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지금까지 통일교, 신천지 그리고 JMS를 알아봤다. 앞으로 안상홍 증인회와 기독교복음침례회(유벙언), 기쁜소식선교회(박옥수), 생명의말씀선교회 그리고 박근혜 탄핵 당시 이슈가 되었던 최순실/최태민의 영세교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다. 그 전에 한 박자 쉬어가면서 몇 가지 배경지식을 알아보려고 한다.

 

우리나라에 왜 재림예수가 유독 많은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초기 개신교 선교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기독교 인구가 증가하던 시절 Rice Christian(쌀 기독교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쌀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7967_6401_3444.jpg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

 

Rice Christian은 문자 그대로 '쌀 기독교인', 즉 쌀을 얻기 위해 개종한 기독교인을 뜻한다.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기 보다 해외 선교사들로부터 식량(쌀), 의료, 교육 등 물질적 지원을 받기 위해 형식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을 지칭했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 이들을 통칭하는 표현이었다. 이 개념은 우리나라의  초기 개신교 선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868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다. 신분제가 폐지되고 왕정이 복고 되는 중앙집권 정치가 시작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부터 시작된 260년간의 무사 정치가 막을 내렸다. 일본은 빠르게 변한다. 철도, 통신 등 각종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전통적 사회에서 근대식 국가형태로 변모해 갔다. 일본 사회 전반은 서구 문물을 선망하는 분위기였으며 일반 시민들도 이에 호의적이었다.

 

일본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인식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팽창을 목격하면서 이들처럼 변하지 않으면 서양에 먹힌다는 절박한 위기 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서구 문물은 새로운 것일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화면 캡처 2025-07-25 143455.jpg

1940년 경, 메이지 시대 일본 여성들이 방직 공장에서 누에에 먹이 주는 모습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富國強兵), 문명개화(文明開化)를 내걸고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정부가 주도하자 지식인, 상류층, 도시 시민들은 빠르게 서구 스타일을 모방했다. 기모노 대신 양복과 드레스를 착용하고 벽돌로 지은 유럽풍 건축물에서 의자에 앉아 식탁 위에서 돈까스, 빵과 맥주 같은 음식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교육 제도도 바뀌었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과학, 수학 중심의 교육 내용이 주를 이루기 시작했고, 미술, 음악, 연극 등 예술 분야에서도 서구 문물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물론, 과도한 서구문화 집중 현상으로 인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모노마네(ものまね, 우리말로 흉내를 낸다는 뜻)라 하여 겉으로 보이는 것만 따라하는 사회적 현상을 꼬집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근대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방향성은 시민들에게 대체적으로 환영받았다.

 

화면 캡처 2025-07-25 144850.jpg

1899년 개항된 군산은 호남 지역 쌀을 일본으로 선적하는 거점 항구였다

출처 - (링크)

 

반면,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나라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다. 하지만 개방에 대한 외세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에 항구를 개방했다. 1854년 일본이 미국과 강제로 화친조약을 맺고 개항했던 방식 그대로 일본은 우리에게 개항을 요구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의 ‘Rice Christian’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왜 일본의 상황을 언급하나 싶을 것이다. '쌀 기독교인' 현상을 이해하는 데 일본의 사례는 중요하다.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서구 문물을 접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자국의 경험을 되살려 약소국을 침탈했다. 강대국 앞에서 불평등한 개방을 경험하고 약자에게 그대로 가혹하고 폭력적인 태도를 취했다.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강제로 개방하게 되었다.

 

일본은 서구 문물 수용을 생존의 문제로 인식했다고 했다. 조선 역시 그러한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으나 수용 방식이 달랐다. 일본은 국가 주도로 적극적이고 실용적인 서구화를 추진했으며, 일정 수준의 근대화에 도달한 이후에는 그에 대한 자기 반성도 있었다. 민예운동이나 화혼양재론 등이 대표적인 예다.

 

조선은 달랐다. 서구 문물은 여전히 위협적이거나 이단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개혁은 정치적 파벌과 사회적 갈등 속에 번번이 좌절되었다. 개방 자체가 주체적 선택이 아니었고 외압과 위기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서구화에 대한 비판적 수용에 앞서 수용 자체가 혼란스럽고 분열적이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근대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위정척사파는 서구 문물은 물론 일본식 개혁마저도 이단으로 간주하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 독립협회(1896)를 중심으로 시민 참여형 개혁이 시도되기도 했지만,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가 일본과 전혀 다른 양상을 가지게 된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조선만의 독특한 Rice Christian

 

201707270001_23110923789862_1.jpg

1891년, 평양 한 장터에서 전도하는 사무엘 마펫 선교사

출처 - (링크)

 

아시아 국가 중 기독교의 영향을 늦게 받은 곳 중 하나가 조선이다. 지정학적인 이유가 컸다. 중국과 일본의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반도였고 서양은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여길 만큼 입지가 작았다. 때문에 천주교 뿐만 아니라 개신교 선교 역시 매우 늦게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현재 많은 아시아 국가 중 대한민국은 아주 깊게 기독교 뿌리가 내려졌으니 이 역시 신기할 따름이다. 일부 개신교인들이 신께서 택한 민족이라 여기는 이유도 이에 기반한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활동할 무렵 조선은 매우 가난했다. 관료들은 세금 걷어 호의호식 잘 살았다지만 농민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조선 후기는 봉건적 농업사회에서 점차 시장경제로 전환되는 과도기였고,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었다는 얘기가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등 조선왕조 실록류에 기록되어 있어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던게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정약용, 박지원 등의 실학자들이 남긴 문헌들을 살펴보면, 조선 후기 부의 지역 불균형이 심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지 운영에 대한 지주-소작제가 강화되면서 소작농이 증가했고 부채 문제가 심화됐다. 게다가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 문란으로 농민들의 부담은 더 커졌다. 결국 심각한 내부 부패는 국가재정 악화로 이어졌고 이를 민간에 떠 넘기는 행태가 지속됐다. 동국문헌비고와 같은 지방관 보고문서만 봐도 지방의 많은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빈곤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관료와 일부 상인 계층은 번성했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민중의 삶은 점차 궁핍해졌다. 각종 민란과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화면 캡처 2025-07-25 145421.jpg

주일 예배에 참석한 어느 조선인 신자는 교회에 나온 대가로 10달러를 요구하기도 했다

출처 - (링크)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만의 독특한 Rice Christian이 등장한다. 중국와 일본을 비롯, 천주교와 개신교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도 Rice Christian은 존재했다. 늘 그렇듯 어디든 이득이 된다고 하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나라의 Rice Christian 들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조선의 Rice Christian은 단순한 경제적 수혜자가 아닌 혼란의 시대에 기독교를 통로 삼아 새로운 기회를 전략적으로 추구한 존재들이었다. 경제적 이득을 넘어 사회적 신분상승을 취하고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원대한 야망을 품었다. 이는 다른 아시아 국가와 구별되는 조선만의 독특한 Rice christian이었다.

 

중국, 일본, 인도 그리고 필리핀까지. 당시 뚜렷한 신분제도가 존재했던 국가에서 무계층의 기독교는 매혹적여 보였다. 하층민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은, 계급으로 인한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날 기회였고, 선진화된 교육제도와 의료 기술은 이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었다. 신앙보다는 실익 위주의 개종을 선택한 Rice Christian이지만, 조선의 Rice Christians은 뭔가 또 다른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한국전쟁 이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 꾸물

기사 : BRY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