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요계의 ‘빌런’이라는 표현이 다소 과한 것 같지만 김광수 대표는 이 수식어를 빼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인물이다. 근 40년간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체감하고 조금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면 얼추 동의하는 사람도 많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악마의 재능, 혹사와 착취의 아이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한국 가요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제작자라고 생각하는데 그 오랜 세월 엔터 업계에 종사하며 수많은 히트 가수들을 제작, 발굴했지만 단 한 번도 3대 기획사에 거론되지 않고, 언제나 소속가수와 끝이 좋지 않았으며, 잊혀져 갈 때쯤 메가히트를 빵빵 터트리는 지금까지 업계에서 활동하는 불사의 제작자.
그러면서 기가 막히게 재능러들을 끊임없이 소개받는 인복까지 있던 김광수 대표는 한백희의 직계 제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마치 자기 고백을 하는 듯 하다. 출처: MBN ‘가보자GO’ 캡쳐)
젊은 시절 가수가 되고 싶어 소방차 멤버들이 활동했던 '짝꿍'에 들어가기도 했고 군대 전역 후 '주사위'라는 팀을 만들어 계속 이쪽 업계를 떠돌아 다닌 것을 보면 연예계 진출에 대한 갈망이 컸던 모양이다.
별 수확 없이 연예계 낭인으로 지낼 때 한백희를 만나 매니저 제안을 받고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 때부터 매니저 업계에 뛰어들기 시작해, 1985년까지 한백희의 밑에서 로드매니저부터 시작을 했다고 한다. 방송국을 찾아가 가수 PR, 스케쥴 이동, 경호원 역할까지 하며 그녀의 모든 일 처리 방식을 흡수했다.
1986년부터 김완선의 크고 작은 일들을 맡아 움직이며 스스로 독립 준비를 하다가 1988년 GM기획이라는 본인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인기 가수의 매니저로 나름 방송국에 얼굴도장을 찍으며 매니저로서 입지를 조금씩 다져가는 와중에 하이틴 배우로 활동하던 김희애의 큰 스케줄이나 CF관련 일을 봐줬다고 한다.

(출처: MBN ‘가보자GO’ 캡쳐)
김종찬
당시 자신의 이름을 딴 라디오 '김희애의 FM인기가요'를 진행하던 그녀가 노래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 있다며 김광수 대표에게 추천해 준 사람은 바로 김종찬이었다. 1986년, 1집 앨범 <내 사람아>라는 곡으로 활동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무명에 가까웠던 김종찬을 만나 계약하고 발표한 노래가 '사랑이 저만치 가네' 다.

(김종찬 2집 左, 누가 봐도 앙선생님의 의상 右)
1987년 발매되었던 김종찬의 2집 앨범은 타이틀곡 뿐만 아니라 '토요일은 밤이 좋아, 당신도 울고 있네요'까지 1위를 하는 초대박을 치며 단숨에 인기 가수로 올라선다. 당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무대의상을 만들어 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자연스레 김광수 대표도 성공한 제작자로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
김민우
‘될놈될’이라는 말이 있듯이 잘 되려면 뭘 해도 잘 된다고 1989년 김종찬과의 계약만료 시점이 올 때 ‘MBC 송창의 PD’로부터 김민우를 소개받는다. (송창의 PD는 90년대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과 세친구’를 만든 스타PD이다) 긴 머리에 락밴드 보컬을 하던 그를 작곡가 하광훈과 함께 오디션을 봤고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를 맡고 있는 이호준에게 재차 확인을 받은 뒤 앨범 제작에 들어간다.

(데뷔 앨범 골든컵 2개는 김민우, 서태지와 아이들이 유일하다)
그렇게 1990년 김민우 1집 '사랑일뿐야'가 발표가 되고 데뷔 3개월 만에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 골든컵을 수상하게 된다. 그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후속곡 '입영열차 안에서' 역시 골든컵을 타며 한 앨범 2개의 골든컵을 수상하는 기록까지 세운다.
하지만 여기서 희대의 병크를 터트리는데 후속곡 '입영열차 안에서'라는 노래를 띄우기 위해 진짜로 입대를 시키는 한국 가요 역사상 빅 이벤트를 저지르고 만다. 결국 활동을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김민우는 입대를 하게 되고 나중에 가요 프로그램에서 훈련소에 간 아들을 대신해 가족이 대리 수상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요즘은 인기 많은 연예인들이 전성기 때 병역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어 대중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데 오히려 인기 절정일 때 군대를 보내는 것은 칭찬을 받아야 하는 일이라고 봐야 할까? 아무튼 수많은 소녀 팬들의 슬픔을 뒤로한 채 입대를 했지만 소녀들의 걱정과 달리 저녁엔 퇴근 할 수 있는 방위병이었기에 너무 요란 떤 것이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요란 떨던 하하가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인가? 출처: 무한도전)
그렇게 강제 공백을 갖게 된 김민우는 전역 후 2집을 발표하지만 엄청났던 데뷔 임팩트가 무색할 정도로 주목을 받지 못했고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인기스타를 제 손으로 보내 버렸지만 김광수 대표의 천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김민우를 그렇게 허무하게 보냈지만 그로 인해 알게 된 두 명의 작곡가는 그 다음 성공을 안기게 된다.
노영심
김광수 대표는 김민우의 1집으로 서울가요대상 레코드 기획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작곡가 노영심을 만나게 된다. 노영심은 그해 국민적인 히트곡 변진섭의 '희망사항'으로 작곡상을 수상하였다. 처음 가수 데뷔를 제안했을 땐 한사코 거절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92년 1집 '별거 다 기억하는 남자'를 발표하고 큰 히트를 치게 된다.

