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리의 소비 대모험'을 기억하시는가. 안경닦이부터 와인 오프너, 돈까스까지 파헤치며 딴지일보의 제작비를 거덜 내던 바로 그 전설의 시리즈.
그랬던 내가. 돌아왔다. '불가사리의 법률 대모험'으로. 서정아트센터 조 단위 사기극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물론 내 돈은 한 푼도 못 받았다), 일본인 미녀 '유키'의 로맨스 스캠을 간파해 냈지만(물론 이 과정에서도 돈이 들었다), 나의 텅 빈 통장은 채워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한 '오피스텔 분양권'이 휴지 조각이 되었고, 이에 어떻게든 빚을 갚아보려고 ‘월 1,000만 원 이상 수익 보장’이라는 말에 속아 향했던 캄보디아에서는…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 나왔다.
그렇다. 나는 망했다. 완벽하게.

내 꼴을 보다 못한, 나의 영원한 법률 노예(이자 사실상 채권자)인 박기태 변호사가 그의 뱃살만큼이나 육중한 입을 열었다.
"불가사리님. 답이 없습니다. 개인회생... 하셔야겠습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회생? 파산? 빚 떼먹고 도망가는 파렴치한들이나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이 고고한 미식가이자 딴지의 간판 필진인 내가, 그런 비윤리적인 짓을 하라고?
"변호사님! 실망입니다! 빚은 갚아야죠! 어떻게 나라에서 빚을 탕감해 줍니까? 이건 성실하게 빚 갚는 사람들만 바보 만드는 악법 아닙니까!"
박 변호사는 두꺼운 안경을 추켜올리며, 마치 철없는 조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회생파산은 채무자를 위한 악법이다? "놉, 채권자들 돈 받으려고 만든 법."
"불가사리님, 또 흥분하셨군요. 진정하시고. 그거 아십니까? 이 도산법, 원래 채무자 살려주려고 만든 법이 아닙니다. 정반대예요. 채무자 족치려고… 아니, 채권자 이익을 위해 만든 법입니다."
"네에?! 세상에 이런 것까지?"
"가장 오래된 파산법이 1542년 영국 헨리 8세 시절의 '파산자에 대항하는 법'입니다. 내용이 아주 살벌해요. '교묘하게 다른 사람의 재산을 손에 넣은 뒤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집에 틀어박혀 빚을 갚지 않으려는' 놈들을 겨냥했죠. 즉, 불가사리님처럼 돈까스 사 먹을 돈은 있으면서 빚은 안 갚고 재산 숨길까 봐, 채권자들이 공동으로 재산을 압류해서 나눠 가질 수 있게 만든 '채권자를 위한 징벌적 도구'였다 이겁니다."
"아니... 시작이 그랬다고요?"
"그렇죠. 채무자를 감옥에 가두던 19세기를 거쳐, '아, 저놈을 굶겨 죽이거나 가둬봤자 돈이 한 푼도 안 나오네? 차라리 일부라도 탕감해 주고 사회에 복귀시켜서 돈을 벌게 하는 게 낫겠다'라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계산이 깔리면서 지금의 '구조조정' 개념이 생긴 겁니다. 시작은 철저히 채권자의 이익이었어요."
"시... 시작은 그랬다 쳐도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법률용어로 도산법은 '집합적 채권추심법'이라고 부릅니다. 말이 어렵죠? 쉽게 말해 '채권자들, 싸우지 말고 줄 서서 공평하게 돈 받아 가세요' 법입니다."
"그게 무슨..."
"자, 불가사리님이 빚이 10억인데 전 재산이 1억이라고 칩시다. A 은행 5억, B 저축은행 3억, 박기태 변호사(...) 2억을 빚졌어요. 만약 A 은행이 힘세다고 그 1억 낼름 다 가져가면, B와 저는 땡전 한 푼 못 받죠? 이게 '개별적 채권추심'의 지옥입니다. 도산법은 '전원 스톱!'을 외치고, 법원이 그 1억을 채권 비율대로 (A 5천, B 3천, 가이드 2천) 공평하게 나눠주는 겁니다. 채무자를 무작정 위해주는 게 아니라, 채권자들의 공평하고 효과적인 추심을 위한 제도라고요."

