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림 사건
1967년 6월 8일 치러진 총선 후, 대한민국은 곳곳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이어졌다. 시위가 확산할 조짐이 보이자, 정부는 30개 대학과 148개의 고등학교에 휴교령 및 조기 방학을 실시했다.
그저 오비이락이었을까? 같은 해 7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동백림 사건’을 언론에 발표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문화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 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습니다. 이들은 무려 1958년부터 동베를린(동백림)의 북한 대사관을 거점으로 활동했으며, 서울대학교의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도 깊게 관련되었습니다.”
동백림 사건을 보도한
1967년 7월 9일 자
한국일보 1면
전 국민이 경악했고, 시위는 잦아들었으며 중앙정보부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당시 서독과 프랑스 정부에서 대한민국에 강력한 항의를 하며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중앙정보부가 해외에 거주하던 유학생과 예술가들을 납치 수준으로 강제 연행하였고, 조사 과정에서 강압적인 수사는 물론이고 고문이 이루어졌음이 드러난 것이다.
힘의 논리에 지배된 이들은 문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몰랐다. 윤이상은 오늘날의 BTS에 견줄만한 막강한 문화 파워를 가진 인물이었다. 베를린 국립음악대학을 졸업한 그는 뉴욕의 한 음악당에 모차르트와 함께 그 이름이 새겨져 있는 인물이기도 할 정도다.
작곡가 윤이상
출처-<한국일보>
중앙정보부는 서독과 프랑스 등 문화강대국과 외신의 눈치에 공정한 수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무려 203명의 관련자를 조사했으나, 간첩죄가 적용된 사람은 23명뿐이었고, 최종심에서는 그마저도 줄어들어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최종적으로 단 한 명도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광복절을 맞아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여 형기 집행을 면제함은 물론이고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다.
김대중을 수거하라
이로부터 시간이 지나 1973년 4월 ‘윤필용 사건’이 있고, 얼마 후인 그해 8월에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다. 박정희의 지시가 있었다는 직접 증거가 나온 건 없지만, 김대중 납치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것은 여러 조사와 문서에서 훗날 밝혀졌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시나리오를 처음 접했을 때,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보 이철희와 해외정보국장 하태준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강력히 반대했다. 현장에서 작전을 수행할 HID 출신이자 실미도 부대의 창설을 주도한 윤 대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을요? 그것도 일본에서? 절대 안 됩니다! 동백림 사건의 여파를 잊으셨습니까?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이제 70년대입니다. 그런 수법으로는 오히려 역효과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해당 공작은 끝내 최종 승인되었다.
“알겠습니다. 저희야 까라면 까야죠.”
“김대중이 미국과 일본을 오가지만 미국은 너무 부담스러워. 일본에서 와꾸 잘 잡아서 파우치를 통해 들여보내.”
“초밥 배송하던 그 파우치 말입니까?”
본국 정부와 재외공간을 오가는 외교행낭은 통관절차 없이 프리패스였다. 이 점을 이용해 공작을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현지 사정이 밝은 일본에서 시나리오를 짜면, 본국에서 최종 승인 및 수정을 가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사전 작업을 위해 자위대 출신 일본 탐정이 고용되었고,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온 보고서를 토대로 회의가 열렸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이봐! 어때? 감이 좀 오나?”
“일본이 미국보다는 수월하지만, 일본도 위험 요소가 너무 많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나랏일이라는 게 다 어렵지 뭐. 그냥 야쿠자를 고용해서 일본에서 끝을 보는 건 어때? 일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
“야쿠자는 절대 안 됩니다. 이 일은 성공하더라도 기밀 유지가 최우선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야쿠자는 반드시 뒤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야쿠자가 개입된다면 저는 이 일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이 사람. HID 출신답지 않게 많이 약해졌구먼.”
“그럼 자네가 알아서 잘 데려오도록 해. 절름발이가 말이 너무 많아.”
“혹시 저항이 너무 심하거나 목격자가 생기면 어쩌죠? 반드시 산 채로 데려옵니까? 아니면.”
