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납치된 김대중
일본 도쿄의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납치되어 오사카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던 선박 ‘용금호’에 실린 김대중.
출처-<KBS>
훗날 김대중은 갑판 위에서 자신의 처리를 두고 오간 요원들의 대화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몸에 돌을 감는다고 바로 가라앉는 게 아니라니까! 솜이불을 같이 묶어야지. 그래야 물을 잘 먹어서 뜨지도 않고, 상어가 먹기도 좋다고”
“알겠습니다.”
갑판 위의 대화를 들은 김대중은 하느님을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자신보다 나은 대안이 없으니, 자신보다 국민을 위해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때까지만 살려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김대중은 대한해협 어딘가에서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미국 CIA 서울 지부와 미국 대사관이 한국의 청와대를 방문한 정황은 있으나, 실제로 비행기가 용금호를 추적했다는 기록은 없다. 처음부터 암살 계획이 없었는지 미국에 의해서 또는 지휘부의 명령에 의해 계획이 변경되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여튼 결과적으로, 김대중은 또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1973년 8월 10일, 부산항에 입항한 용금호에서 내려진 김대중은 부산과 서울의 안가로 연이어 옮겨졌다. 그리고 13일 밤, 다시 차에 태워졌다. 김대중의 눈은 차에 타는 순간부터 다시 가려졌다.
“어디로 가는 거요?”
요원들은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마침내 정차했다.
“문을 열어 줄 테니 차에서 천천히 내리시오. 그리고 돌아선 채로 우리가 떠날 때까지 눈을 뜨지 마시오.”
김대중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김대중이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니 자신의 동교동 집 인근이었다.
“살았구나.....”
오십을 앞둔 한국 정치계의 거물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제 그만하자는 체념이 먼저였을까?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가 먼저였을까? 그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의 심정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하는 가장처럼.....”
진실을 덮다
다음 날 김대중 납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졌다. 그리고 김대중의 바지에서 발견된 쪽지를 근거로 범인이 빛의 속도로 밝혀졌다. 바로 애국심이 넘친 나머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청년들 ‘애국청년구국대’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뒤이어 이상한 일이 이어졌다.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에 경찰 인력이 투입되었다.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집으로 가는 골목마다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무려 8천 대에 가까운 차량이 통제되었다. 이 차량 중에는 언론사 차량이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김대중은 안전하게 차단되었다.
한편, 김대중 납치에 사용되었던 용금호는 급작스럽게 페인트칠했음은 물론이고 유성호로 이름까지 바꾸며 새 단장했다.
일본 경찰은 납치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을 근거로 대사관 직원 김 씨의 출두를 요구했으나, 그는 이미 한국으로 입국한 뒤였다.
일본 의회도 ‘김대중 납치 사건 특별조사 위원회’를 꾸려 일본땅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납치 행위에 대해 한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 경찰에 한국 내에서의 철저한 조사를 약속하였고, 김 씨는 외교관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그러나 독자 제위 여러분의 예상대로 김 씨는 몇 년 뒤 복직하게 된다.
김 씨의 본명은 김재권으로
그의 아들이 오바마 정부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이었던 ‘성김’이다.
위 사진의 인물이 성김.
출처-<KBS>
일부 일본 언론은 ‘300엔 사건’이라고 보도했는데, 목장갑 하나만 끼었어도 지문이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롱하는 뜻의 이름이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고 석 달이 지난 10월, 김종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일본 총리를 찾아가 사과를 했다. 늘 그렇듯 이런 종류의 사건에는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과 소문이 난무했는데, 김종필 총리가 짧은 비행 내내 똥 씹은 표정으로 담배를 한 갑이나 넘게 피웠으며, 일본 총리의 심기를 달래기 위해 한국의 재벌이 4억 엔을 줬다는 확인해 줄 수 없는 말이 세간에 떠돌았다고 전해진다.
다나카 총리는 “김대중이 센스가 있다면 다시는 일본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 머리도 없다면 그의 미래도 없다”라는 일본인 특유의 애매한 톤으로 하나 마나 한 말을 남겼는데, 김대중은 센스가 있는 것인지 사건 발생 22년이 지난 1995년에야 일본을 방문하고, 대통령에 당선됨은 물론이고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되었고, 사직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2주 후 은밀하게 한국을 떠났다. 박정희를 종교처럼 모시던 이후락은 왜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을까?
이후락(왼쪽)과 박정희
출처-<연합뉴스>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와 평온한 삶을 살던 이후락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는다.