(남매가 아닌 것에 더 충격을 준 듀엣 左 , 노영심 1집 右)
노영심의 데뷔 앨범 제작을 김광수 대표가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마도 학전에서 오랫동안 공연하고 뮤지션의 색이 강한 노영심과 김광수 대표는 뭔가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내 선입견일 수도 있겠다. 1989년 변진섭의 희망사항을 같이 부르며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노영심의 친근한 이미지와 히트곡을 써내는 능력에 히트성을 직감한 것 같다.
윤상

(지금은 라이즈의 앤톤 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출처: 유퀴즈 캡쳐)
또 한 명의 작곡가는 윤상이다. 손무현과 함께 김완선의 앨범 참여와 백밴드 활동까지 했던 인연이 시작이었다. 김민우의 1집 준비 당시 윤상이 작곡한 '입영열차 안에서' 데모를 듣고 특유의 촉이 발동했던 듯하다. 곡을 쓰고 연주도 하면서 사실상 프로듀서 역할까지 가능한 재능 있는 친구가 귀공자풍 외모까지 갖고 있으니 여간 탐이 났던 게 아닌가 싶다.
밴드 생활을 하면서 대중 가수보다는 스튜디오 뮤지션을 지향했던 윤상은 가수 제안이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김광수 사장은 평소 가지고 싶었던 800만원 상당의 신디사이저 장비를 다 구입하고도 남는 3,000만원이라는 거액을 계약금으로 제시 했다고 한다. 거절하기엔 너무 진심이 느껴지는 금액에 계약을 하고1집 '이별의 그늘'을 발표한다.

(돈으로 안된다면 액수가 부족한지 확인해 봐라...)
1990년 윤상은 아이돌이 된다.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고 우수에 젖은 ‘한국의 존 테일러’가 부르는 이별의 그늘에 소녀 팬들은 열광했다. 그해 신인상, 골든 디스크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과 대중의 관심이 부담스러웠을까? 아니면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의 방향과 지금의 행보에 괴리감을 느낀 뮤지션의 자존심이었을까?
1집 활동 종료 후 이런저런 이견 차이로 회사와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결국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을 합친 2집을 발표하게 되는데 2년에 걸쳐 파트 1, 파트 2로 나뉘는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
회사가 원했던 1집의 행보를 이어가는 파트 1 '가려진 시간 사이로'는 전작을 뛰어넘는 성공을 했지만 정작 윤상이 더욱 세심하게 신경 쓴 파트 2는 절반도 못 미치는 성적을 보이며 실패의 쓴 맛을 보게 된다. (물론 윤상의 2집 앨범은 흥행성과 별개로 명반이다.)