“어허! 이 사람 참. 말이 많구만. 자네가 전문가잖아. 내가 일일이 다 지시해야 하나? 알아서 잘해. 알아서. 어!”
“민주주의,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하는 대학생도 골치 아프고, 모든 것을 걸고 바른말을 하는 참된 기자도 문제였지만, 하마터면 대통령이 될 뻔한 김대중은 박정희 정부에겐 그야말로 암적인 존재였다. 자신들의 독재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김대중은 필히 제거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수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최고 거물이었다. 대학생이나 기자처럼 다룰 수는 없었다. 아무리 중앙정보부라도 부담을 느꼈고, 그를 납치하는 사건에 그 누구도 온전한 지휘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김대중을 급습하다
D-18일, 김대중이 곧 미국으로 떠난다는 첩보를 받은 윤 대령이 단신으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고, 일본 현지에서는 감시, 납치, 지상 운반, 해상 운송 등 총 9개 조로 구성된 공작단 25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건너가면 출입국 기록이 남으니까, 현지에 있는 아주 믿을만한 요원들로 구성했네. 야쿠자랑은 질적으로 달라. 심지어 중정 간부들 친인척도 있어. 그러니 윤 대령이 다시 한번 나라를 위해 힘 좀 써주게. 이게 어디 나 혼자 잘 살자고 이러는 건가?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거 아닌가.”
사건 발생 이틀 전인 8월 6일, 주일한국대사관은 김대중의 동선에 관한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다.
“김대중이 8월 8일, 그랜드팔레스호텔 2211호에서 전 통일당 대표 양일동을 만난다고 합니다.”
“오케이! 주변 방 2개 즉시 예약하고 작전 개시.”
1973년 8월 8일 오전 11시, 경호원과 함께 택시로 호텔에 도착한 김대중은 홀로 객실로 향했고, 경호원은 평소처럼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김대중과 양일동의 환담이 이어지던 시각, 맞은편 방과 옆 방인 2210호와 2215호에서는 중정 요원들이 두 사람의 말을 도청하고 있었다.
출처-<경향신문>
12시가 되자 김대중의 측근이 합류했다. 세 사람이 점심 식사를 마친 시각은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요원들은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대중이 움직인다. 작전 개시.”
요원들은 호텔 방에서 나오는 김대중을 덮쳤다. 그리고 2210호로 데려가 마취제로 기절시켰다. 그 후, 요원들은 기절한 김대중을 지하 주차장에 대기 중인 차량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방을 나섰다.
“뭐 해! 빨리 엘리베이터 잡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는 두 명의 일본인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지하 주차장에 대기 중이던 차의 바닥에 던져졌고, 요원들은 서둘러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로비에서 대기 중이던 김대중의 경호원이 뒤늦게 객실로 올라가 보았지만, 이미 김대중은 사라진 뒤였다. 모든 것이 완벽한 작전처럼 보였다.
발각된 공작
그러나 대담하다 못해 어이없는 실수가 곳곳에 남겨진 ‘김대중 납치 사건’의 미스터리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시작은 두 명의 일본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그 일본인들 말이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얼어 있었다. 그들은 김대중의 경호원보다도 먼저 납치 신고를 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진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
일본의 수도에서 그것도 백주대낮에 사람을 납치한 후 고객용 엘리베이터로 이동한다? 호텔 주차장에서 대기 중이던 차량은 주차 비용도 결제하지 않고 냅다 도주했다. 게다가 도주 차량은 모두의 눈에 띄는 고급 승용차 닛산 스카이라인이었다. 자동차 번호판까지 침착하게 확인한 호텔 주차요원의 세 번째 신고가 이어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차량의 소유주가 일본 주재 한국대사관이라는 것이 너무나 쉽게 밝혀졌다.
