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케이팝씬에서 가장 핫 한 뉴스는 하이브 방시혁 의장의 ‘사기적 부정거래’로 인한 금융 당국의 검찰 고발 사건이다. BTS를 제작하고 하이브를 세계적인 엔터 회사로 성장시켜 케이팝을 세계 음악시장 중심에 올려 놓은 인물인 만큼 결과에 따른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도 민희진, 뉴진스 사태가 진행 중인 만큼 한 개인의 편법과 일탈에 그치지 않고 케이팝 산업 내 권력 구조와 어두운 면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외신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 사건은 하이브가 초기 투자자들을 속여 지분을 팔게 유도하고 그 지분을 사들인 사모펀드와 방 의장이 코스피 상장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언론과 SNS 등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연일 방시혁 의장이 큰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예상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이 지적하는 방시혁의 ‘사기적 부정거래’ 주요 쟁점을 4가지로 요약하면
1. 비상장 회사였던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초기 투자자들에게 상장 계획이 없다는 뜻을 내비치며 지분을 팔게 유도했고 그 지분을 사들인 사모펀드들은 방시혁 의장의 지인들로 구성이 됐다는 점.
2. 상장과정에서 사모펀드와 방 의장 간의 주주간 계약을 알리지 않았고 상장이 성공하면서 방 의장은 사모펀드 이익의 30%에 해당하는 약 4000억원의 수익을 얻었다는 점.
3. 지분을 판 초기투자 펀드 중에는 국민연금도 있었다는 점.
4. 상장 후 사모펀드가 13일간 물량을 던지면서 주가는 최고점 대비 약 1/3 토막이 나는 바람에 상장 후 몰린 개미투자자들이 피해를 봤다는 점이다. (2010년 10월 15일 상장일 최고가 34만 7,490원 / 11월 2일 최저가 13만 9,590원)

(하이브 상장 관련 부정거래 구조. 출처: 금융위원회)
전문가들은 그가 법망을 교묘히 피해 이득을 보았고 도덕적인 비난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설명을 하면서도 법적으로는 아직 확실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고 전망한다.
일반적으로 비상장 회사의 ‘사기적 부정거래’ 사례는 없는 사실을 부풀려 투자를 하게 만들어 투자 유도세력이 물량을 떠넘기고 빠져 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 사건은 오히려 투자자에게 제 값을 주고 물량을 받은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 값의 기준을 거래 당시 기준으로 한정 한다면 말이다.)
피해자로 지목되는 초기 투자자들의 IPO 성공 시 예상되는 잠정적 수익은 직접적인 손해가 아닐 뿐더러 뒤통수를 맞았다는 배신감이 피해 사례가 될 수 있는지도 애매하다.
방 의장과 사모펀드 간 이익의 30%를 받는 계약이 있었지만 기한 내 상장을 못하면 이들의 지분을 원금과 일정 이자를 얹어서 되사는 계약도 있었다는 것, IPO 과정에서 해당 주주 간 계약을 증권 신고서에 미기재 한 것이 위법으로 적용되는지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하이브의 주가는 거래 13일 만에 최저가를 기록했지만 상장 당시 공모가 13만 5,000원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고 약 1년이 지난 2021년 11월 17일에 42만 1,500원 전고점을 기록했다.

(하이브의 월봉 차트)
방시혁 의장은 이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국내 최고의 로펌과 IPO 전문가들이 충분한 법률적 검토를 했고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했을 테니까. 게다가 상장 직후 하락하는 종목은 비단 하이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때 주식시장의 청약, 따상 열풍을 가져 온 ‘카카오게임즈, 카카오페이, SK바이오사이언스’ 같은 대기업 자회사들도 똑같은 패턴의 하락을 겪었고 심지어 아직도 회복을 못한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카오게임즈 左, SK바이오사이언스 右 월봉차트)
물론,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잘못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자본으로 법망을 피해 이익을 본 행위와 이로 인해 법의 사각지대를 노린 편법으로 동일 사례가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자본 시장의 안정과 신뢰성을 위해서라도 좌시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럼 과연 방시혁 의장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후회를 할까? 억울해 할까?
방시혁 의장은 오히려 분노할 것이다. 아마도 과거 그가 그토록 분노했던 부조리한 꼰대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는 2019년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오늘의 본인을 만든 에너지의 근원은 분노’라고 정의했고 음악 산업이 안고 있는 악습들, 불공정 거래관행, 그리고 사회적 저평가, 적당히 일하는 무사안일 태도, 최고의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명의식, 산업이 처한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출처 - 서울대학교총동창회 (링크)
그도 그럴것이 방시혁은 오랫동안 가요계에 몸 담은 히트 작곡가였지만 제작자로서는 0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가 남자 아이돌을 만든다 했을 때 사람들은 조롱했고 미국 진출을 이야기 했을 땐 비웃음을 샀다.
한국 가요계엔 중소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10년 간 히트 가수 하나 만들지 못하며 중소로도 불리지 못하는 회사였다.. 방시혁은 그 기적을 넘어서 누구도 해내지 못한 빌보드 1위 가수 BTS를 제작한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BTS의 성공은 K-POP의 판이 커지고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이브는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기업에 오르며 표지를 장식했고 한국 언론은 이들의 성공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 중소의 기적은 지금 사기의 기적이 되어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게 되었다.

