤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섬을 점령했다. 그때 'Londinium'은 'Lunden'으로 변형되었고, 중세를 거치면서 오늘날의 영어식 표현인 'London'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요한 건, 로마 시대부터 불려 온 이름이 기원이 되어 지금의 ‘런던’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켈트족의 언어적 기원과 앵글로색슨족의 영어식 표현, 당시 브리튼 섬 지역 문화에서 기원한 복합적인 역사가 반영되었다고는 하나, 명칭 자체가 런던으로 굳어진 데에는 로마의 영향이 가장 컸다는 것이 통상적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다루면서 갑자기 뭔 영국 런던에 로마 이야기인가? 싶을 수 있다. 서두가 길었다. 왜 이스라엘도 바벨론도 페르시아도 아닌 팔레스타인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가나안 지역 점령을 위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오랜 기간 전쟁을 벌였다. 해당 지역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로마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국의 점령지였다. 그런데 왜 하필,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그 기원은 런던과 같다. 팔레스타인 명명 역시 로마의 영향이 컸다.

 

유대인의 결사항전, 맛사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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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누스의 예루살렘 파괴(1638년, 프랑스 화가 푸생 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하나 꼽아 보자. 역사학자 대부분은 로마를 선택할 것이다. 로마의 군사 확장력, 문화 장악력은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점령지 영토 부문에서는 칭기즈칸이 최고였다. 그러나 칸 제국은 지속성이 없었다. 전쟁을 통해 거대한 영토 확장을 이루긴 했지만,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일시적 통치로 끝났다. 영속적인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로마는 비잔틴 제국을 포함해, 천 년의 시간을 이어온 유일한 제국이다. 헬레니즘과 함께 철학, 예술, 건축, 문학 등 문화적인 영향력도 상당했다. 현재의 유럽과 북아프리카에 더해 중동과 서아시아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지배해 온 위대한 제국이라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하고 강력했던 로마가 눈엣가시로 여겼던 민족이 있다. 유대인,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로마는 황제를 신으로 모신다. 하지만 유대인은 야훼 하나님, 유일신 사상을 고수했다.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강경했다. 유대인에게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에 대한 신앙은 유대인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견고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로마는 넓은 영토를 통치해야 했기에 각 지역의 특색은 살리면서 동화정책을 펼쳐야 했다. 동시에 중앙집권을 강화해야 했다. 하지만 유대인은 이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다문화, 다인종 다 필요 없고 우리가 모시는 신만 섬기겠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러한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며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후 66년에 시작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시작으로 바르 코흐바 반란까지. 유대인들은 로마에 굴하지 않고 민족주의적 신념을 고수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맛사다 (Massada) 전투다. 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 하여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마지막 남은 사람은 자결하여 스스로 전멸한,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결사항전의 전투다. 유대인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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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지방의 마사다 요새

 

맛사다는 이스라엘 사해 서쪽에 위치한, 해발 약 400m로 이뤄진 암벽이다. 기원전 37년경, 로마 지배를 받던 유대 지역 왕 헤롯이 적의 침략 대비를 위해 이곳 맛사다에 성벽을 짓고 요새를 건설했다. 이곳은 ‘유대 저항운동’의 거점이 된다. 66년부터 시작된 유대-로마 전쟁은 기원후 73년까지 약 7년여간 지속되었는데, 이 전쟁의 끝에 맛사다 전투가 있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로마는 유대를 로마에 굴복시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저항 세력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때 로마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유대 강성세력, 시카리파 (Sicarii)가 960여 명의 유대인들을 이끌고 맛세다 요새에 올랐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맛사다 요새는 암벽 가파른 절벽으로 이뤄져 있어 공격이 용이하지 않았다. 로마군도 쉽사리 맛사다를 점령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했던 로마 군대도 군사 500명도 되지 않던 맛사다를 점령하는 데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맛사다는 강력한 난공불락 요새였다.

 

로마의 장수였던 루키우스 폴리비아스 실바 (Lucius Flavius Silva) 장군은 맛사다를 점령하기 위해 맛사다 요새 성벽 높이 같은 토사를 쌓아 올렸다. 포위벽과 경사로를 건설하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8개월 간의 포위전 끝에 요새 성벽을 파괴하며 맛사다를 함락했는데, 이때 로마가 포획한 포로 수는 2명이다. 포로 수가 어떻게 이리 적을 수 있을까?

 

성이 함락될 것을 예측한 유대인들이 집단 자결을 선택했다. “자유인으로 죽는 것이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남성이 나머지 가족 구성원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종국에 살아남은 사람은 여성 한 명과 어린아이 한 명, 이렇게 둘 뿐이었다고 한다.

 

맛사다 전투 정신은 지금도 이스라엘 방위군의 정체성이라고 하니,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지금의 이스라엘 민족의 고집불통 행태, 이해를 못 할 바는 아니다.

 

이후, 로마는 유대인이라면 치를 떨게 된다. 이대로 남겨두었다간 두고두고 문제 될 것으로 판단하고, 로마는 유대 민족 정체성 말살 방안을 세운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유대인들의 소중한) 예루살렘 신전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성전 제사 체계를 완전히 소멸시켰고, 예루살렘 일대에 거주하거나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중, 주목해 볼만한 점은 당시 가나안, 유대 지역이라 불리던 곳의 이름을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aestina)"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로마는 이스라엘의 흔적과 뿌리 지우기를 시도했다. 단순한 물리적 탄압으로 그치지 않았다. 함락된 예루살렘 역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꿨다. 땅을 빼앗고, 오래전부터 불리던 지역 명칭을 바꾸고 신께 드리는 제사마저 소멸시켰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탄생

 

[YTN 특집] 유대인 디아스포라 0.2%의 비밀  - 디아스포라(Diaspora)란_ #001 _ YTN korean 1-25 screenshot.png

출처 - (링크)

 

‘디아스포라’의 사전적 의미는 그리스어(διασπορά), 우리말로는 ‘씨를 뿌린다’ 혹은 ‘흩어짐’이라는 뜻이 있다. 농업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로마 시절 유대 지역(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쫓겨나게 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로마는 유대인을 대규모로 추방했는데, 그때 추방된 유대인들은 지금의 북아프리카와 유럽 전역, 중동과 서아시아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터를 잡게 되었다. 지금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국가 없이 민족 단위로 모여 살았다. 하지만 로마가 그랬듯, 유대인은 자기만의 신앙,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살았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도 융화되지 못했다.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유대민족의 2,000년 떠돌이 생활의 시작점에는 로마가 있었다.

 

게토(Ghetto). 16세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유래된 이 말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특정한 민족, 집단이 모여 사는 구역을 뜻한다. 지금도 베니스에 가면 유대인 거주지역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은 다른 마을보다 어둡고 흉흉하다. 또 다른 집보다 낮고 좁아 마치 성냥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 편히 발 뻗고 누워 잘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던 유대인들의 비참한 삶의 현장을 보여 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