김대중이 끌려갔던 방 안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의 증거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의자에 무심하게 걸려있는 김대중의 코트, 길이 1미터가 대형 배낭 2개, 숄더백, 10미터가 넘는 길이의 로프, 혈흔이 묻은 휴지, 각기 다른 제조사의 총알이 담긴 탄창, 북한산 담배, 파이프, 영양제, 마를린 먼로 사망 당시 발견된 것과 같은 종류의 마취제가 담긴 병, 유리컵에 선명하게 남은 주일대사관 직원의 지문 등 소년탐정 김전일도 잠시 당황했을 것이다.
출처-<KBS1 역사저널 그날>
“이 현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김대중을 납치했다면 분명 전문가의 소행일 텐데, 이렇게 많은 증거를 남긴 것은 또 다른 트릭인가? 다른 종류의 총알이 든 탄창을 사용하는 이들은 야쿠자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증거인 한국 대사관 1급 서기관의 지문, 주차 요금을 내지 않고 도주하며 모두의 이목을 끈 수상한 차량의 차주는 한국 영사관의 부영사? 북한산 담배 백두산은 북한의 소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현장에 남긴 트릭? 일관성이 없는 증거는 혹시 아마추어의 소행? 아니면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
사실 김대중 납치 사건에 동원된 요원들은 믿음직한 인물들이긴 했지만, 요인 납치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요원들 상당수는 중정 간부, 청와대 비서관의 친인척들이었다.
현장에 남은 무수한 증거는 채 수거되지 못한 것이었고, 납치 당시 영화만 많이 보았어도 하지 않았을 엘리베이터로의 이동과 주차장에서의 도주는 경험 미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치에 성공한 그들은 김대중을 차량 바닥에 깔아뭉갠 채 정신없이 다음 행선지인 오사카로 달려갔다.
“자자! 기운 내자고. 우리 임무는 여기까지다. 오사카에 가면 새로운 팀이 물건을 인수할 거야. 끝나면 스시에 사케 한잔 하자고.”
그러나 무려 5시간을 달려 오사카에 도착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팀은 없었다.
“다들 책임은 지기 싫다 이거지. 할 수 없다. 배까지만 우리가 운반한다.”
용금호
오사카 앞바다에는 열흘 전부터 ‘용금호’라는 한국 선박 한 척이 대기 중이었다. 용금호에는 해상운송을 맡은 요원들과 어선으로 위장하기 위해 함께 탑승한 선원들이 함께였다.
“이 배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국가 기밀이다. 알겠나? 어이! 거기 당신도 어서 여기 서약서에 서명하라고!
용금호는 1944년 건조되어 미국에서 화물선으로 이용되다 1972년도에 중앙정보부가 매각한 길이 52미터의 선박이었다.
용금호 선원들은 무언가 수상쩍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예감했지만, 자신들의 배에 김대중이 잡혀 올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거물급 간첩을 일본에서 잡아서 우리나라로 옮긴다던데, 그 말이 사실일까? 자네는 뭐 들은 거 없나?”
“내가 어찌 알겠나. 그저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거지. 우리는 뭘 봐도 못 본 거고, 들어도 못 들은 걸로 하자고. 그나저나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김일성이라도 잡아 오나? 후다닥 해치우고 어서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어? 저기 보트가 온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지고 얼굴에는 보자기가 써진 도쿄발 화물(?)이 마침내 용금호에 선적되었다. 선원들은 요원들의 지시에 따라 살아있는 선적물을 갑판 아래 비밀창고에 옮겨 실었다.
“어이! 뭐야! 일 똑바로 안 해? 얼굴에 테이프가 다 뜯어졌잖아. 어이! 이봐 당신 둘! 아래 내려가서 저 사람 얼굴에 테이프 다시 붙이고 보자기 씌우고 다시 올라와.”
갑판 아래서 인질을 다시 묶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선원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김..... 김.....대중? 왜 여기에....??”
용금호가 출발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훗날 김대중은 갑판 위에서 자신의 처리를 두고 오간 요원들의 대화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몸에 돌을 감는다고 바로 가라앉는 게 아니라니까! 솜이불을 같이 묶어야지. 그래야 물을 잘 먹어서 뜨지도 않고, 상어가 먹기도 좋다고”
“알겠습니다.”
<계속>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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