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대통령 선거로 연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1년 선거에 출마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박정희와 여당 의원들은 김종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헌법개헌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국민투표에 의해 삼선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키고
국회 별관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민주공화당 의원들
출처-<KBS 역사 저널 그날>
출처-<경향신문>
"국민 여러분 덕에 제가 대통령 선거에 다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벌여놓은 일이 많습니다. 이번 딱 한 번만 더 밀어주시면, 더 잘 사는 나라를 제 손으로 만들겠습니다."
한편,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대권에 도전한 세 명의 후보 중 458표를 획득한 김대중이 김영삼과 이철승을 제치고 박정희에게 맞설 대항마로 지명되었다.
그렇게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질 제7대 대통령 선거는 3선에 도전하는 박정희와 47세의 도전자 김대중의 양강 구도가 성립되었다.
출처-<중앙선관위>
박정희의 강력한 라이벌
여당과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들의 압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둔 장충단 공원에는 김대중의 연설을 듣기 위해 무려 100만 명의 인파가 모여 심상치 않은 기류를 형성했다. 연설을 듣기 위해 100만 인파가 모인 것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고 이후에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런 광경 이후 16년이 지난 후 1987년 13대 대선이 되어서야 여의도 유세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7대 대선 투표일을 열흘 앞두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출처-<연세대 김대중도서관>
6.25 전쟁 당시 공산당에 의해 총살 직전까지 몰린 경험이 있던 김대중은 "독재는 가짜 반공이고, 민주주의가 진짜 반공“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연설은 규모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역사적이다.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1971년도에 지방자치와 여성인권신장을 주장했다.
9일 후 치러진 선거에서 박정희 53.2%는 김대중 45.3%를 획득했다. 둘의 표 차이는 94만 표에 불과했다.
"이건 박통이 진 거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이런 라이벌은 없었다."
양쪽의 분위기는 선거 결과와 반대였다.
1971년은 4월 대선에 이어 5월 총선이 열린 그야말로 ‘선거의 해’였다. 김대중의 인기는 선풍적이었고, 그는 지역구의 유세를 돕기 위해 팔도를 누볐다.
총선을 하루 앞둔 24일 오전 9시 30분, 김대중은 전날 해남과 신안의 지원 유세를 마치고,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은 채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광주 비행장으로 이동해 다시 서울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셔야......"
김대중과 그의 주치의, 경호실장, 권노갑 등이 선두 차량에 탑승했고, 경호원과 비서관들이 후미 차량에 탑승했다. 김대중 일행이 무안, 광주 간 1번 국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어.... 어... 저 트럭이 왜..."
맞은편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14톤 트럭은 중앙선을 넘어 김대중이 탄 차량을 향해 그야말로 돌진했다.
"으악!!!!!!!“
김대중 차량의 운전사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돌렸고, 트럭은 김대중이 탑승한 차의 뒷부분을 치고 후미 차량과 정면충돌했다. 후미 차량의 탑승자 3인이 즉사했고, 김대중은 이 사고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1971년 5·25 총선 직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김대중.
고관절 손상으로 이후 평생토록
지팡이에 의존해야 했다.
출처-<김대중평화센터>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교통사고였으나, 트럭 운전사는 무혐의로 처리되며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사고 차량의 소유주가 여당인 공화당 의원의 아들이었다는 점은 그저 음모론을 부추기는 소재로 여겨졌다.
조사 결과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고 고의로 볼만한 증거가 없다고 하니 아무런 일도 아니게 된 것이다. 훗날 인동초라 불리게 되는 김대중의 인생에 육체적 상흔을 남긴 또 하나의 사고가 그렇게 또 지나갔다.
독재체제 선포와 김대중의 피신
1972년 10월,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죽기 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국회는 해산되고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민은 무려 1987년까지 대통령을 선출할 수 없게 되는 봉건사회로 회귀했다.
