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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권에 감동한 영국 입국심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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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2023년 6월, 옥스포드 유니온(Oxford Union, 영국 옥스포드 대학생 주축으로 만든 토론 클럽)이 인도의 유명 정치인, 언론인, 정치평론가 등을 초대하여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나?>를 주제로 찬반 토론을 펼쳤다. 언론인 중에서는 Network 18 Group의 계열사인 퍼스트포스트(Firstpost)의 편집장 팔키 샤르마(Palki Sharma)가 모디 총리 이후 인도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찬성 측 연사로 나서 약 13분가량 연설했다. 평소에도 친여당 성향을 숨기지 않던 그녀답게 모디 총리가 집권한 이후 지금까지 인도가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를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녀는 인도가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나라가 되었다면서 자기가 영국에 입국하면서 겪은 경험담을 풀었다.

 

"이제는 인도인들이 (입국 심사를 받을 때) 자랑스럽게 인도 여권을 제시합니다. 영국 입국 심사관은 인도 여권을 보고 감동한 것 같더군요."

 

자, 일단...하루에 수십 개 나라에서 입국하는 수백수천 명의 여권을 검사하는 입국 심사관이 특정 국가의 여권을 보고 감동할 일은 만무하다. 게다가 영국 내 인도계 인구가 이미 190만 명이나 되고, 이중 불법체류자는 10만 명이나 된다. 해마다 수백에서 수천 명의 인도인이 새롭게 영국으로 밀입국하다가 체포되고 있는 마당에 입국 심사관이 인도 여권을 보고 감동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수백 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왔던 인도가 그나마 중국을 대체할 만한 제조업의 허브(hub)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도 최근 몇 년에 불과하다. 전형적인 인도식 허풍에, 토론장에 앉아 있던 청중들도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인도 여권 파워는 하락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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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패스포트 인덱스 홈페이지>

 

2025년 1월, 헨리여권지수(Henley Passport Index)가 발표되었다. 세계적인 법률회사인 헨리앤파트너스(Henley & Partners)가 매년 세계항공운송협회의 정보를 기반으로 세계 199개 국가의 여권이 얼마나 힘 있는지 평가하는 지수이다. 2025년 1등은 싱가포르가 차지했다. 싱가포르 여권만 소지하고 있으면 전 세계 199개 국가 중 195개 국가에 무비자로 입국하거나 도착 후에 비자(통상 이런 비자를 ‘Visa on Arrival(도착비자)’이라고 부른다)를 받을 수 있다. 192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우리나라는 2위를 차지했다. 최하위는 아프가니스탄이 차지했는데, 무비자 또는 도착 비자로 여행 가능한 나라가 26개국에 불과했다.

 

인도 여권 소지자는 몇 개의 나라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을까? 2025년 현재 57개 국가로서 인도 여권의 파워는 85위 수준이다. 아프리카에 소재한 부르키나파소(82위)나 세네갈(84위)보다 조금 낮고, 말리(87위)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89위)보다 조금 높다. 그나마, 이웃 국가인 방글라데시가 100위(40개국), 그리고 파키스탄이 103위(33개국)를 차지하면서 인도는 힘들게 체면치레했다.

 

인도인들은 국제사회가 매기는 각종 랭킹에 대해 매우 강한 반감을 보이곤 한다. 각국의 민주주의 수준, 언론자유 수준, 인간 개발 수준 등을 평가한 지수에서 인도는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도인은 이러한 자신들의 객관적 위치를 인정하기보다는 ‘인도의 발전을 시기하는 서구 국가들이 의도적으로 인도에 낮은 점수를 주고 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곤 한다. 각종 지수는 날조되었거나 부정확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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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권

표지에는 기원전 250년경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사르나트에 세운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최근 20여 년 중 인도의 여권 지수가 가장 높았던 때는 2006년이다. 조사 대상국 184개국 중 71위였다. 2014년에 76위로 하락하더니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70위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2015년에 인도(88위)보다도 낮은 94위를 기록했던 중국은 2025년 지수에서는 무려 30계단 이상 올라선 60위가 되었다. 온갖 국뽕 인플루언서들이 만든 ‘인도가 세계 최고’라는 쇼츠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대다수 인도인 입장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급성장과 인도의 정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 그리고 하루 종일 ‘모디어천가’를 불러대는 언론이 인도 국민들에게 국뽕을 불어넣은 결과이다.

