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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돌이키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나 또한 이 사건을 통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받았고, 내 가족들 역시 그랬다. 언제나 즐겁고 행복해야 할 가족들의 식사 자리가 상당 시간 동안 침묵으로 도배되었고,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으로 중단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평생 치유되지 못할 상처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여기 그 상처를 딛고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던 한 청년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기가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었던 “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을 표어로 삼아 역설적으로 이제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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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은 이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와중에도 진보의 깃발을 들고 버티고 있는 미소정당, 노동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이번 총선에 출마를 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어떤 사람일까?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결코 눈에 띄지 않는 가난한 청년들, 어딘가의 반지하방, 어느 건물인가의 옥탑방, 좁아터진 고시원 같은 곳에서 음울하게 숨어 있으면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인력수요를 최저임금 이하의 알바노동으로 채워주고 있는 그런 빈곤한 청년들 속에서 “내가 지금 여기 서 있으며 이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외치면서 나타난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인물이다.


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용혜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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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용혜인 후보는 “”, 물뚝심송은 “”로 표기한다.)



호구조사


 : 어쩌다 이런 악의 소굴까지 오시게 되었는가?


 : 몰랐어요. 여기가 악의 소굴인가요?



이너뷰는 대학로 시절의 딴지 벙커원(최근 충정로로 이전했다)에서 있었다.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지하 벙커에 오면서 거기가 대한민국 최고의 악의 소굴이라는 것도 모르고 오다니, 참으로 순진한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사진을 찍고 난 뒤 본격적으로 이너뷰를 시작했다.



 :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다고 표현해도 되겠다. 큰 결심이었을텐데.. 괜찮으신가?


 : 괜찮냐고요? (웃음) 상당히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질문인 것 같네요. 고민도 많았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20대들 사이에서는 나이가 많은 편이지만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너무 어리잖아요. 걱정도 많았는데, 출마하고 시작하고 나서 바쁘게 살다 보니, 특히 SNS에서 반응이 많이 오면서 힘을 얻기도 했어요.


 : 27살이신가? 그 나이면 뭐 당선되어도 최연소 기록은 안 되는데?


 : 만으로 스물다섯이니까 기록일 수도 있어요. 김영삼 씨가 만으로 스물여섯이었으니까요.



김영삼은 1927년 12월 20일생으로 1954년 5월 20일에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만 26세, 태어난 지 26년 5개월 만의 일이다. 용혜인 후보는 1990년 4월 12일에 태어나 2016년 4월 13일 총선에 도전하고 있다. 만약 당선된다면 똑같은 만 26세지만, 26년하고 단 하루 만에 당선된 것이니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록을 5개월 차이로 깨게 된다. 아니 그 이전에 용혜인 후보의 입장에서는 4월 12일이 생일이니 엄청난 생일선물을 받게 되는 셈이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 그럴 수도 있겠다. 이 이너뷰는 언제나 그렇지만, 정치적 입장이나 주장들 보다는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봄으로써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는데 촛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언제 태어나셨는가?


 : 1990년 4월 12일에 태어났어요.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 회사가 옮기면서 안산으로 같이 이사갔어요.


 : 어렸을 때의 가정 형편은?


 : 아버님은 자수성가 스타일이였고, 나름대로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 자수성가라면 돈을 많이 버셨다는 것인가?


 : 돈이 엄청나게 많지는 않았고, 크게 부족함 없이 알뜰하게 모아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차근차근 해 나가는 집안이었죠. 안산에서 중앙초등학교, 중앙중학교, 경안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 다 근처에 있는 학교들을 다닌 것인가?


 : 예. 맞아요. 아파트 단지에서 걸어서 십분 이내 거리에 있는 학교를 계속 다닌 거죠.

 

 :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라면?


 : 월드컵이요.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 오, 2002년 월드컵.


 : 예. 그랬고 많이 놀았고, 어려서부터 책 읽는 걸 좋아해서 학교에 걸어가면서 책을 읽곤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께서 아파트 창문을 열고 “야! 용혜인!” 하고 외치셨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 책 덮고 막 도망가고..


 : 혹시 그 시절에 읽었던 책 중 기억에 남는 것은?


 : (웃음) 너무 어려서 기억이 잘 안 나요.


 : 중고교 시절에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었는가?



초중고 시절에 관한 추억은 한 사람의 인생을 짐작케 해 줄 단서가 된다. 따라서 열심히 캐물었으나 정말로 별다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용 후보의 삶의 키워드는 “평범함”이 된다. 하지만 이 또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말이다.



 : 대학 들어갈 때까지 별다른 일이 없어요. 사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데, 아버님께서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셨어요.


 : 위기가 다가오는 느낌이다.


 : 처음에는 돈도 더 버시고 잘 되다가 고3 때부터 갑자기 어려워졌어요. 2008년 무렵이죠. 그때가 바로 광우병 촛불 때였는데, 제가 딱 그 세대였어요. 제 친구들은 다 야자 째고 집회에 나가곤 했었는데 저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요.



많은 언론에 이미 보도된 내용이지만 용 후보는 고교 시절 광우병 촛불 시위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굉장히 많은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평범한 모범생이었다는 뜻.



 : 굉장히 모범생이었나 보다.


 : 모범생이었어요. 학원은 별로 안 다녔지만 야자 열심히 하고..


 : 공부도 굉장히 잘했는가?


 :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했어요.


