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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의 귀환: 시대의 퇴행적 유령

 

극우라는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한때 혁명의 이름으로 불렀던 그 유령은 이제 증오와 퇴행의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시대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이 퇴행의 정치는 단순한 회귀의 열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질서를 무너뜨리고, 도덕을 정치의 하위 언어로 바꾸려는 의지다. 정치가 윤리의 경계를 침식할 때, 사회는 더 이상 법의 언어로 판단하지 못하고, 감정과 분노가 정의의 자리를 대신한다.

 

그 틈에서 반사회적·윤리적 일탈 세력이 자라난다. 그들은 폭력과 혐오를 신념으로 가장하며, 정치의 언어를 빌려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퇴행의 정치는 이들에게 은밀한 피난처가 되고, 그리하여 정치와 범죄, 신념과 폭력이 뒤엉키는 시대의 혼탁이 완성된다.

 

극우의 정치는 현재의 리듬을 거부하고 과거의 질서를 복원하려는 시간의 방향성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제도적 회귀의 욕망이지만, 정치가 과거의 언어를 빌릴 때마다 그 언어는 언제나 도덕의 사각지대를 남긴다. 전통과 국가, 정체성 같은 말들이 원래의 의미를 벗어나면, 그 언어는 현실의 불만을 선동의 연료로 바꾸고 폭력은 그 빈틈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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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합뉴스〉(링크)

 

오늘의 사회는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 채, 모든 급진적 언설과 공격적 감정을 ‘극우’로 묶어 단죄한다. 그 결과 반사회적·윤리적 일탈 세력은 스스로를 정치적 피해자로 위장하며 법의 추적을 벗어난다. 범죄는 정치로 둔갑하고, 정치의 책임은 도덕의 법정에 세워진다. 개념의 경계가 허물어질수록 판단의 기준은 흐려지고, 사회는 비난과 변명의 소음 속에서 스스로의 윤리를 잃는다.

 

극우라는 말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정치의 언어는 정치 안에서, 법의 언어는 법안에서, 도덕의 언어는 인간의 내면에서 각각 발화되어야 한다. 개념의 자리를 되돌려놓을 때 비로소 사회는 책임의 방향을 되찾는다. 언어가 정화되지 않으면 정의는 언제나 그 언어의 그늘 속에서 길을 잃는다.

 

 

이념의 상대성과 극단의 역설

 

정치는 언제나 시간의 리듬 속에서 움직인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구분은 구체적 이념이 아닌 시간에 대한 태도의 차이이다. 이는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이다. 한 사회의 진보가 다른 사회에서는 보수로 작용할 수 있으며, 시대에 따라 가치도 변한다. 정치는 시간 속에서 방향을 선택하는 행위이며, 그 태도가 곧 한 사회의 윤리를 드러낸다.

 

진보는 미래의 가능성에, 보수는 과거의 질서 속에서 안정과 지속의 의미를 둔다. 문명은 이 두 리듬의 대화 속에서 호흡하며, 어느 한쪽의 과도함은 다른 한쪽의 부패를 부른다. 진보가 과거의 지혜를 잃으면 방향을 잃고, 보수가 미래의 변화를 거부하면 생명을 잃는다. 문명의 균형이란 서로 다른 시간의 리듬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긴장 속의 질서다.

 

그러나 모든 리듬에는 파열이 있다. 극우는 그 파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의지, 즉 역행의 욕망이다. 그들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복원하려 하고, 회복을 넘어 지배의 기억을 되살리려 한다. 그래서 극우의 정치란 과거의 질서를 절대화함으로써 현재의 변화를 부정하고, 인간의 다양성을 질서의 이름으로 제약하는 통제의 미학이다.

 

극좌는 그 반대편에서 또 다른 파열을 일으킨다. 극좌는 미래의 이상을 절대화함으로써 현재의 복잡성을 부정한다. 그들에게 현 문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형태이며, 따라서 현실의 제도는 모두 불완전하다. 그래서 그들은 변혁을 윤리로, 파괴를 정의로 삼는다. 극우가 과거의 질서 속에서 안식을 찾는다면, 극좌는 미래의 순수함 속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러나 두 극단은 결국 시간의 한쪽만을 절대화함으로써 인간을 단일한 방향으로 몰아넣는 같은 오류를 공유한다.

 

그럼에도 극단이 언제나 악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사회가 병리적 불균형에 빠질 때, 극단은 집단 지성의 한계에서 솟구치는 본능적 복원력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1930년대 대공황기의 미국에서 루즈벨트의 뉴딜은 당시 보수 세력에게는 급진으로 보였으나, 실은 자본주의를 구한 극좌적 개입이었다.

 

뉴딜정책을 극좌로 대입하는 것이 지금의 생각으로는 충격일 수 있으나 당시의 보수적 주류 관점에서는 시장의 자율을 무너뜨린 계획 경제의 전형이었다. 이처럼 이념의 지형은 현실의 압력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상대적 지형이다.

 

반대로 1980년대 서방에서는 복지국가의 팽창으로 시장이 경직되었을 때, 신보수주의의 충격 요법이 체제의 균형을 되살렸다. 이는 탐욕의 자유가 아니라 질서의 회복을 향한 보수적 급진이었다. 이 역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복지국가 담론이 보수의 주류 담론으로 자리 잡던 당시, 신보수주의의 출현이 극우로 비친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보수적 가치의 통념에서는 정상 복원의 시도로 인식되었다.

 

이런 사례들은 극단이 언제나 파괴로 귀결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극단은 종종 사회가 스스로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사용하는 최후의 언어다. 체제가 무감각해질 때, 급진은 일종의 자극으로, 회복의 예감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 가능한 질서로 전화하지 못하면, 복원은 곧 폭주로 변한다. 문제는 극단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그 극단을 해석할 언어를 잃는 순간이다. 언어를 잃은 극단은 언제나 병리가 된다.

