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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왜 이렇게 엡스타인 파일에 집착할까
제프리 엡스타인이라는 월스트리트 억만장자가 있었다. 돈은 많지만, 방탕했던 그는 2005년 미성년자 의제강간 및 성 학대 혐의로 체포되지만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난다. 그리고 2019년 똑같은 혐의로 두 번째 체포되자, 재판을 앞두고 감옥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뉴욕 경찰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엡스타인이 감옥에서 목매 자살했다.”
후속 조치로 10여 년 전 엡스타인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연방 검사였던 현직 상무부(노동부) 장관, 그리고 경찰관들의 ‘모가지’가 달아났다.
제프리 엡스타인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뉴욕 검찰
출처-<게티이미지>
여기까지가 미국 법원 및 FBI 검찰의 ‘공식 수사 결과’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을 할 독자도 계실 것이다.
“엡스타인이 성범죄를 저지르고 죽어버린 건 알겠다. 그런데 미국 부자들이 돈지랄하고 방탕한 생활 하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잖아. 왜 미국인들이 ‘엡스타인’에 그렇게 집착하나? 왜 이 사건이 미국 대통령을 흔들 정도로 커다란 사건이 된 거냐?”
이 말도 맞다. 엡스타인이 죽기 10년 전의 미국이었다면, 성범죄자 본인이 죽어버리고, 검찰과 경찰 책임자 몇 명 목이 달아난 것으로 사건이 대충 마무리됐을 것이다.
그러나 엡스타인이 죽었던 2019년 미국 사회는 엡스타인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던 2005년과는 달랐다. 엡스타인 사건이 다른 성범죄와 달리 ‘폭탄’이 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미투’ 운동과 언론의 집중 보도
몇 년 전만 해도 성범죄자가 체포돼도, 성범죄 피해자는 침묵을 지켰다.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얼굴과 이름을 가렸다.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일도 없었다. 몇몇 피해자가 용기 있게 나서도, 법원과 언론에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 취급받고 망신당하기 일쑤였다. 2005년 엡스타인이 ‘솜방망이’ 처벌만 받고 풀려나 다시 사교계에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다.
법 따위로 날 막는다고?
훗~ 우습다 우스워~
출처-<폭스뉴스>
그러나 2019년은 달랐다. ‘미투’ 운동이 터지며 성범죄 피해자들이 자기 이름을 떳떳이 밝히고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시위대
출처-<게티이미지>
2019년 엡스타인이 체포되자, 피해 여성 몇몇이 용기 있게 이름과 신분을 밝히고 범죄 고발에 나섰다.
미쉘 리카타(좌)와 코트니 와일드(우)
출처-<게티이미지>
'미쉘 리카타'와 '코트니 와일드'는 10대 시절인 2005년, 엡스타인의 플로리다 저택에서 벌어진 성폭력과 연방검찰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데 따른 충격을 증언했다.
엘리자베스 스타인(좌)과 사라 랜섬(우)
출처-<게티이미지>
'엘리자베스 스타인'과 '사라 랜섬'은 엡스타인 소유의 섬에 있는 저택에서 마사지사로 고용되었으나, 엡스타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성폭력 피해자 애니 파머(좌)와
시그리드 맥칼리 변호사(우)
출처-<게티이미지>
애니 파머는 본인과 동생이 엡스타인의 파티에 초대받았다가 피해자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출처-<AFP>
뉴욕 슈퍼 리치들과 미모 여성들의 스캔들. 이처럼 ‘클릭수’가 보장되는 뉴스거리도 없었다. 모든 언론이 ‘엡스타인 사건’ 보도 경쟁에 뛰어들었다. 게다가 엡스타인이 재판을 앞두고 죽어버리자, 언론은 물론이고 유튜버 등 인플루언서까지 달라붙었다.
“엡스타인이 죽어버렸으니 명예훼손 소송 걸릴 걱정이 없네? 뜬소문이고 루머고 뭐고 무조건 써 제껴라! 조회수가 최고다!”
이런 가운데, 엡스타인 피해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버지니아 주프레’가 있었다.
10대 시절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는
버지니아 주프레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인 버지니아 주프레는 원래 도널드 트럼프의 마라라고 저택에서 일하던 마사지사였다. 그러다 플로리다 팜비치의 엡스타인 초호화 저택으로 스카우트되어 ‘그루밍’ 당했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엡스타인의 저택과 섬을 비행기로 오가면서 그가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성노예’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플로리다 팜비치에 위치한
엡스타인의 초호화 저택.
주프레는 이곳에서
3년간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다.
출처-<게티이미지>
주프레는 2005년 엡스타인의 첫 재판 당시에도 익명으로 피해자 신고를 했다. 그러나 주프레의 신고에도 불구하고, 엡스타인은 1년 6개월이라는 ‘솜방망이 처벌’만 받고 출소했다.