 : 성적과 관계없이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들을 할 시점이었을 텐데.


 : 저는 아무래도 여자니까 교대나 사범대에 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하지만 왠지 그런 데는 가기 싫었어요. 여자는 교사를 하는 게 안정적이다, 뭐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왠지 싫어했어요. 굳이 바득바득 우겨서 사회과학을 전공으로 택했죠.


 : 중고교 시절에 사회과학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한 경력도 없이?


 : 그런 적 없어요. 저는 그런 스타일도 아니었고, 학교에서 짜놓은 대로 열심히 하고, 촛불시위도 안 나가고, 조중동 보면서 “성장이 우선이고 파이는 키우는 게 맞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요.


 : 주류의 시각을 가지고..


 : 맞아요. 수행평가로 시사토론하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서 FTA 찬성 입장을 맡아 토론을 하기도 했어요.


 : 그랬던 소녀가..


 : (웃음) 예, 그랬던 소녀가 이렇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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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오히려 비범한 수준. 뭔가 하나 특이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유일한 특징은 “책을 좋아한다” 정도.. 초중고 시절에 뭔가 특이한 점을 하나도 찾지 못한 채 대학 시절로 넘어간다.




대학 시절, 사회에 눈을 뜨다


 : 그래서 대학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 경희대 사회과학부 정치외교 전공 하고 있어요.


 : 굉장히 무서운 전공을 택하셨다. 재미는 있으신가?


 : 1, 2학년 때에는 학교 공부가 참 재미있었는데요. 3, 4학년 되면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학과공부에 흥미를 잃었어요. 책에 있는 내용이 현실과 맞지 않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얘기라는 느낌인가?


 : 그런 거겠죠? 비슷한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엄청 거창한 것, 사회를 바꾼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 사회가 구제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는데요. 책에는 그런 내용은 없더라구요.


 : 그런 건가.. 하여간 그런 대학을 가려면 요즘 기준으로는 공부를 엄청 잘하신 것 같다.


 : 아닙니다. (웃음)


 : 정리해 보자면 그렇게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대학에 와서 사회과학부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면서 이제 전공 공부가 현실과 괴리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거다. 그 다음에는 관심이 어디로 가게 되었는가?


 : 고3 때 아빠 사업이 어려워졌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수능 끝나고 입학할 때까지 알바를 했어요. 강남에 있는 예식장에서 일을 했어요. 당시 최저 임금이 3,800원이었는데 수습이라는 명목으로 3,500원을 받고 일을 했어요. 구두 신고 머리 올리고 하루 종일 7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날랐습니다. 그 때 제가 하루 종일 일을 하면 14시간 정도 일을 하고 5만 원 좀 안 되게 받았거든요. 7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300개씩 나르고 했었는데, 그것만 해도 2,100만 원이에요. 그런데 저는 일당으로 이 스테이크 한 접시를 못 사 먹는 거죠.


알바가 끝나고 나면 직원들이 알바생 수십명을 모아 놓고 남은 스테이크를 나눠 먹여 줘요. 그럴 때나 겨우 맛을 볼 수 있는 거죠. 그러면서 직원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겨울이니까 고객들이 모피 같은 걸 많이 입고 오시는데, 음식을 쏟기라도 하면 세탁비가 더 나가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라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먹었어요.


 : 그렇다면 그런 사고를 치면 그걸 알바가 보상을 해야 한단 말인가?


 : 사고를 한 번도 쳐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웃음)


대학에 들어오면서 미래를 상상했어요. 서울에서 밤에 청계천 같은 곳을 돌아다니면 보이는 불 켜져 있는 고층 빌딩 같은 곳에서, 그런 곳에서 입에 빵하나 물고 야근하는 직원 같은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알바를 해보니 내 자신이 너무 하찮아 보이는 거에요.


 : 그 때 느낌을 표현해 본다면?


 : 슬픔에 가깝고, 무력감 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상상했던 미래와 자신이 겪게 된 현실의 괴리감.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청년들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이런 괴리감 속에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극소수다. 어떤 이는 순응해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좌절해서 쓰러질 뿐이다. 차이점은 무엇일까?



 : 당시에 최저임금제 같은 제도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는가?


 : 그런 게 있다는 것은 알았어요. 하지만 그게 강제사항인 줄도 잘 몰랐고, 그런 제도가 있어 봐야 현실에서 “누가 그걸 지켜?” 라고 생각을 했어요.


 : 고교 시절, FTA를 찬성하고 성장이 우선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처럼, 이런 제도는 당연히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인가?


 : 그렇죠. 하지만 내가 막상 당사자가 되니,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고 느끼게 된거죠.


 : 일은 많이 힘들었는가?


 : 사실은 그 알바를 입학한 뒤에도 계속했어요. 평일에는 학교를 가고, 주말에는 알바를 하는 식으로 이틀 벌어서 일주일을 살아야 되는 건데, 이게 너무 힘들거든요. 밤중 9시까지 구두 신고 서서 일을 하고, 다음날 또 아침 일곱시까지 나가야 되고 하니까 견디기 힘들었죠. 토요일은 일하고 일요일은 뻗어 버리고 그랬어요.


 : 몸이 버티질 못하는 상황.


 : 예. 그렇게 되면 돈이 모자르고, 신입생이라 MT 같은 거 가게 되면 또 일을 못 하게 되고 생활비가 부족하게 되고 그랬어요.


 : 많이 속상하셨겠다.