'떡을 만지다 보면 손에 떡고물이 묻기 마련이다‘는 명언을 남겼던 그의 재산은 어느 정도였을까?
1980년 6월, 계엄사에서 발표한 이후락의 재산은 194억 3510만 원이었다. 당시 서울의 집 한 채 값이 대략 200만 원이었다. 그러나 이 금액은 이후락이 외국으로 빼돌린 것으로 추정되는 재산을 제외한 금액이었다.
다시 기사회생한 이후락은 1987년,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유로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말했다.
“민비가 시해당한 후에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데는 몇 년이 걸렸으니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겠지요.”
1980년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부정 축재자로 몰려 축출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평요'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박정희가 지시했다는 근거
김대중 납치 사건은 결론적으로 완벽하게 실패한 작전이 되어버렸다. 김대중의 대중적 인기가 더욱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요, 그를 불사의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에피소드만 추가되고 말았다.
이와 반대로 당시 한국 정부는 외신에 의해 깡패 국가, 야만 국가로 매도되었으며, 일본 내에서 온갖 차별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던 재일동포들은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다며 정부를 향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시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사전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묵시적 승인’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국정원 진실규명위 종합보고서
조사위는 비록 이를 밝혀줄 문서나 증거를 찾지 못했으나, 아래의 이유를 판단 근거로 제시했다.
1. 이후락 중앙정보부 부장이 이철희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보의 작전 반대에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화를 낸 점
2. 또 다른 인물 김00이 ‘대통령의 결제를 확인하기 건에는 작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적극적으로 협조한 점
3. 사건 발생 후 관련자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보호받았으며,
4. 사건의 진상규명보다 김종필 총리를 일본에 파견해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수습한 점 등
진실규명위원회의 활동 설명회에서 안병욱 위원장은 당시 김대중 납치 사건에 가담했던 두 명의 요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죄를 구하는 편지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저도 이제는 이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싶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납치 당사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후 김대중의 고난과 극복
납치 사건 이후에도 김대중의 인생에는 어떠한 비유로도 오롯이 표현해 내기 힘든 수많은 실질적 위기가 닥친다.
사형수로 복역 중인
김대중 대통령
출처-<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1979년 12·12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음모 혐의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김대중은 1980년 9월 17일부터 사형수로 복역하다가 레이건 정부의 압박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감옥에 있던 김대중에게 전두환 정권은 지속적으로 한국을 떠날 것을 요구했고, 결국 김대중은 1982년 12월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 후 전두환 정권의 암살 위협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1985년 총선을 앞둔 야당 정치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귀국했다. 2년 뒤 6월 항쟁이 벌어졌고,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김대중의 시련은 남아 있었다. 이후로도 노태우 당선, 3당 합당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모든 걸 극복한 끝에 그는 드디어 1998년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출처-<대통령기록관>
IMF라는 극심한 위기 속에서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게 된 그는 세계가 놀랄 정도로 IMF를 빨리 극복하였으며, IT산업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한류 문화의 토대를 닦아 지금의 세계적 한류 열풍이 가능하게 했다.
믿기 힘들지만, 지금도 김대중 대통령이 겪었던 고난의 세월이 반복되고 있다. 검찰이 갖은 수를 동원해 야당 지도자인 이재명 대표를 제거하려 하고, 극우 세력으로부터 물리적인 암살 시도도 있었다. 21세기에 상상도 못 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에 대한 ‘수거 리스트’가 작성되었다.
'노상원 수첩'에 적힌 수거대상 명단.
(입수한 제보 내용 통해 재구성)
출처-<뉴스타파>
비상계엄은 실패로 끝났지만, 아직도 내란 세력은 이 악물고 반격하고 있다. 내란죄로 구속되었던 윤석열이 이해 못 할 이유로 석방되었고, 아직도 소요 사태 유발 및 이재명 대표 암살 계획은 진행 중이다. 윤석열은 어떻게든 탄핵을 기각시켜 다시 돌아오려 한다. 윤석열이 돌아오면, 수많은 것들이 뒤집어질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 문화, 사람, 자유 등 모든 것이 싹 다 제거될 것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일생을 떠올려본다. 그를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고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더 큰 용기를 얻기 위해 광장에 나가 동지들과 뜻을 연대한다. 수많은 김대중이 보인다. 이 많은 김대중이 모였는데, 못 이룰 것이 무엇이랴. 다시금 김대중을 떠올려 본 이유다.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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