출처 - 타임지 X (링크)
엔터사업은 회사의 매출이 높아질수록 팬들에게 욕을 먹는 특이한 감성을 갖고 있다. 삼성, 엘지, 현대 같은 일반적인 대기업이 매출 신기록을 달성하면 국위선양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엔터사업은 자기 가수 착취해서 제작자의 배만 채운다는 이미지가 일반적이다.
방시혁 역시 오랫동안 가요계의 언더독으로 있으면서 편견과 조롱을 이겨내고 성공했지만 존경보다는 일거수일투족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싱글 남녀의 만남이 왜 비난 받아야 하는가? 출처: 유튜브 캡쳐)
제작자의 이런 부정적 이미지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일까?
케이팝의 전세계적인 인기 원인과 주목받고 있는 시스템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현재 K-POP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음악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기간은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BTS, 블랙핑크, 세븐틴, 스트레이키즈 등의 K-POP 아이돌이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월드 투어를 하면서 한 해 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모습은 90년대부터 가요를 소비하던 나로서는 생경하면서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지금 전성기를 맞이한 한국 대중음악의 성공은 결코 우연으로 만들어진 행운 같은 것은 아닐 터, 수 많은 도전과 시행착오, 그 과정엔 피나는 노력과 희생, 감추고 싶은 어두운 이면까지 모든 요소들의 복잡계수가 작용했다.
지금은 3대 기획사 혹은 4대 기획사로 불리는 체계적인 시스템과 관리,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철저한 비즈니스 문법을 통한 산업으로 생태계가 구성됐지만 8, 90년대만 하더라도 다소 비전문적(?)이고 주먹구구식의 운영과 관리가 난무하던 흡사 춘추 전국시대로 볼 수 있다.
당시엔 3, 4년간 가수를 하기 위해 노래, 춤 연습에 올인하며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노래 실력, 뛰어난 외모, 학창 시절 밴드 생활을 통한 가요제 입상, 그를 통한 지인의 소개 등이 스타의 등용문이자 데뷔의 발판이 되었다.
제작자나 매니저의 경우도 크게 다를 것 없이 체계적 관리, 전략적 프로모션과 분석보다는 감, 인맥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다. 100%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당시 인기스타들의 길지 못했던 전성기나 위기관리, 데뷔 과정의 일화, 투명하지 못한 정산으로 인한 불화 등으로 비추어 봤을 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은 선발, 트레이닝, 제작, 프로듀서, 매니지먼트 등 가수의 A to Z를 모두 기획사에서 전담 관리하지만 8, 90년대 중반까지는 제작자, 프로듀서, 매니저가 따로 활동하거나 한 가수를 위해 일시적으로 팀을 이루는 임시적 관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불분명한 소속관계는 중간에서 누군가 농간을 부리면 그 수익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1980년대엔 지금과 다르게 지구레코드, 오아시스, 킹레코드, 아세아, 서울음반 등 크고 작은 음반제작 및 유통사가 전속 계약을 통해 매니지먼트까지 담당하는 방식이었고 지금과 같은 SM, JYP, YG, 하이브 같은 기획사 개념의 PD메이커 형태가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등장한 기획사가 신촌뮤직, 동아기획이다. 이 두 회사는 야전에서 활동하던 뮤지션들을 발굴해 자체 제작하는, 전에 없던 언더그라운드형 레이블로 한국 가요계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신촌뮤직의 설립자는 ‘장고웅과 천지 개벽’이라는 활동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코미디언과 연기자, 동시에 8, 90년대 한국 어린이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누린 개그맨 심형래의 매니저까지 하게 된 장고웅 대표다.
그 시절 영화배우, 가수, 스포츠 선수 통틀어서 4년간 세금을 가장 많이 낸 연예인인 심형래 매니저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발굴이나 제작자로서의 감이 있었다고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똑순이는 과연 얼마 정산 받았을까?)
1981년 신촌 뮤직 설립 전, 아역스타로 큰 인기를 끌던 '똑순이' 김민희를 앞세워 똑순이 캐럴 모음집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엄청난 대박을 터트렸다고 한다. 후에 1984년, 심형래의 또 다른 자아 '영구'의 캐럴 음반이 나온 것을 보면 그 시절 캐럴음반이 장고웅 대표의 노다지 사업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영구의 ‘달릴까 말까’ 하는 심형래 코믹 캐럴 역시 초대박을 터트린 기획이었다.
이때 벌어들인 수익을 바탕으로 신촌뮤직을 섭립했다고 하는데 8, 90년대 언더 그라운드 음악의 메카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션과 스타들을 배출한다.