 : 많이 답답했죠. 제가 원래 모범생이고, 효녀였거든요.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어요. 안산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교통비가 이천 원 정도 들어요. 왕복하면 사천 원인데 집에 돈이 하나도 없는 거에요. 그 돈 사천 원이 없어서 학교를 못갔어요.


어떻게 사는 게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무 살이 되어서 처음으로 어떻게 인생이 이러지..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죠.


 : 가장 행복해야 할 시절에..



내가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가슴 한 구석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져서 질문을 이어가기 힘들어졌다. 아주 사소한 일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아주 작은 돈이 없어서 일상이 중단되는 느낌은 안 겪어 본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차비가 없어서 학교를 못 가고, 라면 한 봉지 살 돈이 없어서 밥을 굶어야 되고, 사용요금을 못 내서 전기나 가스가 끊기는 경험.


바로 빈곤의 실체와 직면하는 순간이다.


못 겪어 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까지 가난해질 때까지 왜 대책을 안 세우는가, 뭔가 잘못이 있는 거 아닌가, 게을렀거나 무능했거나 악행을 저질러서 벌을 받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을 거라고 생각을 한다. 자신이 겪어 보지 못한 고통을 겪는 자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이 사회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누군가 과도하게 가진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생존에 필요한 수준의 기본적인 소유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부의 편중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자와 빈자의 구분은 대부분 “운”에 기인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빈곤에 직면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의 누군가에게, 십중팔구는 부모에게 책임을 묻게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뭔가 죄를 지었다고 믿어 버리게 된다. 가족관계가 파괴되기 시작하고 자존감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이게 더 무서운 일이다.


가난은 그렇게 인간의 심성을 파괴하는 무서운 존재이다.



 :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죠. 자존심 상하니까 친구들에게는 “난 오늘 아파서 학교 못 가.” 이렇게 얘기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엄마한테는 “어차피 학교 가기 싫었는데 하루 쉬지 뭐.” 이렇게 얘기를 했죠. 그렇게 얘기하고 넘어가는 데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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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럴 때 보통 부모님을 원망하기가 쉬운데..


 : 그러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부모님들도 최선을 다하고 계셨거든요. 열심히 살고 계시는데 왜 안 되지?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 보통 IMF 때나 2008년 이후 금융위기 때에도 게으르거나 뭔가 잘못한 사람들이 망해서 어려워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알기는 어려웠을 것 같고, 열심히 사는데 왜 이렇게 안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지셨던 모양이다.


 : 맞아요.



거기에 사람이 있었다


 : 이제 문제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음은 무엇인가?


 : 처음엔 그랬어요. 제가 겪고 있는 문제가 더 심화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저 말고도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내가 겪는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서 나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구나, 하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존재를 깨달은 거에요.


 : 어떤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가?


 : 예식장 알바 할 때, 같이 일하던 오빠가 있었어요. 거기는 원래 각자 알바가 가능한 시간에 나와 알바를 하게 되는 구조인데 거의 매일 일을 하는 사람이었죠. 이렇게 일을 하면 언젠가는 정직원이 되지 않겠냐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에요.


 : 얼마나 일을 해 왔는가?


 :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6개월 이상한 거 같아요. 일을 잘해서 직원들도 좋아하고 그랬는데, 저는 그렇게 해서 정직원이 되겠나 싶고 안타까웠어요. 그만큼 정규직 되기가 힘든 거잖아요.



사람은 타인의 모습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 정규직이 되고 싶어 발버둥 치는 다른 이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 자신은 어떤 처지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특별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는 이상 평온하게 학업을 마치고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으로 보인다.



 : 또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이거에요. 한진 중공업 관련해서 희망버스에 참여했었어요. 어려서 조중동만 읽다가 대학 들어와서 한겨레, 경향, 각종 시사 주간지 같은 걸 읽게 되면서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곳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러다가 2011년에 1차 희망버스에 참여했습니다.


 : 아, 그 때, 남쪽으로 내려가신 건가?


 : 사실 그게 뭔지도 잘 몰랐어요. 그냥 친구와 후배들이랑 술 먹으면서 “무가당”이라는 걸 만들었었어요.


 : 그게 뭔가?


 : “무적의 가짜 노동당”. (웃음) 지금은 남한에도 노동당이 있지만 그 때는 북한에만 노동당이 있었잖아요. 하도 뭐만 하면 종북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가짜 노동당이라고 주장한 거죠.


 : 지금의 노동당은 당시에는 진보신당이었는가?


 : 그렇죠. 그 무가당 친구들이 희망버스라는 게 있다는데 한 번 가보자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같이 가게 된 거에요. 친구들은 뭔가 좀 알고 갔던 거 같은데 저는 진짜 얼결에 갔어요. 부끄럽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거기서 막 담 넘고 그러던 것이 저에겐 무척 충격이었어요.


거기다가 갔다 와서 이런저런 조사를 해 본 거죠. 저분들은 왜 저러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니 정리해고 문제 같은 것도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김주익이라는 분이, 김진숙 씨가 투쟁하고 있던 바로 그 크레인에서 목을 매서 자살하셨다는 것이었어요.



일반인들이 흔히 하기 힘든 경험. 사회적인 집회의 현장에서는 언제나 약간의 폭력과 약간의 무질서가 동반되기 마련이지만 자주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그런 행동들은 언제나 처음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경험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거기다가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아가 그 투쟁의 현장이 바로 얼마 전에 또 다른 노동자의 생명이 끊어진 바로 그 장소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 충격은 배가된다. 