(회사의 쪼임과 예술에 심취한 전혀 다른 결과물)
이후 윤상의 방송 태도문제, 군 문제 등으로 인한 오랜 공백과 인기 하락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한다. 다만, 인기 하락의 과정에서 김광수 대표의 판단 미스와 관리 능력 부족도 있었을 거라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계속 승승장구하던 그가 성공만 바라보며 직진만 하다 분명 놓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비즈니스라는 것은 비전, 인정, 금전적 보상으로 유지가 되는데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다 있다. 각 요건마다 유효기간을 놓쳤거나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관계는 깨지기 십상이다.
가장 현대식에 가까운 아이돌 양성 시스템을 시도한 한백희 씨에게 가수 양성과 관리, 어느 부분을 그대로 적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은 완성형에 가까운 인재들을 발굴해서 히트를 시켰으니까. 하지만 재목을 알아보는 촉과 어떻게 해야 내 가수를 띄울 수 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김광수 대표의 성공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그는 가방 모찌라고 불리는 밑바닥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한 계단씩 올라온 성실하고 끈기 있는 사람이었다. 인맥과 운이라고 치부하기엔 매니저시절 아침부터 방송국에 출근해 하루에 점심을 4번 먹을 정도로 자기 가수 PR에 노력했기 때문에 그런 기회도 생겼을 것이다.
다만 배운 것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가 지금 그 사람의 평판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백희 씨의 유일한 제자였던 김광수 대표의 다음 행보와 만행은 90년대 이야기에서 후술 하도록 하겠다.
한국의 대표적 엔터 회사 SM은 올해 30주년을 맞아 합동 콘서트도 하고 K-POP씬에 그들의 업적과 화려한 IP를 늘어놓으며 많은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따져 보자면 1989년 SM기획부터가 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수만 대표는 7, 80년대 가수, DJ, MC로 활약했고 가수로는 포크, 록 음악을 뿌리로 두고 있었다.

(무려 따봉을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특히 90년대 중반까지 '일요일 일요일 밤에' 같은 주말 예능의 메인 MC를 꽤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내 또래 친구들은 전문 MC로 이수만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아무튼 가수, MC 등으로 방송 활동을 하던 이수만은 1981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MTV를 접하고 ‘바비 브라운, 뉴 키즈 온 더 블록’ 같은 비디오형 가수, 틴에이저 아이돌을 보면서 제작과 프로듀서의 열망을 키운다. 198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다시 일을 하며 자금을 모아 1989년 SM기획을 설립하게 된다.
이때 한백희의 조언에 따라 트레이닝 방식으로 매니지먼트를 시작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녀의 조언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미국의 MTV, 당시 일본의 남자 아이돌 열풍을 몰고 온 쟈니스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미국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처음부터 승승장구했을 것 같은 SM의 시작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도발적이다)
한국에 들어와 사무실과 작업실, 녹음실을 마련하고 MIDI를 다룰 줄 아는 작곡가 홍종화를 만나 SM 첫 작품으로 자신의 10집 New age music 1을 발표한다. 이름처럼 새로운 음악, 새로운 사운드, 새로운 작업방식으로 당시 한국에서 생소했던 컴퓨터로 만든 음악 MIDI를 이용한 테크노를 수록한 앨범이다.
이전까지 포크, 락을 주로 했던 가수가 선택하기엔 파격 변신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신선했는지 이수만 대표의 가수 활동은 이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토끼 춤으로 마이클 잭슨을 빈사상태로 내몰았던 바비 브라운)
당시 미국에선 뉴에디션 출신 ‘바비 브라운’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을 때였다. ‘테디 라일리’의 뉴잭스윙풍 노래에 바비 브라운의 삼각 편대가 무대에서 선보이는 토끼 춤에 미국은 열광했고 1989년 빌보드 연간 1위에 AMA를 휩쓴다.
‘뉴에디션’으로 활동할 땐 마이클 잭슨도 춤 한 수 배우자고 저택에 초대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한 춤 했던 그 바비 브라운의 토끼 춤을 한국에 선보이고자 DJ로 활동하던 최진열을 매니저로 영입해 신인가수 발굴에 나섰고 그에 맞는 뉴잭스윙 음악은 홍종화 작곡가가 구현을 하게 된다. (매니저로 영입된 최진열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콧수염 매니저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후 가요계 주요인물이 되는 최진열, 현진영, 이주노)
얼마 뒤, 최진열은 댄서로 유명했던 현진영과 이주노를 데려와 이수만에게 오디션을 보게 했다. 10대의 나이에 벌써 프로 댄서로 활동하며 비보잉, 펑키, 소울 등 못 추는 춤이 없을 정도로 실력자에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보컬의 포텐셜도 갖고 있던 현진영이 합격하게 된다. (현진영은 이때 오디션 곡으로 진미령의 '아하'를 불렀고 엉망이었다고 기억했다.)
현진영은 합격하자마자 한백희가 김완선에게 했듯이 본격 트레이닝에 들어갔다. 대학에 가서 성악 기초발성부터 화성악까지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고, 이수만이 구상한 미국 느낌을 위해 당시 한국인들은 출입하지 않았던 이태원 문나이트로 보내 미군들과 춤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문나이트에서 데뷔 준비한 최초의 한국인 현진영. 출처: 본인제공)
그와 동시에 잠실에 마련한 SM기획에서 숙식을 시키며 관리했고 심지어 식사 예절까지 가르쳤다고… (잠실에 있던 SM기획 사무실 맨 위층은 이수만 대표의 가정집이었다고 한다.)
솔로 가수지만 바비 브라운의 삼각 편대 같은 댄서팀이 함께하는 그림을 그렸기에 현진영의 옆을 빛내 줄 댄서 멤버도 필요했다. 그래서 클럽에서 난다 긴다 하는 친구들을 수소문했고 댄스 대회를 열어 같이 할 멤버를 선발하기로 한다. 이때 강원래, 구준엽을 선발해 본격 데뷔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1989년 SM의 역사적인 첫 가수 '현진영과 와와'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현진영의 정식 데뷔는 1990년 1집 '슬픈 마네킹'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1989년 홍종화 작곡, 현진영 작사의 '야한 여자'를 싱글로 제작해 프리 데뷔를 한다. 싱글 앨범이라는 것도 생소했고 요즘으로 치면 선공개곡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당시 한국의 댄스 뮤직은 미국의 느낌보다는 가까운 나라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느낌이 강했다.
소위 말해 뽕끼가 충만한 빠른 비트의 곡들이 댄스곡을 대표하고 있었다. (당시 유행한 노래들이 후뢰시맨, 스필반 같은 전대물이나 특촬물 주제곡과 비슷하게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인가?)

