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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통진당 해산과 관련해 본지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내가 보낸 원고의 제목은 <필부(匹夫)를 투사로 만드는 사회>, 죽지않는돌고래 부편집장이 수정한 제목은 <‘자유 민주주의’로 사람을 때리는 사회>다. 이 글의 말미에서 난 다분히 합리적인 추측을 내놓았다. 자연 도태될 수밖에 없던 통진당에 해산 명령을 내린 이 정권은 ‘자유 민주주의’와 ‘법치’를 명분삼아 진보 색을 띠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를 대놓고 탄압할 거라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추론. 그 탄압의 대상엔 나 역시 포함되어 있을 거란 헛소리도 끄적여 놓았던 거 같다. 말이, 아니, 글이 씨가 되었던가. 뻔한 결론이라 해도 불길한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질 땐 쓴 소주를 코로 들이키는 듯한 찌릿함이 전해져 온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무심코 해 본 통신자료 제공 내역 열람 신청


요 몇 년 사이 휴대폰을 무려 네 번이나 잃어버렸다. 날더러 어떤 지인은 ‘기부천사’라고 하더라. 이 기부 물품들이 어딘가에서 굴러먹고 있을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물증이 없어 그러려니 하던 차에 ‘자주 사용하는 포털 아이디가 중국에서 로그인 됐다’는 메일을 받았다. 올 게 왔구나 싶었다.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급히 계정을 바꾸는 과정에서 불현듯 이동통신사가 '검경과 국정원에게 일부 인사의 통신자료를 제공했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생각난 김에 내가 가입한 통신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통신자료 제공 내역 열람 을 신청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노동 단체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고, 여전히 편집위원으로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며, 삼성전자 서비스지회 노조 간부의 장례식 건과 관련하여 송사에도 휘말린 적이 있어 해당 시기에 내 정보를 캐갔을 수도 있단 우려에서였다.


막상 신청하려고 보니 통신자료 제공 내역은 신청일 기준 1년 간의 내용만 열람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내 정보가 털릴 이유는 없었다. 지난 1년 동안은 집회 몇 차례 참석한 거 빼고는(그것도 일선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뭘 한 게 없으니까. 취소하려다 클릭질이 아까워 신청만 해둔 채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  


일주일쯤 흘렀을까. 아침에 통신사에서 메일이 하나 왔다. 통신자료 제공 사실 확인서(이하 ‘확인서’)였다. 잊고 있다 막상 받아보니 은근히 긴장도 되었지만, 별 거 없을 거란 마음으로 첨부된 PDF 파일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서울지방경찰청에 내 통신자료를 두 번 제공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으잉?


 확인서 (1).jpg


나보다 먼저 확인서를 받아본 지인들의 SNS에서 검경과 국정원에 정보가 털렸단 소식을 이미 접하긴 했다. 순 한량에 불과한 나완 달리 그들은 명실상부한 활동가라 이 정권의 표적이 되었음은 한편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난 거기에 왜 끼어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다가 내 통신자료가 제공된 시점은 어떠한 집회나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기간이었고, 제공된 두 건 중 한 건은 활동 분야에 있어 교집합이 없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지인과 동일한 건(제공 내역의 문서번호가 일치한다)이었다. 그리고 정의당의 김종철 씨가 SNS에 공개한 제공 내역 4건 중 2건이 나의 제공 내역과 동일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아 공권력은 뚜렷한 기준이나 원칙 없이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제공 요청 사유?


이유라도 알고 싶더라. 그러나 확인서의 제공 요청 사유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만이 덩그러니 인쇄되어 있었다.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제3항에 따른 법원/수사기관 등의 재판, 수사(「조세범 처벌법」 제10조 제1항·제3항·제4항의 범죄 중 전화, 인터넷 등을 이용한 범칙사건의 조사를 포함), 형의 집행 또는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정보수집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제3항이라, 내친김에 조문을 찾아보았다.


제83조(통신비밀의 보호)


① 누구든지 전기통신사업자가 취급 중에 있는 통신의 비밀을 침해하거나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전기통신업무에 종사하는 자 또는 종사하였던 자는 그 재직 중에 통신에 관하여 알게 된 타인의 비밀을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③ 전기통신사업자는 법원, 검사 또는 수사관서의 장(군 수사기관의 장, 국세청장 및 지방국세청장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 정보수사기관의 장이 재판, 수사(「조세범 처벌법」 제10조제1항·제3항·제4항의 범죄 중 전화, 인터넷 등을 이용한 범칙사건의 조사를 포함한다), 형의 집행 또는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정보수집을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자료의 열람이나 제출(이하 "통신자료제공"이라 한다)을 요청하면 그 요청에 따를 수 있다.