 : 그것도 모르고 내려갔던 것인가?


 : 예. 바로 그 자리에서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어요. 저는 2008년 FTA 찬성하던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이제 세상은 바뀌었고 민주화 운동은 마무리되었으며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직 이런 싸움들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이렇게 싸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본 거죠.


그 때 처음으로, 나 말고도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에요.


 : 2002년 노무현의 참여정부 출범에 대해서는?


 : 그 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잘 몰랐어요. 월드컵만 열심히 봤죠. 그 때 효순이 미선이 사건 기억나고 촛불시위가 있었는데 그저 그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느꼈죠.


 : 그렇다면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참여 이전에는 사회적인 활동 경험은 거의 없었는가?


 : 네. 신입생 시절에 종편 반대 집회에 구경하러 갔던 기억이 나긴 해요. 친구가 가자고 해서 그냥 구경하러 따라간 거죠.


 : 사실 학업 외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다.

 

 : 그렇죠. 정말 여유가 없었어요. 학교가 너무 멀어서 가는 데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렸어요. 그렇게 일 년 반을 다니다가 고시원 생활을 했어요. 처음에는 좋았죠.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느낌이었어요.


월 27만 원짜리, 창문도 없는 고시원 생활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지더라구요. 남녀 공용 고시원이라 남자들이 막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스트레스였고, 너무 좁고 힘들었어요. 고등학교 시절까지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거의 못해봤는데, 고시원 생활을 하게 되면서 내가 진짜 가난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 때, 고시원 방보다 더 넓은 친구 하숙방에 가서 같이 자고 고시원에 돌아와서는 옷만 갈아입고 하기도 했어요.



가난의 물리적인 실체는 이런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너무나 당연한 안전하고 평온한 공간이 누군가에는 정말 갖기 힘들고 절실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 그러다가 2012년에 4학년이 되면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되는 거에요. 학점도 별로 안 좋고 스펙도 쌓아둔 게 없잖아요. 먹고 살길이 막막한 거죠.


 :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하셨는가?


 : 학자금 대출이죠. 2009년도 학자금 대출 이자가 7%였어요.


 : 그거 완전 사채이자 아닌가?


 : 그렇죠. 나중에 갚는 것 말고는 아무런 메릿이 없는 조건이었어요. 바로 매달 만 원 이상 이자를 내야 되는데 그게 밀리면 은행에서 독촉전화가 오는 거죠. 정말 스트레스였어요.


 : 8학기 대출을 다 받았은 건가?


 : 그때 또 아버님이 사업이 망해 다 정리하고 양평에 가서 비닐하우스까지 하시다가 원래의 거래처에서 연락이 와서 다시 사업을 시작한 시점이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졸업하면서 빚지고 시작해서 되겠냐는 이유로 어떻게 마련을 해 주셨죠.


그렇게 등록금을 감당하다가.. 작년에는 다시 학자금 대출을 받았었죠. 아주 꼬박꼬박 빼가더라구요.


 :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졸업은 하셨는가?


 : 한 학기 남았어요. 그러다가 생각을 해 보니, 결국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5급 공무원.


 : 5급이면 바로 행정고시 아닌가?


 : 그렇죠. 행정고시 준비를 시작했어요. 신림동에 방을 얻고 학원은 비싸서 못 가고, 인강 위주로 했죠. 독서실 같은 곳에서 복사해주는 자료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한 거에요.


 : 그런 시험 공부는 잘하는가?


 : 고딩 때는 제가 공부를 좀 했는데 나중에 또 하려니까 쉽지 않더라구요. 많이 힘들었어요. 2012년부터 공무원 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했죠. 한국사 같은 것도 하고, 토익 공부도 하고. 하루 종일 혼자 있으려니까 너무 이상해서 사람 말소리를 듣고 싶어 야구 중계를 틀어 놓고 공부를 했어요.


 : 야구를 좋아하시는가? 어느 팀을 응원하시는가?


 : 넥센이요.


 : 넥센 이외의 팀을 응원하시는 분들은 어쩌려고 그런 얘기를..


 : (웃음) 그렇게 공부를 하는데 너무 재미가 없고 사는 게 힘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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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취라는 게 김치 하나 먹으려 해도 너무 비싸서 감당이 안 되거든요. 다른 분들은 또 자취하면 맨날 스팸 같은 거 먹는 줄 아시는데, 스팸 그것도 무척 비싼 거에요. 시장이 훨씬 쌉니다. 시장에 가서 반찬을 조금씩 사다가 먹고, 참치캔 같은 거, 진미채 볶음 같은 거 먹고 밥도 다 해 먹고 그랬어요. 하루 종일 그렇게 방안에만 있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 좁은 방 안에서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거죠.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겠다고 이러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언제 성공하고 성공할 때까지 어떻게 버티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또 그렇게 5급 공무원이 된다고 해서 뭐가 바뀌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가 2013년에는 알바연대 같은게 생기면서 조합비 내고 활동을 했어요.


 : 조합비는 얼마나 되는가?


 : 한 달에 한 시간 최저 임금. 요즘 같으면 6,030원이죠.


당시 대학생 알바 관련된 일을 하면서 야간에 실태조사 같은 거 하고, 야간알바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그랬어요.