공평의 예시
출처 〈X - @Roobo16〉
"아니, 그래도 10억 중에 1억만 받으면 손해잖아요!"
"불가사리님이 그 상태로 잠적해버리면 10원도 못 받는 것보다 낫죠. 채무자가 완전히 망해서 사라지는 것보다, 지금 있는 재산이라도 털거나(파산), 앞으로 3년간 벌 돈이라도 꾸준히 받는 게(회생) 채권자에게도 훨씬 이득이라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계산입니다."
다 탕감해 주면 누가 일하냐? "'실패할 자유'를 줘야 혁신이 나온다."
"흥! 그렇게 다 탕감해 주면 누가 성실하게 빚 갚으면서 일합니까! 다 배 째라고 하지! 나라 경제 망가집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할 자유'를 막는 게 경제를 망가뜨립니다. 불가사리님, 자본주의의 심장이 뭔지 아십니까?"
"돈... 돈까스...?"
"'주식회사' 제도와 '유한책임' 원칙입니다. 이게 애초에 '실패를 허용하기 위한' 위대한 발명품이에요. 회사가 망해도 투자자(주주)는 자기가 투자한 돈만 날릴 뿐, 개인 재산으로 회사 빚을 갚지 않죠. 이 '유한책임'이 실패의 충격을 제한해서 과감한 도전과 투자를 이끌어낸 겁니다. 개인회생/파산은 이 원리를 개인에게 적용한 방파제고요."
"그거랑 일 안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한국 역사에서 가장 화제가 된 보고서가 2013년 나왔던 맥킨지 보고서 '냄비 속 개구리, 한국경제'일 겁니다. 거기서 한국 증시가 저평가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뭘 꼽았는지 아십니까? 바로 '혁신 기업인의 성장을 막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입니다. 한번 실패하면 재기 불능이 되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적인 시도를 안 한다는 겁니다."
"......"

출처 〈문화일보〉 (링크)
"실패했을 때 직면할 치명적 결과가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게 하고, 이 때문에 좋은 직업을 제공해 주는 직장이 줄고, 생산성과 근로소득의 격차가 커져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며, 중산층은 채무에 시달리고, 총수요가 감소하고, 기업은 더 잘 안되게 되고, 이러다 보니 출산율이 저하되고, 이 때문에 기업은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처한다는 내용이에요. 조금 과장하면, 회생 파산만 제대로 보장해 줘도 출산율 극복할 수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이거, 제 이야기가 아니라 2013년에 맥킨지가 한 이야기입니다"
"그건 좀 너무한 거 같은데요. 시장 친화적이지 않은 거 아닙니까?"
"미국이 왜 혁신 기업이 계속 나옵니까? 파산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거든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사업하면서 기업 파산 4번 했습니다. 근데 대통령까지 됐잖아요? 시스템 자체가 실패를 '경영의 일부'로 인정하는 겁니다. 오히려 불가사리님처럼 감당 못 할 빚에 묶여 평생 노예처럼 살라고 하면, 그 사람이 일하겠습니까? 월급 받아봤자 다 압류당하는데. 현금 주는 음성적인 영역으로 숨어들죠. 경제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것, 그게 진짜 경제를 망가뜨리는 겁니다."
은행 돈 떼먹는 거 아니냐? "은행은 이미 다 계산하고 있다."
"그래도! 멀쩡한 은행 돈을 떼먹는 거잖아요! 은행 망하면 다 망하는 거 아닙니까! 피해자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하... 불가사리님. 은행 걱정은 넣어두십쇼. 자, 2025년 상반기 국내 은행 당기순이익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14조 9천억 원입니다. 사상 최대치예요. 이 중 대부분이 예대마진, 즉 이자 이익입니다. 누가 누굴 불쌍해합니까? 은행은 지금 돈방석에 앉아 있습니다."

