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지난 연재>

 

(1) 청와대 습격사건 전말: 서울에 나타난 바바리코트 사내들

 

 

 

북한특수 부대는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늘로 솟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 군의 예상을 뒤엎는 속도로 포위망보다 앞서 내달렸다.

 

당시 우리나라 국군의 행군 속도는 시속 4킬로미터였다. 국방부는 이를 기준으로 124부대의 이동 경로를 예상하고 포위망을 설치했다. 그러나 124부대는 30킬로에 육박하는 군장을 메고 산악지대를 무려 시속 12킬로의 속도로 내달렸다. 이는 백 미터를 30초대로 주파하는 속도이다. 훗날 국방부 관계자는 자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청와대 진입을 위해 맨발로 산악 훈련을 실시한 124 특수부대의 작전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1월 21일 저녁 7시

 

대통령 암살조는 바바리코트 안에 총과 수류탄을 품은 채 이동했다. 청와대까지 가기 위해서는 검문소를 세 차례 통과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나무꾼 형제의 신고로 전군과 경찰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첫 번째 검문소인 세검정은 서대문 경찰서 관할이었다.

 

“뭐야! 너 우리가 누군지 알아? CIC 방첩대야. 지금 석 달 동안 산에서 개고생하다 내려왔는데, 뭐 검문?”

 

당시 방첩대의 명성과 권위는 하늘을 찔렀다. 검문소를 지키던 경찰은 눈에 살기를 띤 채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암살조의 기세에 눌려버렸다.

 

두 번째 검문은 자하문 고갯길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은 단 두 명의 병력이 총도 소지하지 않은 채 지키고 있었다.

 

“야! 너네 서장한테 연락 못 받았어? 우리 CIC야! 서장한테 당장 연락해 봐. 연락해서 잘못이 확인되면 너네 다 죽는다. 우리 지금 산에서 석 달이나 있다 와서 심기가 많이 불편해. 잘못 걸리면 국물도 없어.”

 

31명의 건장한 남성의 모습은 우리 방첩부대처럼 보이기도 하고 북한 특수부대라고 의심해도 틀리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무기도 휴대하지 않은 두 명에겐 이들을 끝까지 막아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아! 연락받은 걸 깜빡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통행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자하문 고갯길을 지키던 경찰은 이들이 북한군이라고 해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을 통과시킨 후 청와대 앞 초소에 긴급히 연락을 취했다.

 

“일단 저희 쪽에서는 통과시켰는데, 여러모로 수상합니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무기를 소지한 것이 분명하니 조심하십시오.”

 

암살조는 마침내 마지막 검문소에 도착했다. 이제 청와대가 3백 미터도 남지 않았다. 이 초소만 통과하면 남조선 대통령의 목을 딸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앞을 막아선 것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었다.

 

“멈추시오. 방첩부대가 아니라 더한 자가 와도 검문검색을 실시해야 하오.”

 

“뭐야! 당신 정말 이러다 재미없어.”

 

남북한 병력이 휴전선이 아닌 청와대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버스 한 대가 다가왔다.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 사이로 선명한 숫자가 보였다. 1813!

 

‘1813? 남한의 특수 부대인가? 나무꾼 형제 놈들이 신고했구나. 할 수 없다. 여기서부터 치고 들어가야겠다.’

 

북한의 암살조는 코트 안에서 총을 꺼내 우리 병력과 버스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북한군 특수부대원의 기세에도 밀리지 않고 소임을 다하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은 현장에서 순직했고, 그의 동상은 종로 자하만 앞에 세워져 있다.

 

1.jpg

 

북한군이 우리 국군부대로 오인하고 총격을 가한 버스는 1813번 시내버스였다. 청운동 집으로 귀가하던 16살 학생과 28세 직장인,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 고향에 아내와 자식을 두고 서울에 돈을 벌러 올라온 젊은 아버지가 북한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2.jpg

1968년 1·21 사태 당시 무장 공비의 수류탄 투척으로 내부가 대파된 시내버스

출처 - <대한뉴스 제659호(1968년 1월 26일)>

 

124부대는 우리 군경의 적절한 대응으로 청와대 진입도 하지도 못하고 산으로 흩어졌다. 서울시경과 미 8군, 육군, 수방사 등의 병력이 이들을 추격했다.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내려온 북한의 특수부대 잔당이 서울에 남아있다. 작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고 조명탄이 서울의 밤하늘을 대낮처럼 물들였다.

 

새벽 01시 30분, 인왕산 바위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 군은 그날의 암구호인 피아노를 외쳤지만 김신조는 대답이 없었다. 암살 작전이 실패했다고 판단한 김신조는 이미 모든 무기를 다른 곳에 숨겨두었고, 손에는 자폭용 수류탄 하나만 든 채였다. 우리 군은 위협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투항을 권유했다.

 

3.jpg

체포 직후의 김신조

출처 - <월간중앙>

 

“다시 한번 말하지만 투항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 그리고 자유 대한민국에서 새 삶을 보장한다. 지금 여기서 죽는 건 개죽음이다.”

 

김신조는 훗날 인터뷰에서 삶에 대한 애착이 솟아났다고 회상한다. 27살의 나이는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에는 너무 어리며 김일성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김신조 소위는 투항 후, 11개월간의 수사 끝에 자유의 몸이 되어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김신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북한군이 사살되었지만, 남은 한 명은 설날을 맞은 민가에 들이닥쳤다.

