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 1일 저녁 9시경. 격주로 금요일마다 열리는 가족 만찬의 날, 맏아들 디펜드라(Dipendra)는 샷건, MP5K 머신건, M16과 권총 등을 꼼꼼하게 챙겨넣은 가방을 들고 자기 방을 나왔다. 술과 마리화나에 흠뻑 취해 있던 그는 연회장 입구에 총이 가득 든 가방을 내려놓고는 양손에 총을 한 정씩 들고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왕궁에서 열린 가족 파티에 군복을 입고 총을 든채 나타난 왕세자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네팔의 국왕인 비렌드라(Birendra) 앞에 멈춰섰다.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고, 국왕 비렌드라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티에 참석했던 왕족들은 실수로 총이 격발되었다고 생각했고, 왕세자 디펜드라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연회장을 나와 가방에서 M16과 글록(Glock) 권총을 골라잡은 디펜드라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연회장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디펜드라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왕가의 원로들부터 하나하나 조준사격하기 시작했다.
Figure 1 네팔 왕실. 가장 왼쪽부터 디펜드라 왕세자, 비렌드라 국왕, 니라잔 왕자, 아이슈와리야 왕비 그리고 슈루티 공주
(출처: The Annapurna Express)
총을 좋아했던 디펜드라는 여러 정의 총기를 소유하고 있었고, 밤에는 궁전의 뒤뜰에서 새와 동물을 사냥하곤 했었다. 그 때문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음에도 궁전의 경비 병력과 근무자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초동 대처가 늦어졌다. 한편, 한바탕의 살상극을 마치고 연회장을 빠져나온 디펜드라의 뒤를 디펜드라의 어머니(왕비 아이슈와리야, Aishwarya)와 디펜드라의 동생인 니라잔(Nirajan) 왕자가 뒤쫒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둘도 디펜드라의 총에 희생되고 만다. 그러고 나서야 디펜드라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그날 밤 모두 9명이 사망했는데, 여기에는 네팔의 국왕 비렌드라, 왕비 아이슈와리야, 니라잔 왕자와 공주 슈루티(Shruti) 등 왕가의 직계가족이 모두 포함되었다. 자살시도를 했던 디펜드라는 이틀 가량을 혼수 상태로 버티다가 결국 사망한다. 왕가의 직계존비속이 모두 사망하지 결국 사망한 비렌드라 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오늘의 주인공인 문제적 남자 갸넨드라는 이렇게 네팔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왕실 살인극이 워낙에 끔찍한 사건이다보니 네팔 전체가 큰 충격에 빠졌다. 살인사건의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온갖 종류의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왕족 중에서 유일하게 국왕 비렌드라만 입헌군주제를 포함한 민주적 거버넌스를 지지하고 있었고, 왕비인 아이슈와리야, 왕세자인 디펜드라 등이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왕족 내부의 의견대립이 격화되면서 아버지의 유화적 정책에 불만을 품은 왕세자가 왕위를 찬탈한 후 전제군주제로 회귀하기 위해 끔찍한 살인극을 저질렀다는 추측이 제시되었다. 반면, 웨인 매드슨(Wayne Madsen)을 포함한 음모론 지지자들은 미국의 CIA와 인도 정보기관인 RAW(Research and Analysis Wing)가 공모해서 날로 친중(親中)적인 정치성향을 보이던 네팔 왕가를 몰살시키고 그 혐의를 디펜드라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결혼에 반대하는 왕실에 불만을 품은 왕세자 디펜드라의 단독 범행이라는 네팔 정부의 공식 발표가 지금까지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디펜드라와 데비야니
디펜드라는 영국 유학중 만난 데비야니 라나(Devyani Rana)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데비야니는 네팔 왕가가 싫어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녀가 속한 라나 가문은 대대로 네팔의 총리와 장관을 수두룩하게 배출한 유력가문이자 네팔 최고의 부자로서, 네팔 왕가와도 견줄만한 막강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한마디로 네팔 왕가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집안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데비야니의 어머니는 인도 중부 마디야프라데시(Madhya Pradesh)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는데, 데비야니의 외가 역시 가난한 나라 네팔의 왕실 쯤은 가볍게 압살할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다. 디펜드라의 어머니(아이슈와리야 왕비)의 눈에 데비야니가 예쁘게 보일리가 만무했다. 한마디로 네팔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셈인데, 현실 속의 디펜드라와 데비야니의 사랑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보다 더 끔찍한 결말을 맺은 것이다.