출처-<동아일보>
유신정권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눈엣가시인 김대중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이다.
"선생님! 암살설이 돌고 있습니다.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에는 감수해야 할 부담이 너무 큽니다. 일본이나 미국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1971년 4월부터 김대중이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인 1972년 10월까지 그의 동향에 관한 1,100여 건의 보고서를 대통령 박정희에게 올렸다고 한다.
김대중은 참모들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다리 치료를 겸해 일본으로 넘어간다.
한국을 떠난 김대중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일본과 미국을 넘나들며 활발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강연회에서 탁월한 연설 능력으로 한국의 유신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는 거의 매일 거주지를 바꾸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주일한국대사관은 김대중의 소재지 파악에 애를 먹었다. 윗선의 질책이 이어졌다.
"당신 뭐 하는 거야? 그자가 허튼소리를 떠들고 다니는 걸 막지는 못해도 최소한 어디서 처먹고 자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나랏일이 우숩나? 요즘 각하 심기가 어떤지 알아? 답답한 것들!"
이후락
1973년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이었다.
이후락
1924년 울산에서 태어난 이후락은 울산농고 졸업 후, 1944년 12월 일본 육군하사로 전역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본에서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으로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았으며,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대령으로 진급해 육본의 정보국 차장을 역임하며, HID(북파공작원) 부대를 총괄 지휘했다. 전쟁 후에는 미국의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하고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하며 미국통으로 변신했다.
그렇게 미국 CIA와 인연을 맺은 그는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미국에 제공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훗날 5.16 세력에 의해 제거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6.25 전쟁도 기회로 만들었던 이후락은 이번에도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켰다. 박정희의 좌익 이력을 미국에 제공했던 그가 1963년에는 기어코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된 것이다.
타인의 불행과 무관하게 승승장구하는 그의 비결은 무엇일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시기에도 오직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내달리는 초고도의 이기심과 끈기! 그뿐만이 아니다. 이후락은 일본 대사로 근무할 적에 각하에 대한 충성을 온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책상을 서울로 향한 채 근무에 전념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긴자의 맛있는 초밥을 혼자 먹으면 각하 생각에 밤잠을 설쳐, 다음 날 외교 행랑으로 스시를 청와대로 배달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참신한 노력과 끈질긴 집념은 각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결국 이후락은 1972년 비밀특사로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을 가지며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1972년 11월 3일,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과
김일성.
출처-<매일경제>
그러나 신은 어찌하여 이토록 근면한(!) 이에게 시련을 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1973년 4월 소위 말하는 ‘윤필용 사건’으로 이후락은 다시 한번 위기에 빠진다. 모든 사건은 윤필용의 한 마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형님! 각하도 이제 할 만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각하 나이도 있으시니, 다음은 우리 후락이 형님 차례 아닙니까?"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윤필용의 이 말은 각하 귀에도 들어갔다. 이 말은 각하의 심기를 몹시 건드렸고, 많은 관련자, 혹은 무관한 자가 군복을 벗거나 숙청되었다. 당연히 당사자인 이후락의 입장도 몹시 곤란해졌다. 이후락은 이후부터 권력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여 다시는 권력 중심부에 들어오지 못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기획되다
‘윤필용 사건’이 있고 얼마 후인 그해 8월에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박정희의 지시가 있었다는 직접 증거가 나온 건 없지만, 김대중 납치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것은 여러 조사와 문서에서 훗날 밝혀졌다.
그러나 김대중 납치 사건의 시나리오를 처음 접한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보 이철희와 해외정보국장 하태준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강력히 반대했다. 현장에서 작전을 수행할 HID 출신이자 실미도 부대의 창설을 주도한 윤 대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을요? 그것도 일본에서? 절대 안 됩니다! 동백림 사건의 여파를 잊으셨습니까?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이제 70년대입니다. 그런 수법으로는 오히려 역효과만 일어납니다.”
<계속>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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