(머리가 있는 구준엽이 어색한 左, 2곡만 수록된 싱글앨범 右)
아무튼 현진영의 '야한 여자'는 미국의 그것을 그대로 흡수해 마치 바비 브라운의 ‘Don’t be cruel’ 분위기를 내며 외국인의 랩, 클래식 샘플링까지 들어간 한 발 앞서 간 곡을 선보인다. 거기에 신체능력 최절정의 현진영과 백업 팀이 무려 클론이었다!
이들이 보여 준 무대 위 퍼포먼스는 잘 추는 걸 넘어 신기할 정도라 오히려 처음엔 관객들이 무반응이었다고 현진영은 회고한다. 이후 전국 클럽에 홍보용으로 돌린 싱글판과 노래가 예상보다 빠르게 반응이 왔고 LP를 찍어낼수록 손해인 상황이라 예상보다 빠르게 1집 앨범을 발표했다.
1990년 ‘슬픈 마네킹’을 타이틀로 정규 1집을 발표하며 이수만 대표는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본인의 방송경력과 인맥을 총동원해 무려 거물급 코미디언 이주일이 진행하는 ‘KBS 스타 탄생’을 그들의 정식 데뷔 무대이자 쇼케이스로 삼았다. 이수만 대표 역시 직접 출연해 아낌없는 홍보를 하며 MC와 주거니 받거니 후방 지원사격을 했고 이 무대에서 현진영이 갖고 있던 모든 능력을 다 보여주며 매력을 어필하게 된다.
대중들은 새로운 음악에 대한 청각적 반응보다 눈으로 보는 춤에 빠르게 반응했다. 사실 이전에 댄스로 대표되던 박남정, 소방차 등을 밀어낼 새로운 바람이었음이 분명했다.

(90년대 최고의 댄스 듀오 ‘클론과 듀스’가 백업으로 활동했다)
이후 와와로 활동하던 강원래, 구준엽은 군입대를 위해 하차를 했고 그 자리를 대신할 동생을 소개해줬는데 그게 훗날 듀스의 멤버 김성재였다.
현진영과 와와는 크게 3번의 변화를 겪었는데 강원래, 구준엽이 활동한 1기. 김송과 그녀의 남동생, 김성재 등 5명이 활동한 2기. 이후 김성재는 자신의 절친 이현도를 소개하여 함께 연습을 하는 도중 2기 멤버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하차하고, 최종적으로 김성재, 이현도가 남아 활동한 3기로 나뉜다.
90년대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듀스와 클론이 모두 현진영과 와와를 통해 방송 데뷔를 하게 된 셈이다.
성공을 목전에 둔 SM 기획의 첫 번째 시련은 너무 빨리 찾아오게 된다. 1991년 한창 주가를 올리던 현진영이 대마초 사건으로 부산 공연도중 경찰에 잡혀가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활동을 접고 회사 직원들까지 조사를 받게 된다.
소속가수가 재판을 받는 동안 제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뒷수습 외에 그리 많지 않다. 복귀가 불가능할 수도 있는 상황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가수의 노래는 방송은 커녕 음반 판매도 쉽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손실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버렸다.

(가요계 말상이자 DJ로 잘나간 3인방 이문세, 유열, 이수만)
출처: (링크)
그렇게 야심차게 출발한 이수만의 제작자로서 첫 번째 도전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고 우린 TV에서 다시 MC와 마삼 트리오로 활약하는 이수만 아저씨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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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Jay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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