1. 이용자의 성명
2. 이용자의 주민등록번호
3. 이용자의 주소
4. 이용자의 전화번호
5. 이용자의 아이디(컴퓨터시스템이나 통신망의 정당한 이용자임을 알아보기 위한 이용자 식별부호를 말한다)
6. 이용자의 가입일 또는 해지일


(이하 생략)



웃기게도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는 통신비밀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제3항은 예외 조항이다. , 3항에 열거된 이유에 한해서 통신의 비밀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깰 수 있음을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 경우가 열거된 이유에 해당하는가를 따져보면 되겠지. 우선 재판과 수사(앞서 얘기했던 삼성전자 서비스지회 노조 간부의 장례식 건과 관련된 것인데, 이 건과 관련해서도 본지에 기고한 적 있다)는 완료된 시점이었다. 다만 형의 집행이 남아 있었는데, 수사·재판 과정에서 내 개인정보를 다 알고 있는 검찰과 법원이 통신자료 내역을 통신사에 요청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제공 요청 기관은 서울지방경찰청이었다. 심지어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정의당 김종철 씨와 문서(공문)번호가 같은, 동일한 건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송사와는 관련이 없는 건으로 내 정보가 제공되었음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제공 사유는 무려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내 몸 상해가며 술 담배 간접세를 무진장 갖다 바치는 애국자를, 왜 자꾸 공안사범으로 모느냔 말이여. 시발. 혹시 술자리에서 각하 욕하는 거라도 엿들었을라나.





요청받은 자도, 요청한 자도 모른다


서울지방경찰청은 무슨 이유로 내 통신자료를 원했던 것인가. 대체 국가안전보장에 위해가 될 우려가 있는 짓을 내가 언제, 어떻게 저지르려 한 것인가. 우선 내 통신자료를 요청한 부서를 알 필요가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확인서에는 제공 요청 기관이 서울지방경찰청까지만 나와 있어, 정확한 부서를 알기 위해 해당 통신사에 문의했다. 공문을 주고받았을 테니 통신사는 요청 부서를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러나 상담원은 자신들도 거기까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확인서에 기재된 내용까지만 자신들이 제공할 수 있는 내용이며,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그 기관에 직접 연락해 보란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누르고 서울지방경찰청 민원실로 연락했다. 같은 내용을 문의했더니 이 양반은 확인서 내용에 부서가 나와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경찰청 이하 부서는 기재돼 있지 않다고 수차례 얘기하고 나서야 수사지원과로 연락해 보라면서 전화번호를 가르쳐줬다. 전화해 보니 ‘강동경찰서 수사지원과’란다. 경찰청 내의 수사지원과 번호를 가르쳐 준 것으로 알았던 나와 쌩뚱맞은 전화를 받은 강동경찰서 직원 사이에서 서로를 원망하는 대화가 오갔고, 잠시 이성을 잃은 난 담배 한 대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경찰청 민원실에 연락했다. 아까 엉뚱한 번호 가르쳐 준 직원 누구냐고 따질 참이었으나 차분하게 응대하는 직원의 화술에 급 포섭,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차분한 이 양반, 확인서에 나와 있는 것보다 자세한 내용은 유선으로 알려줄 수 없단다. 대한민국 정보공개 사이트에서 정보공개 청구를 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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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절차를 또 거쳐야 한단다. 

<대한민국 정보 공개>


이미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내 정보 제공을 요청받은 통신사는 모르쇠, 요청한 서울지방경찰청은 엉뚱한 민원 처리에 이어 또 다른 절차가 필요함을 통보. 통신자료를 요청한 정확한 부서를 알고, 그 부서에 연락하여 국가안전보장에 어떤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었기에 정보를 털어갔는지 알고자 했던 한 시민의 알 권리는, 개인정보를 요청하고 요청받은 양 당사자 모두에게서 묵살당했다.



필부를 투사로 만드는 사회


죽지않는돌고래 부편집장에게 원고 청탁을 받고 헌법 조문을 찾아보았다. 총강에 이어 제2장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 중 제17조와 제18조는 다음과 같다.


제1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18조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그렇단다. 더 설명은 필요 없을 성싶다.


보수를 참칭하는 이 정권이 입에 발리도록 하는 말이 ‘법치’다. 법치의 근간이 헌법이란 건 상식 중의 상식에 속하므로 중언부언 할 필요 없다. 결국 법치는 국정운영에 있어 헌법 조문이 담고 있는 의미를 얼마나 잘 구현해 내고 있는가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정권은 ‘법치’가 아닌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체계화된 독재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글의 서두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정권은 특유의 과거 지향적 과단성으로 힘겹게 이루어 낸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데 거침이 없다. 카카오톡 감청, 통진당 해산, 세월호 참사, 국정 역사교과서 강행, 노동악법 추진 등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의혹투성이며, 의혹에 문제를 제기하고 명확한 해결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법질서 확립’이란 원칙을 내세우며 강경 진압한다. 나아가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진보적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정권에 비판적인 일반 시민들마저도 무차별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2년 전 그 뻔한 예상이 뻔뻔스럽게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 아니, 정권과 하수인들이 이런 일들을 견마지로(犬馬之勞)의 자세로 실행에 옮기고 있는 거다. 한량 중의 한량인 나 같은 사람도 털리는 세상, 바로 여러분 곁에 있다. 어째서 자꾸 필부를 투사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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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