 

인도인들이 헨리여권지수가 잘못되었다고 트집 잡으려 해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지수 산정 방법이 너무나도 단순하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특정 국가 국민이 다른 나라를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거나 또는 도착한 후에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으면 1점,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비자를 받아야만 하는 경우에는 0점을 주는 방식이다. 추가적인 정성평가도 없으니, ‘선진국 전문가들이 편파적으로 평가했다’고 주장할 여지도 없다. 결국 ‘세계 5위 경제대국인 인도를 국제 사회가 몰라보고 있다’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부리는 게 전부다.

 

인도가 마주한 냉정한 현실

 

2025년 헨리 여권 지수가 발표되자마자 Firstpost도 이에 대한 보도를 했다. 2023년 6월, 영국 옥스포드까지 가서 ‘인도 여권을 보고 영국의 입국 심사관이 감동하였다.’라고 발언했던 바로 그 팔키 샤르마가 카메라 앞에 앉았다. 그녀는 인도 여권지수가 85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인 인도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라는 말을 꺼냈다. 인도인들이 툭하면 꺼내드는 바로 그 ‘세계 5위 경제 대국’ 드립을 다시 시전한 것이다. 1년 반 전에 영국인들 앞에서 ‘입국 심사관이 인도 여권을 보고 감동하더라’는 허풍떨던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 ‘인도인에게 무비자 입국을 허락하지 않는 나라는 인도의 경제력을 지렛대 삼아 버릇을 고쳐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A라는 나라의 국민을 B라는 나라가 무비자로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할 때, A나라의 경제 규모는 사실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A나라의 총 경제규모가 아니라 1인당 국민소득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야만 A나라 국민이 B나라에 불법으로 눌러앉을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2,500달러에 불과한 인도는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기에는 너무 가난한 나라다.

 

또한, 그 나라 국민이 이미 얼마나 많이 불법체류하고 있는지, 입국한 이후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지도 중요한 고려 요소 중 하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영국에는 이미 10만 명에 달하는 불법체류 인도인들이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국 내에서도 인도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반이민 정서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이 문제가 정치적 이슈로 발전했다. 2024년 9월, 리시 수낵 총리를 대체할 보수당 당수 선거에 나선 후보자 중 한 명은 인도인 불법체류자를 영국에서 쫓아내 인도로 돌려보내는 데에 인도가 협조하지 않으면 인도인의 영국 입국비자를 제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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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텍사스주에서 추방되는 불법 체류 이민자

출처 - <로이터>

 

캐나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2013년 캐나다로 이주한 인도인은 연간 약 3만 명 수준이었다. 불과 10년이 지난 2023년 그 숫자는 연간 14만 명에 육박한다. 무려 3배 넘게 증가했다. 4천만 명이 조금 넘는 캐나다 인구 중 140만 명 정도를 차지하는 인도인들은 주로 대도시에 거주하는데,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지키면서 쉽사리 다른 문화와 동화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백인들이 할로윈을 즐기는 시기에 인도인 후손들은 시끄러운 인도 음악을 틀어놓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인도식 춤을 추면서 디왈리(Diwali, 인도식 신년 행사)를 축하하곤 한다. 이러다 보니 캐나다인들 사이에서는 ‘이곳이 캐나다인지 인도인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는 수준이 되었다. 최근 들어 인도인에 대한 캐나다의 비자 발급이 한층 까다로워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미국 비자 상황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인도인들이 가장 많이 유학과 이민을 가는 나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많이 밀입국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 내 거주 인도인은 약 510만 명으로 미국 전체 인구의 1.5%를 차지한다. 하지만, 불법체류 인도인 역시 무려 7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멕시코와 엘살바도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준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후 약 1만 8천 명의 불법체류 인도인을 인도로 추방하겠다고 밝히자마자 인도 정부는 이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하며 발 빠르게 미국 달래기에 나섰다. 자칫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자국의 고학력 이민자가 미국 비자를 받는 데 걸림돌이 될까 두려워 몸을 바짝 엎드린 것이다.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인터뷰 약속을 잡는 데에만 400일 넘게 기다려야 하는 것은 이제 인도인들에게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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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 소재 주인도 미국대사관