오후 8시에 시작해서 야간알바 12시간 하고 아침 8시에 퇴근해서 씻고 자면 다시 저녁때 출근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완전히 사회와 격리되어 살게 되는 거에요.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한 거죠.


그러다가 2014년에 세월호 참사를 겪게 된 겁니다.


 : 드디어 세월호인가.



용혜인과 세월호


 : 2014년 1학기에 졸업을 위해 학교를 다시 다니고 있었는데,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듣게 된 거에요. 안산에 오래 살았고, 제게는 단원고 이름이 익숙해요. 어찌 보면 친구 후배들이고..


당시 시험 기간 전주라 학교에서 시험공부 하던 중에 아침에 수업을 들어가는데, 수업 들어가기 전에 뉴스를 보게 된 거에요. 그런데 당장 전원 구조라는 얘기가 나와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수업을 듣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수업 듣고 나오니까 오보였다는 거에요. 처음에는 멍했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 큰 배가 넘어가는데 이렇게 실종자가 많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부가 구조하고 있었고, 저 안에 누군가 살아 있어서, 일부러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려고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 일주일 정도는 말이죠.


 :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 그러다가 얼마 시간이 흐르고 밤늦게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과목이 서양 정치사상 이런 거였어요.


 : 제목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


 : (웃음) 아리스토텔레스 나오고 하는 시험공부를 하다가 트위터를 통해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대교 건너 행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에요.


아니, 정부가 그렇게 구조하고 있다고 하고 그러는데, 왜 저럴까 사람들이.. 왜 저러지? 라고 생각을 했어요.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실제로 뭐가 문제인지는 거의 언론에 안 나왔어요. 그건 거의 몰랐는데, 제가 놀란 것은 경찰이 경찰버스를 열대를 동원해서 그 가족들을 막아섰다는 거에요.


제가 정권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들을 잘 달래서 이해를 시키고 문제를 잘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러지 않고 경찰병력을 동원해서 막아선다는 것, 공권력이 그 상황에서 그 가족들을 상대로 어떻게 저러지? 하는 의구심이 생겼어요. 충격적이었죠.


어떻게 가족을 잃고, 가족을 아직 찾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국가권력이 저럴 수 있지? 하면서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충격을 받았어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막연히 국가 권력에 대해 선의의 기대를 하기 마련이다. 이 국가는 최소한의 합리성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다, 그 구성원에 대해 최소한의 합리적인 태도를 보여줄 것이다, 뭐 이런 당연한 기대 말이다.


그런 당연한 기대가 깨지는 순간 사람들은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끼기 전에 당황을 하게 된다. 용혜인 후보 역시 그랬던 것 같다.



 :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 어떤 것을 하려고 한 것인가?


 : 친구들하고 모여서 지금 생각하면 참 조악하지만 노란 리본이라도 만들어서 돌리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진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들하고 얘기를 한거죠. 추모의 뜻이라도 표현을 해야겠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거죠.


그래서 침묵 행진이라도 하자, 한 손에 국화꽃을 들고 노란 리본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뭔가 해야 하는데, 고민을 하다가 당시 사람들 사이에 많이 돌던 “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을 떠올린 거에요.


 : 그 “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신 건가?


 : 선내에서 그런 방송을 했다는 거 자체가 마음 아픈 거죠. 그러나 유가족들을 진도대교에서 막아서는 모습을 생각했던 거죠.


한국사회에서 이런 사고가 반복되는 현상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을 한 거죠. 처음에는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런 문장을 생각하다가 결국 깔끔하게 “가만히 있으라”로 결정한 거죠.


이 말이 우리에게 울림이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울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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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혜인을 우리 사회에 알린 그 첫걸음.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로 상징되는 그 침묵시위는 이렇게 정말로 평범한 모범생의 정말로 사소한 기획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에게 울림이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울림이 있을 것이다. 내가 느낀 감정들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상식적이고 단순한 기대가 바로 연대의 가능성을 알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력은 언제나 이런 단순한 시작을 과대포장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상식적인 시작을 상식적이지 않은 누군가의 음험한 기획으로 몰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배후를 찾는다. 그러나 그런 배후는 그들의 망상 속에만 존재하는 법이다.

 


 : 함께한 분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 지금도 같이 하는데, 학교 후배, 고대 친구, 서강대 친구, 그리 많지는 않았어요.


 : 그건 범 대학 연대 구조 아닌가?


 :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었지만, 의도한 바는 아니었어요. 그냥 아는 친구들일 뿐. (웃음) 선배들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이런 거 하면 경찰에서 연락 오고 그럴 거라고. 거기다가 저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잖아요.


그래도 뭐 괜찮아, 뭐 별일 있겠어? 하면서 강행을 한 거죠.


처음에는 청와대 게시판에 이 일을 알렸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있었기도 하죠. 행진을 시작하기 바로 전날, 24시간 전에 이 일을 홍보했어요.


 : 바로 전날, 그것도 청와대 게시판에 알리는 건 너무 급박한 거 아니었을까?


 : 별로 홍보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친구들끼리 모을 수 있는 사람들 모아서 한 이삼십 명 모여서 하려고 한 거죠.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오신 거죠.


 : 첫날 얼마나 모였는가?


 : 그게 지역마다 좀 다른데, 홍대에서 시작할 때 한 30명, 서울광장에는 150에서 200명 정도가 모였어요.


 : 무섭지 않으셨나?


 : 처음에는 무서운 줄 몰랐어요. 그런데 끝나고 집에 가는데 앞에 스타렉스가 갑자기 서는 거에요.