실망한 주프레는 엡스타인을 고발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했다. 지역 언론 ‘마이애미 헤럴드’에 제보도 해봤고, 2014년에는 ‘솜방망이 처벌’을 한 검찰과 FBI를 상대로 인권침해 소송도 걸었다. 그러나 법원 명령에 의해, 소송 내용은 5년 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민감한 사생활 내용이 들어 있어 공개하면 안 된다.”
그러나 2019년 엡스타인의 죽음으로 인해 ‘사생활 침해’의 우려는 없어졌고, 주프레가 법정에 제출한 사진과 증거가 마침내 일반에 공개된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출처-<게티이미지>
영국 왕실의 요크 공작 앤드류 왕자였다.
두 번째, 영국 왕족이 엮인 스캔들
주프레는 법원에 제출한 고소장에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7살 때인 2001년, 엡스타인과 그의 여자친구 길레인 맥스웰의 소개로 앤드류 왕자를 만났다. 그날 밤 맥스웰이 나에게 지시했다.
‘엡스타인에게 해주던 대로 (앤드류 왕자에게) 해줘라’
그 다음날 밤 맥스웰이 1만 5,000달러를 줬다.”
영국 왕실 앤드류 왕자와 버지니아 주프레.
오른쪽 여성은 엡스타인의 여자친구
길레인 맥스웰
출처-<미국 법원>
앤드류 왕자가 누구인가?
출처-<AFP>
앤드류 왕자(맨 오른쪽)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이며, 국왕 찰스 3세의 동생이다. 사건 당시 영국 왕위 계승 서열 5위였다.
영국 왕실이 발칵 뒤집혔다. 용납할 수 없는 스캔들이었다.
“영국 왕위 계승 서열 5위가 유대계 재벌의 난잡한 파티에 참석해 미성년자 성매매를 했다구?!!”
엡스타인의 죽음 3개월 후인 2019년 11월, 앤드류 왕자는 BBC와 인터뷰를 갖는다. 엡스타인 사태를 직접 해명하러 나선 것이다. 그러나 앤드류 왕자의 인터뷰는 오히려 ‘폭탄’이 되고 만다.
출처-<BBC>
Q. 엡스타인을 만난 것을 후회하나?
“엡스타인을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났고 좋은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Q. 주프레랑 어떤 관계인가?
“주프레를 만난 기억이 없다.”
Q. (기자가 기막혀 하며) 그럼 주프레랑 같이 찍힌 사진은 뭐냐?
“주프레랑 왜 같이 사진을 찍혔는지 기억이 없다.”
Q. 그럼 사진이 가짜냐?
“그 사진이 조작인지 조사해 봤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앤드류 왕자의 BBC 인터뷰가 방송되자 미국과 영국이 모두 발칵 뒤집혔다.
“영국 왕위 계승 5위가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기억이 없다’고? 게다가 엡스타인을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왕족 직위를 박탈하라! 아니, 아예 왕정을 폐지해라!”
앤드류 왕자의 BBC 인터뷰는 해명은커녕 의혹에 기름을 부었다. 앤드류 왕자는 몇 년간의 소송 끝에 주프레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주고 소송을 마무리한다.
민사 소송은 간신히 마무리했고, 형사 기소는 당하지 않았지만, 앤드류 왕자와 왕실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같은 해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앤드류 왕자에게 선언한다.
“넌 앞으로 공직에 나오지 마라. 군 계급도 박탈한다. 왕실 지원금도 끊어버리겠다.”
“앤드류 왕자는 영국의 치욕”이라고 적힌
런던의 거리 낙서
출처-<게티이미지>
앤드류 왕자의 몰락을 보면서, 미국민들은 이제 확신을 가지게 됐다.
“영국 왕자도 엡스타인이 제공한 여성과 ‘성 상납’을 받았다면? 다른 정치인, 유명 인사는 없었을까? 부자들, 초 엘리트들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음모를 벌이고 있는가?”
그리고 ‘엡스타인 파일’이라는 음모론이 태어나게 된다.
‘유대계 배후 자본설’과 ‘엡스타인 파일 음모론’
유럽과 미국 기독교계에는 유명한 ‘음모론’이 있다.
유대계 배후 자본설, 프리메이슨, 그림자 정부, 로스차일드, 일루미나티, 군산복합체 등등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한데, 대충 이러하다.
“선거로 뽑히는 대통령과 정치인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세계 정치와 경제는 소수 유대계 자본과 엘리트들이 지배한다. 이들은 자본과 권력을 휘둘러 신흥국에 경제위기와 전쟁을 일으킨다. 그 결과 서민과 신흥국들만 고통받고 엘리트 카르텔들이 배만 불린다.”