출처 〈국세신문〉 (링크)
"아니, 그래도... 부실이 생기면..."
"그 '부실'이 어디서 오는지 아십니까? 2025년 6월 말 기준, 국내 은행 부실채권(NPL)이 총 16조 6천억 원입니다. 이 중에 불가사리님 같은 개인이 빌린 '가계 여신' 부실은 얼마일까요?"
"한... 10조?"
"3조 2천억 원입니다. 그럼 나머지 13조 1천억 원은? 전부 '기업 여신', 즉 기업 대출에서 터진 겁니다. 개인 부실의 4배가 넘어요. 진짜 은행 부실은 우리 같은 개미가 아니라 수천억, 수조 원씩 빌려 가는 기업에서 터집니다. 개인회생? 은행 전체 부실에 비하면 벼룩의 간이죠."
"크윽..."
"게다가 은행이 바봅니까? 은행이 대출 이자 받을 때, 그 이자율에는 이미 '위험 프리미엄'이 다 들어가 있어요. '불가사리 같은 사람이 돈 떼먹을 통계적 확률'까지 완벽하게 계산해서 이자를 받고 있다고요. 채무 불이행은 은행으로서 '예상 못 한 사고'가 아니라, '통계적으로 예측되고 가격에 반영된 사업 비용'일 뿐입니다. 그 비용 다 받고도 22조 원 넘게 벌었다는 거고요.
이자는 동서양 고금에서 다 범죄나 나쁜 행동으로 인식되었어요. 애초에 2%로 빌려온 돈을 5% 이자로 빌려주는 게 비윤리적이 아닐 수 있나요? 이자도 없이 돈 빌려주되, 갚지 못하면 몸에서 살 1파운드를 떼어내겠다는 ‘베니스의 상인’ 속 샤일록은 요즘 은행들보다 훨씬 양심적으로 보일 지경이에요.

재판정에서 채무자의 살을 베어내려는 샤일록
출처 - 영화 〈베니스의 상인〉 중에서
그럼에도 이자를 인정해 주는 이유는, 대출을 내주어 그걸 혁신 기업이 사용함으로써 국부의 증진에 기여하기 때문이고, 또 손해율을 계산해서 은행이 손해를 입으면 은행이 부담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자를 받고 있는 은행이 손해 보는 걸 왜 걱정합니까? 요즘 말로, 돈 빌려주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요? 예일대 논문에서도 '망할 기업에 돈 빌려주는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은행은, 파산법원에서 채무자의 파산에 반대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내 세금으로 빚 갚아주는 거 아니냐? "세금 1원도 안 들어갑니다!"
"흥! 그래도 억울합니다! 왜 내 세금으로 저런 빚쟁이들 빚을 갚아줘야 합니까! 난 세금 꼬박꼬박 냈는데!"
"아이고, 혈압 오르시겠네. 불가사리님. 세금 한 푼도 안 들어갑니다."
"거짓말! 법원이 탕감해 주는 거면 그게 다 세금이지!"
"이건 국가가 빚을 대신 갚아주는 '구제금융'이 아니에요. 법원이 채권자들(주로 은행)한테 '야, 너네, 얘 사정 보니까 도저히 다 못 갚겠어. 그러니까 3년간 이만큼만 받고 나머지 포기해.'라고 명령하는 겁니다. 돈을 주는 게 아니라, '그만 받아라.'라고 중재하는 거예요."
"그럼 법원 운영비! 판사 월급! 그건 내 세금 아닙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개인회생이나 파산 절차에 드는 비용, 파산관재인 보수 같은 행정 비용은 전부 그 제도를 이용하는 채무자 본인이 부담하는 게 원칙입니다. 심지어 세금은 '비면책채권'이라 회생이나 파산을 해도 탕감이 안 돼요. 다른 빚보다 최우선 변제 대상입니다. 오히려 국가는 이 제도를 통해 세금을 확실하게 징수하고 있어요."