 

“조용히 하라. 신고만 안 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

 

“아...알겠소. 그런데 젊은이 밥은 먹었소? 그 다리도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총을 좀 내려놓고 밥이라도 드시오. 오늘 설날인 건 알고 있소?”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북한 특수부대 요원은 대한민국의 김 노인 앞에서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25살의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잘 먹겠수다.”

 

“천천히 먹게. 밥은 더 많이 있네. 여기 막걸리도 한잔하게나.”

 

노인은 북한 특수요원의 발까지 직접 씻겨주고, 새 양말까지 내어주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무장 해제된 특수대원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오랜만에 깊은 단잠에 빠질 수 있었다. 노인은 그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집을 나선 뒤 즉시 군부대에 신고했다.

 

“제발 살아서 다시 만나세. 그때는 나랑 같이 술 한 잔 하세.”

 

한국군이 집을 완전히 포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투항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죽는 것은...”

 

우리 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년은 수류탄으로 자폭했고, 굉음과 함께 모든 작전이 멈췄다.

 

열흘 넘게 이어지던 수색 도중 발생한 치열한 교전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북악 하늘길 트레킹 코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려 15발의 총탄을 맞은 소나무와 50발의 총격의 흔적을 안고 있는 호경암까지.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희미해지고 있지만, 산은 여전히 그날의 기억을 품고 있다.

 

4.jpg

북악산 백악마루 인근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총알 자국이 남은 소나무

 

북한 특수부대를 최초 신고한 나무꾼 형제들에게는 포상금 20만 원이 지급되었다. 짜장면 한 그릇이 50원 하던 시절이라 작은 돈은 아니었으나, 이 사건 이후로 포상금이 크게 인상되었다.

 

개인적으로 포상금과 관련한 부분에서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원을 묻자 개천에 물이 자주 넘쳐 동네 아이들이 학교를 못 가니 마을에 다리를 놔달라는 순박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포상금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훗날 막내는 경찰이 되었고,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김신조 씨와 연락하며 지낸다고 한다.

 

사건 직후 북한은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넘어 남한 국민들의 '자발적인 테러 행위'라는 억지를 부리며 자국민 시신 인계를 거부했다.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북한 특수부대원의 시신은 파주의 적군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죽어서라도 고향을 바라보라는 의미로 북쪽으로 향해 있다.

 

5.jpg

김신조 씨가 1·21 사태 이후 동료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출처 - <중앙일보>

 

625의 상흔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때에 일어난 이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가장 먼저 변화가 일어난 곳은 군 조직이었다. 전 장병의 휴가가 중단되고, 전 군인의 제대가 보류되더니 급기야 복무기간이 무려 6개월이나 연장되었다. 28개월 병장 만기 전역을 한 입장에서 당시 전역을 눈앞에 두었던 육해공군 병장들의 절규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북한 특수부대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 군은 이때 (장병들의 곡소리를 유발하는) 유격훈련을 도입하였고, 5분 대기조와 10일 동안 400킬로를 걷는 천리행군도 이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운 좋게 1968년 1월 이전에 제대한 예비역들에게도 달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짝다리에 삐딱한 모자를 쓰고 교육 종료 시간만 확인하는 예비군이 같은 해 4월, 빛의 속도로 창설되었다.

 

학교에는 교련 수업이 도입되었고, ‘이 연사 강력하게 주장합니다’라고 외치는 반공 웅변대회가 전국에서 열리게 되었다.  

 

1968년 4월 27일, 광화문 한복판에서 대형 동상의 제막식이 열렸다. 5천 년 역사상 최강의 전투력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 동상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에는 왜적에 맞서 나라를 지켜야 했고, 돌아가서도 북한군에 맞서 청와대와 대한민국을 지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청와대 경비 강화를 목적으로 북악 스카이웨이가 건설되었고, 주변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임자! 세검정과 평창동을 개발해서 사람들을 살게 해. 공비들이 청와대로 오기 전 은폐, 엄폐할 곳을 없애란 말이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자기 신분을 입증하는 문서를 휴대하고 다녔다면, 북한 특수부대가 우리의 방첩부대라고 우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에 착안해 도입된 것이 바로 주민등록증이다.

 

"임자! 내가 솔선수범하겠어. 주민등록증은 북한 무장 공비 검문 외에도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것이야."

 

6.jpg

1968년 11월21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민등록증을 교부받는 모습

 

주민등록증 1호의 주인공은 박정희 대통령, 2호는 육영수 여사였다.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가장 놀란 이는 북한 특수부대의 타깃이 되었던 박정희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임자!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김일성이가 나를 바보 천지로 보지 않겠어?"

 

군의 고위장성 한 명이 늦은 밤 중앙정보부장을 은밀히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어쩐 일로 저를?”

 

"우리도 극비리에 특수부대를 창설해야겠소. 저놈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잘 준비해서 김일성의 목을 따와야 하오."

 

북한의 124 특수부대에 맞선 남한의 684 특수부대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계속>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한 편 한 편 이야기로 엮는다. 

 

필요할 때는 스스로 재연(?!)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어주자...!

 

유튜브 채널 <기묘한 한국사> 링크

 

 

 

 

 

 

필자의 지난 책들

 

8965705983_1.jpg

1. 찌라시 한국사 (링크)

 

k942631735_2.jpg

2. 찌라시 세계사 (링크)

 

k962730685_1.jpg

3. 나 아직 안 죽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