“유대계 부자들이 정숙하고 가난한 백인 소녀와 처녀들을 데려다가 ‘피의 잔치’를 벌인다.”

유대계 거대 자본이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죽인다는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선전 포스터
출처-<게티이미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지만, 이런 류의 ‘반유대주의, 반엘리트 음모론’은 보수 기독교계 사이에 의외로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음모론은 백인들끼리 재미로 이야기하는 수준이었고, 진지하게 논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2008년 전까진 말이다.
왜, 2008년이 기점이었을까.
출처-<게티이미지>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가 터졌다. 2008년 경제 위기는 미국 서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은행에 돈이 넘쳐난다면서 제발 돈 좀 가져가 달라길래, 대출받아서 우리 가족 집을 샀다. 그러더니 은행이 갑자기 급하다고 돈을 다 갚든지, 집을 내놓든지 하라고 하네? 초 엘리트들과 금융 자본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거냐?”
2008년 콜로라도주에서
은행 대출을 못 갚아
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들
출처-<게티이미지>
집을 빼앗긴 서민들은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거대 자본과 엘리트를 몰아내자고 일어선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
출처-<NBC>
이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구세주’가 있었다.
출처-<Flickr>
“저를 뽑아주시면 저 월스트리트 ‘돼지’들을 싹 몰아내겠습니다.”
2008년 오바마는 “월스트리트, 거대 은행을 개혁하겠다”고 외쳤는데, 2016년 트럼프와 별다를 것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미국민들은 ‘정치신인’ 오바마에게 압도적 표를 몰아줘 대통령으로 뽑아준다.
“워싱턴DC와 월스트리트 엘리트에 지쳤다. 새롭고 깨끗한 정치신인이 월가를 ‘싹쓸이’ 해달라.”
그러나 오바마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안면을 싹 바꾼다. “구제금융”을 핑계로, 부실 은행에 국민 세금을 펑펑 퍼주고, 집을 빼앗기고 길바닥에 나앉은 서민들은 외면했다. 월스트리트 개혁과 거대 자본 엘리트들의 처벌을 원하던 서민들은 외쳤다.
출처-<게티이미지>
“오바마도 똑같은 놈이었다. 민주당, 공화당끼리 정권은 바뀌어도, 정치권을 조종하는 소수 엘리트 자본가들은 그대로다. 그 배후에는 유대인이 있다.”
10년 동안 월스트리트 출신 소수 엘리트에 대한 분노를 쌓아온 미국인들 앞에 2019년 갑자기 ‘엡스타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엡스타인 사건은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음모론’에 100% 일치하는 사건이었다.
호화 파티에서 미모의 여성들을 거느린 엡스타인
출처-<게티이미지>
유태계인가?
예스
월스트리트 출신인가?
예스
은행, 헤지펀드 출신인가?
예스
이스라엘과 관계있는가?
예스
미국 정치권과 친한가?
예스
미국 엘리트와 친한가?
예스
영국 엘리트와 친한가?
예스
군산복합체와 친한가?
예스
미모의 여성과 파티하는가?
예스
미성년자를 성폭행하는가?
예스
엡스타인은 그야말로 미국인들이 증오하던 “탐욕스럽고 여자를 밝히며, 세계 경제를 조종하는 소수의 월스트리트 엘리트 자본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엡스타인과 앤드류 왕자가 전부가 아니다. 엡스타인이 성 상납한 엘리트 고객들의 명단 ‘엡스타인 파일’이 어딘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법원과 FBI에 봉인된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하라. 그래서 엡스타인과 놀고먹은 정치인, 월스트리트, 엘리트들을 싸그리 감옥으로 보내자!”
한마디로 ‘엡스타인 파일’은 그렇고 그런 음모론이 아니다. 워싱턴DC와 월스트리트 소수 엘리트들에 대한 미국 서민들의 불만에 대한 ‘대폭발’인 것이다. 미국민들이 ‘엡스타인 파일’에 집착하고 열광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미국 서민들 앞에 배신자 오바마와 앙숙 관계인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났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취임 첫날부터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하고, 관련자들을 싸그리 감옥으로 보내겠다!”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이었다.
<계속>
추신.
본 기사와 연결하여 아래 연재를 추천한다.
죽고 못사는 '절친' 사이였던 트럼프와 머스크가 왜 지금은 '철천지원수'가 된 것인지 깔끔하고 흥미롭게 정리한 기사다.
왜 머스크는 '엡스타인 사건'을 다시 들고 나오며 트럼프를 공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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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머스크, 왜 절친에서 원수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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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임권산
마빡 : 꾸물
기사 : 고물상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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