 : 검은색?


 : 은색이요. 저는 심지어 그 번호판까지 기억을 해요. 1120.. 전 남친 생일이거든요. (웃음) 친구하고 얘기를 하면서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광교 근처였어요. 갑자기 차 한 대가 서는데 운전석에 한 명이 있고,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 뭔가를 들고 있는데 빨간색 빛이 보이는 거에요.


 : 카메라?


 : 그렇죠.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어요. 지금 생각하면 당시 쫓아가서 따져 물었어야 하는데, 그냥 어~ 하다가 차가 가버린 거죠. 그걸 보는 순간 좀 무서운 기분이 들었어요.



작은 개인이 드디어 국가 권력과 만나게 되는 시작점이다. 왜 국가는 이런 작은 개인에게 그냥 당당하게 다가와서 어쩌다가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 어려운 점은 없었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정상적인 대화로 물어보지 않는 것일까? 당장 경찰 요원을 투입해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채증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뭘까?


단순하다. 그들 또한 두려운 것이다. 이들의 상식적인 요구를 자신들이 들어주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그 상식적인 요구가 수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연대의 힘을 업고 국가 권력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성장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한참 인터뷰가 중단되었는데 원인은 단순하다. 딴지 벙커원의 열악한 시설에 의해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누가 썰렁한 개그를 친 것도 아닌데 추웠다. 결국 무릎담요 같은 걸 준비하고 나서야 이너뷰가 지속되었다. 



 : 그 이후로 엄청난 일들이 생겨나 버렸는데, 그 과정을 겪으면서 스스로 어떤 변화를 겪으셨는지 궁금하다.


 : 가장 큰 변화라면 취업을 포기한 것이죠.


제가 뭐 세상을 바꾸겠다거나 엄청나고 거창한 의지를 가지고 이런 걸 포기한 것은 아니고요. 아주 식상한 답변이 될 수도 있겠는데..


다시 골방에 처박혀 시험공부 하는 삶으로 돌아가기가 싫었어요. 그렇게 살면 제가 너무 우울할 것 같았죠. 삶의 낙이 없을 거 같았어요.


 : 내가 못 견딜 것 같은 느낌?


 : 그런 거에요.



가장 솔직한 답변이다. 여기에 뭔가 거창한 이유를 붙였다면 오히려 신뢰도가 떨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결정을 미화하기 위하여 명분을 붙이곤 하는데 사실은 그 대부분은 거짓말이다. 용 후보의 이유는 가장 원초적이었고 순수했으며 솔직한 그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는 것.



이렇게 살면 돈을 못 벌겠죠. 사회적으로 5급 공무원이 되는 것만큼 성공하진 못하겠지만, 돈 조금 벌고 살면 되죠. 저는 오히려 좋은 집에는 못 살아도 좋은 차를 몰면서 살고 싶었는데 세월호 사건 이후로 경찰서 다녀오고 그러면서, 그냥 대중교통 타고 조금 좁은 집에 살고 결혼도 제때 못하더라도 나 혼자 생계를 이으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돌아가기는 싫었어요.


 : 시험을 포기하는 순간에도 뭔가 다른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운 것은 아닌 것 같다.


 : 그렇죠. 그냥 학교 계속 다녔어요.


 : 졸업은 하셨는가?


 : 아직 한 학기 남았어요.


 : 대학을 참 오래 다니신다.


 : (웃음) 그런 편이죠.



용혜인에게 세월호는 우울하고 암울한 삶의 궤도를 저버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안정되고 평온한 미래가 보장된 길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 삶으로 돌아가기는 싫게 만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버린 사건이었다.


이만큼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



왜 노동당인가?


 : 입당은 2010년에 했어요.


 : 무척 일찍 입당을 한 것 같다.


 : 사실 저는 굳이 노동당이어야 한다고 생각은 안 했어요. 하지만 정치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정당의 당원이 되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한 것뿐이에요.


진보신당의 존재 자체를 2010년에 처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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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 이제는 진보신당의 역사에 대해서는 조금 아시는가?


 : 이제는 좀 알죠. 당시에는 전혀 몰랐어요. 당시 그냥 당비를 내는 당원이 된 거에요. 당에서 무슨 활동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죠.


단지 당시 노회찬 후보의 선거운동을 선배의 소개로 하게 되었는데, 그 선거운동을 통해 존재를 알게 되고 입당을 한 거에요.


 : 그 노회찬 후보는 이제 진보신당에 있지 않은데.


 : 그렇죠. (웃음) 하여간 저는 꼭 이당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죠. 다만 저는 이 당에 들어왔고, 이 당에 있어야 하는데 떠나간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노회찬 씨도 그 중의 하나.. (웃음)


 : 그렇다면 당을 선택하는 과정상의 치열함 같은 것은 없어 보인다.


 : 그렇죠. 하지만 세월호 이후에 생겼어요. 당시에 집회 같은 거 많이 했잖아요. 사람들과 모여서 같이 하고, 집회 끝나고 흩어지는데 언제나 가장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저기 있고,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끝까지 같이 서 있어 주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라고 느낀 거에요. 소속감이 생긴 거죠.


이 사회에서 존재가 지워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언론에서 보도해 주지도 않고, 정부에서도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사회에 알리는 방식이 농성하거나, 단식하거나, 광고탑에 올라가거나 하는 방법밖에 없잖아요.