(이승철 1집 左, 박효신 1집 右)
권인하, 박광현, 최용준, 신재홍, 이적, 양파 등 끊임없이 실력파 뮤지션들을 발굴해 냈고, 후에 권인하는 1997년부터 신촌뮤직의 대표이사를 맡아 박화요비, 박효신까지 데뷔시켜 2000년대까지 그 명성을 유지한다. 자체 제작 뿐만 아니라 부활 탈퇴 후 이승철의 솔로 음반 제작과 유통 대행을 통해 지금의 PD메이커 방식과 같은 기획사 형태의 일도 한 것을 보면 오버와 언더를 넘나드는 유연한 마인드의 회사였던 듯 싶다.
그렇지만 10대 중심으로 가요계가 급변하고 음반산업의 불황에 더 이상 히트가수를 배출하지 못하며 하향세에 접어들었고 장고웅 대표의 근황만 검색해도 왕왕 나오는 도박 관련된 기사로 보아 오너 리스크도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아기획을 설립한 김영 대표는 광화문에서 음반 매장을 기반으로 조동진, 김현식, 들국화, 시인과 촌장, 한영애, 봄여름가을겨울, 이소라, 푸른하늘, 김현철 등의 뮤지션을 배출한 제작자이다.

(출처: SBS 아카이브 K 캡쳐)
대중과의 유일한 매개체였던 지상파 방송 출연에 기대기보다는 아티스트의 창작 활동에 철저히 자율성을 보장하며 공연과 음악성을 뚝심 있게 밀어 붙이는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동아기획 가수들이 TV음악 프로에 나와서 공연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었고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공연과 음반이었다.
당시 방송에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소위 말하는 전국구 스타가 되는 시작이었는데, 음악 외적으로 하지 말라는 일도, 출연을 결정하는 관계자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일 등이 빈번했다고 한다. 음악적 자존심이 한창 불타올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의 음악인들에게 오로지 음악만 신경 써라 하는 사장님의 확고한 철학(?)과 때론 과감한 투자가 동아기획을 언더그라운드의 메카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 예로 대학생이던 김현철의 재능을 알아보고 보자마자 골프 가방에 돈을 현찰로 담아서 가져가라는 얘기부터 꺼냈다고 한다. 외국 유학을 준비하던 김현철이 이를 거부하자 다시 만난 자리에서 미리 골프 가방에 현금 3,000만 원을 준비해 뒀고 김현철은 바로 계약하게 됐다는 일화를 방송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치동 은마 아파트가 8,750만 원이었다는 걸 보면 3,000만 원이라는 금액에 감동했는지 김영 사장의 적극적인 프러포즈에 감동(?) 했는지, 어떤 경우든 매력적인 상황임에는 틀림 없다.
동아기획의 음악이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는 이렇게 시대의 유행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음악을 적극 지원하되 깊이와 진정성은 놓지 않는 과감한 행보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슬로우 스타터, 대기만성형 가수들이 많았고 한국 가요사에 남을 명반도 꽤 많이 제작해 한때 음악 좀 듣는 사람들은 동아기획 음반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팬들을 보유한 레이블로 자리 잡았다.
특히 발라드, 포크, 블루스, 요즘엔 시티팝으로도 불리는 퓨전재즈 계열의 뮤지션들이 대거 소속되어 있으니 이 장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당시 동아기획에서 나온 음반을 관심 있게 찾아 보길 바란다.
신촌뮤직에 비해 장인정신(?)에 가까운 동아기획의 기조는 90년대 새로운 시류에 편승하지 못하고 이소라를 끝으로 하향세에 접어들게 된다.
언더 그라운드를 기반으로 아티스트 주도형 음악을 지원하던 두 기획사가 두각을 나타내던 와중에 지금의 아이돌 양성 시스템을 차용한 제작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한국 가요계 원조 섹시 아이돌이 아닐까?)
한국 가요계 아이돌 시스템을 이야기 한다면 김완선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다.
1986년 데뷔해 ‘한국의 마돈나’로 불리며 첫 번째 은퇴를 선언하던 1992년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린 당대 최고의 댄스 가수였다. 이런 그녀의 인기 원동력은 대중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눈빛과 빼어난 외모, 뛰어난 춤 실력도 있었지만 철저히 계산된 제작자의 기획과 트레이닝을 통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완선의 제작자는 그녀의 이모로 알려진 한백희 씨다. 한백희 씨 본인도 원래는 가수 생활을 했던 경력이 있다고 한다. 그녀의 커리어를 확인 할 수 없지만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시 유명한 미 8군 가수 출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수로 활동한 것보단 한국 여성 최초로 가수 매니저, 매니지먼트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희자매 左, 인순이와 리듬터치 右 가장 좌측이 김완선이다. 출처: 유튜브 캡쳐)
그 시작은 본인의 무대에서 백댄서로 활동하던 인순이의 노래 실력을 알아보고 자기 대신 무대에 올리면서 프로듀서 겸 매니저로 활동을 전환한 것으로 알려진다. 1978년 3인조 걸그룹 ‘희자매’로 정식 데뷔를 시키고 첫 앨범 타이틀곡 '실버들'로 1위를 하는 등 인순이와 한백희 모두 성공의 커리어를 쌓게 된다.
하지만 그룹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1981년부터 솔로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1983년 '밤이면 밤마다'가 히트하면서 또다시 성공한 제작자로 이름을 각인 시킨다. 이때 '인순이와 리듬터치'라는 전용 백댄서팀을 운용하게 되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 김완선' 등이 멤버로 활동했다.
훗날 이 팀이 김완선 데뷔전 춤 연습과 무대경험 쌓게 하는 일종의 트레이닝 시스템이라 보고 있다.