출처 - <The Hindu>

 

서구권뿐만 아니다. 중동은 인도의 부유층에게는 즐겨 찾는 관광지이자 인도의 저소득층에게는 중요한 해외 일자리다. 두바이나 사우디아라비아로 관광을 위해 출국하던 인도인들의 비자 거절률은 과거 1~2% 수준에서 최근에는 5~6% 수준까지 급증했다. 두바이나 사우디의 출입국 당국은 방문자의 귀국 비행기표나 호텔 예약 등이 진짜인지 꼼꼼하게 살피는 편이다. 상당한 규모의 재산이 있는 인도인에게만 비자를 내주기 위해서 예금잔액증명서 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몇몇 인도인들은 불법 체류할 목적으로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했다가 비자 신청서 작성 직후 취소하는 꼼수를 부린다.

 

더 심하면, 예금잔액증명서 등 중요 서류를 대놓고 조작하기도 한다. 이런 인도인들을 중심으로 비자 발급 거절이 증가하자 인도인들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여행사들은 ‘제발 가짜 비행기 티켓이랑 위조 서류를 제출하지 마세요’라고 당부하고 나섰다. 소소한 일상에서 워낙에 서류 위조가 많은 나라가 인도이다 보니 ‘이 정도 서류 위조는 큰 문제가 아니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을 가진 인도인들이 제법 많다. 결국 인도 안에서나 통하던 ‘대충 서류 위조해서 얼렁뚱땅 넘어가려던’ 수법이 외국 비자 발급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힘주어 강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인도인들이 해외여행 한번 가려면 넘어야 할 산은 높고도 험하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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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이 무비자 입국 가능한 나라

출처 - <Henley & Partners, Global Passport 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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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무비자 입국 가능한 나라

출처 - <Henley & Partners, Global Passport Index>

 

 


 

<참조>

(1) Palki Sharma의 발언 전체를 보려면 https://www.youtube.com/watch?v=yjFEYRN17hU&t=733s 를 참조하면 된다. 영국의 출입국 심사관이 인도 여권 소지자를 감동스럽게 쳐다봤다는 발언은 2분 50초경부터 나온다.

(2) 2025년 헨리여권인덱스는 https://www.henleyglobal.com/passport-index/ranking 참조

(3) 2025년 1월, Firstpost의 보도는 https://www.youtube.com/watch?v=YhCUCDDeCak 참조

(4) ‘Top Tory leadership contender pledges ban on UK visas to Indians if India does not accept returns’, Times of India, 2024. 9. 28자 기사 참조

(5) ‘Indians Immigrate To Canada In Record Numbers’ The Forbes, 2024. 4. 25자 기사 참조

(6) ‘Troubles mount for Indian students: Canada abruptly ends fast-track student permit visa program’, Business Today, 2024. 11. 9자 기사 참조

(7) ‘Modi’s government planning to repatriate 18,000 Indians living in US illegally’, The Guardian, 2025. 1. 21자 기사 참조

(8) ‘US visa wait time for Indian applicants is as high as 500 days! Which cities top the wait list?’, Business Today, 2024. 11. 11자 기사 참조

 

(9) ‘Indians face mass Dubai visa rejections after UAE imposes new rules: Report’, Hindustan Times, 2024. 12. 9자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