이 사람들에게는 길거리를 전전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정당은 이 당밖에 없다는 거죠.



최후의 궁지에 몰린 약자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방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약자들에게 옆에 함께 서 줄 수 있는 정당, 함께 할 수 있는 정당이 노동당밖에 없었다는 것.


이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거기에 더해, 그런 약자의 편인 정당이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소수정당이라는 점이 더해지면서 가슴 한켠이 무거워진다. 우리 현실의 무게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는 정치를 하겠다고 했지만, 앞으로 길거리에서 해 왔던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제가 길거리에서 해 왔던 일을 계속하겠다는 거에요. 거리에서 해왔던 것을 이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다는 정치가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담아낼 방법이 없어요.


기가 막힌 경험이 하나 있었어요. 세월호 유가족들이 관련법 제정 문제로 600만이 넘는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 왔어요. 그런데 이한구 원내대표가 유가족들에게 야당의 박영선 원내대표에게 협상의 전권을 주시라고 요구하는 거에요. 제가 박영선 대표였다면 굉장히 기분이 나빴을 것 같아요.


이 얘기는 바로 자신들은 이 600만의 사람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의미잖아요. 정치는 이래서는 안 되죠. 그 사람들이 우리의 대표여야 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50%를 득표했다면 확률적으로 유가족의 절반은 박근혜를 찍은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무책임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저들은 유가족들을 대변할 마음이 없는 거죠.


이것은 우리의 정치가 아닌 거죠.


 : 자신들은 유가족들을 대변하지 않는다?


 : 거기다가 이한구 대표가 이런 얘기를 해요.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다, 국민들의 뜻을 받아 안고 협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대변하는 국민들은 따로 있고, 유가족들은 대변하지 않겠다는 거죠.


무척 화가 났었어요. 그래서 찾아봤죠. 이한구 원내대표가 표를 얼마나 받고 당선되었는가 봤더니, 3만표 정도였어요. 그렇구나..


 : 이것은 정치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다.


 : 이런 정치는 우리의 이야기를 담을 수 없다, 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결국 우리가 직접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


거리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순간들을, 기존에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곳으로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일을 하겠다고 맘을 먹은 겁니다.


 : 매우 짧은 시간 속에 압축적인 경험을 하셨다.


 : 그런 셈이죠. 그래서 출마 결심을 했고, 지역구를 할까, 비례대표를 할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노동당은 사실 많이 득표하기 힘들잖아요. 많아야 3%, 적으면 1.5%. 비례는 한 석이라도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거기다가 지역구는 그래도 말할 기회도 많고 그런데 비례후보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요.


 : 골목 골목 다니면서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역시 지역구 후보가 낫다.


 : 그렇게 다니면서 얘기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고 싶었는데, 노동당이 어렵잖아요. 외적으로 내적으로 다 어렵습니다. 결국 비례대표에 나가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대표 하시는 구교현 대표도 그런 쪽으로 말씀을 해주셨어요. 당의 상황을 고려해서 사실 조금 더 어려운 길이긴 하지만 비례대표로 나가기로 결정했어요.



노동당의 비례대표 후보는 현 당대표인 구교현 후보와 용혜인 후보로 결정이 되었다. 용혜인 후보가 1번.



 : 정치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 맞아요. 기탁금이 천오백만 원이더라구요. 대출받아야죠. (웃음)


 : 펀딩은 안 하시는가? 당차원에서 할 수 있을텐데..


 : 비례는 원래 개인 후원을 받지 못하죠. 공보물이나 이런 것은 당에서 선거기금으로 해주긴 하는데, 기탁금은 순전히 개인이 내야 하는 거에요. 대출받아 해결할 생각이에요.


 : 정말 큰 일이다.


 : 어떻게 되겠죠. (웃음)


 : 어떻게 되지 않는다. 이러다가 신불자 되는 거 한 순간이다. (웃음) 당내에 용혜인을 지지하는 모임이 있는가?


 : 저는 청년 당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요. 실제로 활동하는 청년당원이 가장 많은 정당이 노동당이에요. 제가 만나는 청년 당원들도 세월호 관련한 활동을 하다가 입당한 친구들이 많아요. 저 친구도 민주당 출신이에요.



그러면서 용 후보를 수행해 온 청년당원을 지목했다. 왠지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만 두기로 했다. 어떤 답이 나올지 머리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급하게 해야 하는 일들, 실무적인 일들을 맡아 주는 친구들이 있어요. 세월호 때부터 계속 같이해온 친구들인 거죠.


사실 이런 거에요. 저라는 후보가 있고 사람들이 그 후보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제가 정치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 이후 같은 일을 해 왔던 사람들이 우리의 정치를 하겠다고 집단적인 결정을 한 것이고 저는 단지 그들을 대표해서 후보가 된 것뿐이에요.


 : SNS 활동 같은 것은 어떻게 분담하는가? 한방에 훅가는 수가 있는데..


 : 그건 제가 직접 다 합니다. 조심해서 하고 있죠.


그런데 정말로 언론이 보도를 안 해줘요. 이런 얘기도 들었어요. 용혜인이 만약 다른 당 후보로 나왔다면 훨씬 더 많이 보도해 줄 것이라는 얘기요.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SNS에서는 활발한 반응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 사실 SNS는 현실 세계에는 별다른 힘이 없는데..