(한백희가 운영하던 연습실 / 출처 - 김완선 나무위키)
그녀는 스파르타식으로 김완선에게 춤과 화성학부터 오케스트라 편곡까지 다루는 작곡 수업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중학생이던 김완선은 학업을 중단하고 데뷔 준비를 하느라 거의 3년 동안 부모님 집에도 보내질 않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요즘 아이돌 양성 시스템과 가장 유사한 데뷔 준비를 한 최초의 가수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데뷔 전에 스트릿 댄스, 발레, 현대 무용 등 다양한 춤들을 혹독하게 트레이닝했기 때문에 독보적인 퍼포먼스와 화려한 무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1986년 '오늘밤'으로 데뷔한 김완선의 나이는 만 16세. 누가 봐도 아이돌이다.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한동안은 20살로 속이고 활동했다고 한다.
확실히 김완선의 데뷔는 충격적이었다. 전에 한국에서 볼 수 없던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신인답지 않은 무대 위 카리스마. 그녀는 단숨에 인기 스타가 되었다. 희자매, 인순이, 김완선을 성공시킨 한백희의 안목은 더 빛이 났다.
가수를 발굴해서 준비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총괄 프로듀서로서 무대 콘셉트, 안무, 의상, 작곡가를 섭외하고 곡을 셀렉하는 모든 일을 맡았다. 그러면서 소속가수를 철저히 격리(?)에 가까운 관리는 덤이었다. 심지어 작곡가도 (윤상, 손무현) 감금 시켰다는 썰도 있다.

(산울림 김창훈이 프로듀싱한 1집 左, 신중현이 참여한 2집 右)
흥미로운 점은 김완선의 디스코그라피에 전혀 댄스와 거리가 멀 것 같은 신중현, 산울림의 김창훈, 이장희, 하광훈, 윤상, 손무현 등의 거장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타 장르에 비해 음악성에서는 조금 점수가 야박한 댄스 음악임에도 김완선의 앨범에 명곡이 많은 건 프로듀서 한백희의 안목과 기획력이라 해석된다.

(진짜 돌풍이 일어날 것 같다)
김완선의 활동은 한국에만 머물지 않았다. 1987년 일본 진출을 시도했고 1993년부터 1994년까지 홍콩과 대만에서도 활동하며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가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백희의 이런 뛰어난 안목과 기획력은 김완선을 마지막으로 끝을 맽는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김완선을 1992년 돌연 은퇴시키는 희대의 병크를 터트리는데 심지어 1998년 김완선과 결별하기까지 13년 동안 가수 활동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한 번도 정식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산하지 않은 돈은 남편의 사업자금으로 날리고 김완선 이름으로 빚까지 있었다고 하니 기획력과 사업적 양심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닌듯하다.
짧고 굵었던 한백희의 이런 앞선 시도는 가요계 여러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한국 1세대 아이돌 시대를 개막하게 되고 한 사람은 가요계의 빌런으로 탄생한다.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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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Jay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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