네팔의 왕실인 샤왕조(Shah Dynasty)는 네팔의 고르카(Gorkha) 지역 영주였다가 네팔 전체를 통일하는데 성공한 프리트비 나라얀 샤(Prithvi Narayan Shah, 재위기간 : 1768-1775)에 의해 창시되었다. 제10대 국왕인 비렌드라는 1972년 즉위했는데, 1990년초에 네팔 국민들의 커져가는 민주화 열기에 호응하여 절대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주적으로 성립된 네팔 정부는 무능했고, 1996년 마오이스트(Maoist)1들이 이른바 ‘인민전쟁(People’s War)를 선언하고 네팔 정부에 맞서기 시작하면서 네팔 전역에서 무려 14,00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사회혼란은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마오이스트 반군에게 강경하지 못한 국왕 비렌드라에 비해 그의 동생 갸넨드라는 군사적 수단을 동원한 강경한 대응을 공공연히 주장한 강경론자였다. 이렇다보니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마오이스트 및 마오이스트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상당수의 농민들에게 갸넨드라는 국민밉상일 수 밖에 없었다. 왕실에서 학살극이 벌어지던 그날 갸넨드라는 운 좋게 지방에 체류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갸넨드라가 학살극에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미확인된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그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네팔 시민들이 2001년 6월 7일에 열린 갸넨드라의 왕위계승식에 맞춰 왕궁으로 몰려들기도 했다. 결국, 끔찍한 살인극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열린 갸넨드라의 즉위식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Figure 2 갸넨드라 국왕의 즉위식(출처: The Royal Watcher)
그 어떠한 국민도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끔찍한 학살극의 결과로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국민밉상 갸넨드라는 자신의 형과 여러가지 면에서 달랐다. 우선, 1990년대부터 이어져온 민주화 운동에 맞춰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고 정당정치를 허용했던 자신의 형과는 달리 절대 군주제로 회귀하겠다는 계획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결국, 2005년 갸넨드라는 의회를 해산하고 절대 군주로 등극했다. 언론 자유는 위축되었고, 야당의 정치 활동은 극도로 침해되었다. 갸넨드라는 절대 군주제를 도입하면 네팔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다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그저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친위쿠데타에 불과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와 체포 그리고 불법적인 구금이 계속되었고, 네팔 시민들의 저항은 극렬했다. 결국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 끝에 네팔 시민들이 승리했다. 2006년 4월 24일 갸넨드라는 해산했던 의회를 다시 개원하겠다고 발표한다. 재소집된 의회는 3주 후 갸넨드라에게서 법률거부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린다. 결국 2008년 5월 허수아비로 앉아있던 갸넨드라 왕을 완전히 폐위시키고 네팔은 공화정으로 전환하게 된다. 갸넨드라는 평민으로 신분이 바뀌어 국유화된 왕궁에서 걸어나오게 된다.
2008년 6월 11일 카투만두 나리얀히티 궁전을 떠나는 갸넨드라
출처 - 뉴시스
한편, 갸넨드라의 아들인 파라스(Paras) 왕자의 고약한 행동도 악명높았다. 2000년 술에 만땅 취한 채로 차를 몰다가 네팔 최고의 인기 가수를 치어 죽이는 바람에 60만명이나 되는 네팔국민들이 그를 처벌하라고 청원하는 일도 있었다. 네팔 부총리의 친척과 말싸움이 붙자 권총을 꺼내 공중에 쏴대는 바람에 불법 총기사용죄로 고발당하기도 했고, 음주 측정을 하려던 애꿎은 경찰을 흠씬 두들겨 패기도 했다.2 아버지인 갸넨드라 만큼이나 국민밉상인 파라스 왕자를 향한 네팔 국민들의 원성과 미움은 커져갔지만 그는 한 번도 정식 재판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삶을 누렸다. 한 마디로 아버지와 아들이 쌍으로 미움을 받고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왕정이 폐지되고 평민으로 신분이 바뀐 후에도 갸넨드라의 정치적 발언과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2012년에는 언론에 등장해 네팔은 왕정으로 돌아가야 하며 자기야 말로 적법한 네팔의 국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3, 잊을만 하면 이러저러한 공식행사에 참석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심지어 2024년 10월에는 부탄 왕실의 초청을 받아 자신의 딸과 조카를 데리고 부탄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를 포함한 방문단은 부탄 왕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귀국 길에는 부탄 국왕이 직접 환송했다고 알려졌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끼어있는 네팔의 지리적 특성상 네팔의 정치는 크게 보면 친인도 성향의 정당과 친중 성향의 정당이 경쟁하는 구도이다. 하지만, 이들 세력들이 조금씩 이념적 차이를 달리하는 군소정당으로 분화되어 난립하는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면서, 왕정이 폐지된 2008년 이후 정권이 13번이나 바뀌는 정치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민들의 삶도 엉망이다. 이런 정치적, 사회적 불안 속에서 가장 득세하는 세력은 ‘왕이 있을 때가 좋았어’라는 향수를 자극하며 국민들의 지지세를 끌어모으고 있는 왕정복고주의자들이다.
Figure 3 갸넨드라가 네팔 서부 방문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자 지지자들이 모여들었다(출처: CNN)
2025년 3월에는 네팔에서도 가난한 지역으로 꼽히는 서부 지역을 방문하고 카트만두의 트리부반공항(Tribhuvan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하는 갸넨드라를 보기 위해 수천명의 네팔 사람들이 공항에 몰려들었다. 선루프를 열고 차에서 몸을 내민 그는 왕정복고를 연호하는 시민들을 내려다보며 자애롭지만 근엄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댔다. 불과 몇 년 전 친위쿠데타를 벌여 네팔의 민주주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기자와 야당 정치인을 잡아들이며 정치탄압을 일삼았던 독재자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가난한 국민들을 사랑하는 자비롭고 진지한 국왕의 모습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덧칠하려는 시도였다.
2008년 왕정 폐지 후 친중세력과 친인도세력의 대결 격화로 이미 혼란해질대로 혼란해진 네팔의 정치판에 이제는 각종 악행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은 친위쿠데타 수괴까지 재등장하면서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왕정복고주의자들이 아직은 상대적으로 소수인지라 갸넨드라가 국왕의 자리에 복귀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네팔 국민들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처벌받지 않은 친위쿠데타 수괴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견뎌야만 하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다. 이래저래 안타까울 뿐이다.
2 ‘Profile: Paras Shah, Nepal’s errant former crown prince’, www.bbc.com, 2010. 12. 14자 기사
3 ‘Former King Gyanendra of Nepal wants to be reinstated’, BBC News, 2012. 7. 6자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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