 : 그래도 SNS 마저도 없다면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겠죠.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저에게 있는 힘은 바로 이런 분들이 주시는 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SNS에서는 수많은 진보적 담론이 오간다. 그러나 그 비율은 지극히 적다. 현실세계에 힘을 미치기 힘들다. SNS 사용자들 역시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인식을 하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실이나 어떤 주장들은 그런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회에 알릴 방법이 없기도 하다. 그 미약한 힘 하나를 붙들고 정치를 시작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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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에 하나 당선이 되었다. (웃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 제일 먼저 할 일이 있어요. 저를 도와준 친구들과 국회 잔디밭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을 거에요. 짬뽕도 됩니다.


 : 국회에 입성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의미인가?


 : 그런 면도 있죠. 실제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결국 청년 일자리 문제에요.


사실 이 문제는 청년들에게 복지 조금 늘려주고 혜택 조금 더 준다고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으로 누적되어온 “불평등”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청년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제 선심성 정책이나 시혜 정책은 필요 없어요.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해 줘야 하죠.


거기다가 어른들은 청년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시지만, 청년들은 지금 구조적으로 사회에 관심을 가질 여력도 없는 상황이에요. 예전같이 학생운동 하고 놀다가도 취직해서 가정 꾸리고 집도 사고 그럴 수 있지만, 요즘에는 불가능해요.


제가 다니는 학교, 나름대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이고 취업율 높은 학교인데도 졸업생 취업률이 50%가 안 되거든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거에요. 최저임금 만 원, 노동 시간 단축 이런 문제, 일자리 나누기, 이런 것들이 중요하죠.


중요한 것은 인간답게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기본소득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확실하게 해 두자. 이 이너뷰에서 기본소득 이야기를 먼저 꺼낸 쪽은 분명히 용혜인 후보 쪽이다. 내가 먼저 꺼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기본소득 얘기만 꺼내면 물뚝은 맨날 기본소득 얘기만 한다고 사람들이 하도 뭐라 해서 하는 소리이다.


그만큼 일자리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어쩔 수 없이 기본소득 이야기로 갈 수 밖에 업다는 증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 요즘 기본소득은 녹색당이 가장 강하게 추진하고 있는 분위기다. 노동당은 어떤가?


 : 사실 기본소득을 가장 먼저 주장하신 분들은 노동당에 계십니다. 당내에서 여러가지 이견들이 있어서 이런 논란들을 당이 받아 안아 가면서 생산적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그런 점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노동당에는 전 사회당 대표 금민씨가 있고, 그 분이 우리나라에 기본소득 관련 아이디어를 처음 도입한 최초의 멤버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그 금민 전 대표에게 직접 기본소득에 대해 들어본 인터뷰 기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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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뷰]기본소득은 사회주의적 제안인가? - 전 사회당 대선후보 금민을 만나다




녹색당이 잘하는 걸 보면서 좀 부럽기도 했어요. 운동권 사람들은 사실 자기 완결성 때문에 좀 복잡해요. 선거국면에서 국민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한데 그게 좀 늦어지는 것 같아요.


 : 언제 들어왔다고 벌써 당을 음해하다니.. (웃음)


 : 위험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웃음)


 : 건강은 어떠신가?


 : 큰 병은 없는데 체력이 그렇게 센 편은 아니에요. 밤은 잘 새는데, 다음날 쓰러지죠.


 : 취미는?


 : 저는 모범생이었고요. 별다른 취미는 없어요. 주로 잠을 자죠. 데이트 할 때 영화 보는 거 같은 건 싫어해요.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할 시간도 없는데, 컴컴한데 들어가서 앞만 보다가 나오는 건 좀 아깝다고 생각을 해요.


 : 덕질을 하는 분야는?


 : 아이돌 팬이에요. (웃음) 신화의 오래된 팬이죠.


 : 아니, 신화가 아직도 아이돌인가?


 : 무슨 소리신지.. 신화는 아이돌 맞습니다. (웃음)


 : 여행은 좋아하시는가? 음식 취향은?


 : 부모님께서 여행을 좋아하셔서 어려서 많이 가 봤어요. 강원도 쪽을 주로 많이 다니셨죠.


음식은 주로 매운 걸 좋아하거든요. 밤중에 가끔 불닭볶음면 같은 걸 먹죠. 좀 매우니까 우유 한 통 사다가 같이 먹곤 하죠.


 : 아악.. 그건 인간의 음식이 아니다!! 어찌 되었거나 이제 슬슬 마무리하자. 딴지일보 독자들에 드리는 말씀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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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너뷰는 마무리되었다.


아주 평범하게 자라온 한 사람이 가난이라는 괴물과 부딪히게 되고, 현실의 부조리를 깨닫는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사회적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 사람은 어떤 변화를 해온 것일까 하는 문제가 궁금했었다. 도대체 어떻게 바뀌었길래, 심지어 한 정당의 1번 비례대표 후보로 정계에 뛰어들 결심을 한 것일까?


독자 여러분들에게 그걸 전달하고 싶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변화의 폭이 커서 인생의 경로 자체를 바꾸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바뀐 인생경로를 따라가게 될 그 사람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우리 모두의 인생을 바꿔 놓게 될지도 모른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두렵고 힘들지만 나와 타인의 인생을 모두 바꿔놓을 수 있는 거대한 모험이다.


동화 속에 나오는 소년같이 용감하게 대모험의 길을 떠나는 용혜인 후보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빌며 마친다.


끝.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