사치하고 도박한 놈들도 살려준다? "그런 사람 0.7%"
"그래도 꼴 보기 싫어요! 명품 사고 도박하고 펑펑 쓰다가 돈 없다고 드러눕는 놈들도 다 살려주는 거 아닙니까! 이건 명백한 도덕적 해이죠!"
"그렇게 언론에서 떠드니까 다 그런 줄 아시죠. 자, '세상에 이런 것까지?' 놀랄 만한 데이터 나갑니다. 2024년 서울회생법원이 개인파산 신청자들의 파산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도박이나 사치 등 낭비'로 파산한 사람, 몇 프로였을 것 같습니까?"
"못해도... 30%?"
"0.70%입니다."
"네?! 7%가 아니고요? 0.7%?"
"네. 1%도 안 됩니다. 통계적으로 거의 의미가 없는 수준이에요. 대부분의 원인은 '생활비 부족', '사업 실패', '실직', '투자 사기 피해' 같은 구조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법원이 바보가 아니에요. 파산관재인이 재산 숨긴 거 없는지, 빚이 왜 늘었는지 다 조사합니다. 과도한 낭비나 도박이 명백하면? 법원이 '면책 불허가' 때립니다. 얄짤없어요. 물론 불가사리님이 그간 드신 돈까스와 와인 값이 '과도한 낭비'로 잡힐지는... 한번 따져봐야겠네요."
그래도 빚 탕감은 나쁜 거다? "방치하면 다 같이 망합니다."
"크... 크윽... 할 말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빚 탕감해 주면 누가 열심히 일하고 빚 갚으려고 하겠어요! 다 배 째라는 거 아닙니까! 국가 경제가 망가진다!"
"정반대입니다, 불가사리님. 오히려 방치하면 국가 경제가 망가져요."
"???"
"생각해 보세요. 불가사리님이 지금 빚이 10억인데 월 200만 원 벌어요. 평생 일해도 못 갚죠. 그럼 뭐 하겠습니까? 월급 받아봤자 다 압류당하는데. 정상적인 일 하겠어요? 현금 주는 일용직이나 전전하겠죠. 세금 냅니까? 소비합니까? 그냥 경제 시스템에서 완전히 이탈해 버리는 겁니다."
"......"
"그렇게 방치된 한계 채무자들이 빈곤층이나 노숙인이 되면, 그들을 부양하는 사회적 비용은 누가 댑니까? 결국 우리 세금이에요. 그게 더 큰 손해라고요. 회생 파산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입니다. 이 사람을 빚의 굴레에서 꺼내서 3년이든 5년이든 갱생시킨 다음, 다시 경제활동 인구로 만드는 거예요. 다시 일하고, 소비하고, 세금 내는 사람으로 복귀시키는 겁니다. 이게 국가 전체로 보면 훨씬 이익이죠."
"그럼 채권자는요! 돈 못 받는데!"
"채권자한테도 이게 나아요. 채무자가 잠적해서 10원도 못 받는 것보다, 회생 계획 짜서 3년간 갚을 수 있는 만큼이라도 꼬박꼬박 받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자본주의는 '실패를 허용하는' 시스템입니다."

출처 〈뉴스1〉 (링크)
나는 말이 없었다. 내가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제도가, 사실은 채권자를 위해 태어났고, 자본주의 혁신의 핵심 동력이었으며, 세금 한 푼 안 쓰고, 오히려 국가 경제에 이득이 되는 가장 현실적인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크... 변호사님...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럼 저... 저도... 개인회생을..."
"(서류를 꺼내며)자, 그럼 서류부터 봅시다. 일단 그동안 드신 돈까스 영수증이랑 와인 구매 내역부터 싹 다 가져오세요. '사치 및 낭비' 항목인지 아닌지 제가 직접 심사하겠습니다."
"네에에에?!!!!"
과연 불가사리는 돈까스 영수증을 무사히 제출하고 개인회생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불가사리의 법률 대모험, 다음 편을 기대하시라! (제발!)
편집: 이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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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마성의불가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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