 

그 대표적 형태가 바로 반사회·반윤리적 일탈 세력이다. 그들은 정치의 언어를 흉내 내지만, 그 언어가 지닌 책임과 구별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폭력과 혐오, 거짓과 음모를 사상의 자유로 포장하고, 법과 윤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들의 자유는 타인의 존엄을 해체하는 자유이며, 그들의 언어는 공동체의 언어를 마비시키는 모방이다. 극우가 과거의 질서를 복원하려 한다면, 이들은 질서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문명의 기반을 파괴한다. 극우가 회귀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이들은 붕괴의 언어를 사용한다.

 

극우와 반사회·반윤리적 일탈 세력은 표면적으로 닮아 있으나, 그 근거가 전혀 다르다. 극우는 정치의 좌표 안에서 권력의 방향을 선택하는 정치적 지형(political topology)의 문제이고, 일탈 세력은 그 정치 언어에 기생해 인륜 질서를 파괴하는 도덕적 병리(moral pathology)의 문제다.

 

극우는 제도 내부에서 권력을 조정하며 체제를 변형시키지만, 일탈 세력은 극단적 체제에 기생하면서 사회를 파괴한다. 전자는 정치의 문법 안에서 움직이지만, 후자는 그 문법을 왜곡해 질서를 뒤흔든다. 그럼에도 오늘의 사회는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한 채 하나의 ‘극단’으로 묶어 취급한다. 그 결과 정치적 반대자와 도덕적 범법자가 같은 이름 아래 혼재하고, 그 경계의 붕괴는 진실 판단의 기능을 마비시킨다.

 

이 구분의 실패는 언어의 실패다. 언어가 구별의 기능을 잃을 때, 판단은 감정에 의존하고, 정의는 여론의 방향에 흔들린다. ‘극우’라는 말이 더 이상 정치의 위치가 아니라 도덕의 낙인으로 쓰일 때, 사회는 정치적 논쟁을 도덕 재판으로 대체한다. 그 속에서 반사회적·윤리적 일탈 세력은 오히려 피해자의 언어를 빌려 자신을 보호한다. 정치적 탄압, 종교적 탄압이라는 말이 그들에게 면죄부가 되고, 언어의 왜곡은 곧 사회적 현실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글로벌 사례와 '공생'의 위험성

 

그런 차원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언어의 복권이다. 극우는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일탈 세력은 처벌되어야 한다. 정치가 도덕을 대신하거나, 도덕이 법을 대체할 때, 사회는 책임의 경로를 잃는다. 개념의 경계는 단순한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구조다. 언어를 바로 세우는 일은 곧 정치의 회복이며, 문명의 윤리를 지키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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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합뉴스〉(링크)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이 구분을 현실 정치의 무대 위로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그는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근본 가치로 삼아온 20세기 미국의 정치 질서를 뒤집었다. 냉전의 종식 이후 미국은 자유주의의 승리를 확신하며, 민주·공화 양당이 모두 신자유주의의 언어로 세계를 통합하려 했다.

 

‘모두의 번영이 곧 미국의 번영’이라는 믿음이 그 시대를 지탱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신념을 배반했다. 그는 세계화의 피로와 산업의 붕괴, 정체성의 불안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과거의 보호무역 시절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되살린 것은 민주주의의 미래가 아니라 산업 국가의 권력 감각이었다.

 

그는 제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도를 권력자의 의지 아래 종속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규칙을 교환의 논리로 바꾸었다. 자유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묵시키는 자유였다. 질서를 말하지만, 그 질서는 권력의 집중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이 극우 정치의 본질이다. 과거의 언어를 빌려 현재를 통제하고, 현실의 복잡성을 단순한 적대의 구도로 바꾸는 정치다.

 

그러나 더 큰 위협은 그 정치의 외곽에서 자라났다. 트럼프의 반엘리트적 언어와 포퓰리즘은 헌법 질서를 부정하고 인류의 윤리를 거부하는 세력들에게 새로운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들은 다양성·형평성·포용(DEI)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름으로 조롱하며, 문명이 쌓아온 윤리적 토대를 해체했다.

 

이 반사회적·반윤리적 일탈 세력은 극우의 그늘에 기생하며 사회적 불만을 폭력의 언어로 전환했다. 극우는 그들의 파괴성을 이용했고, 반사회적·반윤리적 일탈 세력은 극우의 정치적 보호 아래 자신을 ‘억압받는 진실의 목소리’로 포장했다.

 

이 공생은 단순한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문명의 위기다. 정치가 윤리의 경계를 침식할 때, 폭력은 신념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고, 거짓은 자유의 언어로 위장한다. 극우의 정치가 제도 안에서 질서를 왜곡한다면, 일탈 세력은 제도 밖에서 인간의 도리를 파괴한다. 두 현상이 함께 작동할 때, 민주주의는 외형을 유지한 채 속으로부터 붕괴한다.

 

지금의 미국은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제도의 언어와 윤리의 언어가 뒤섞이고, 정치의 책임과 도덕의 판단이 교환된다. 의회와 법정이 서로의 역할을 흡수할 때, 사회는 정치를 재판으로, 재판을 정치로 대체한다. ‘극우’라는 말이 더 이상 하나의 정치적 위치가 아니라 모든 불만의 총칭이 될 때, 언어는 진실을 분별하는 기능을 잃는다.

 

일본 역시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패전 이후 일본은 평화헌법과 경제성장의 기조 속에서 ‘전후 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냉전의 종식과 함께 균열을 드러냈다. 경제는 정체했고, 세대는 분열했으며, 전후 민주주의의 가치들은 피로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 ‘정상 국가’를 외치는 정치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언어는 복원의 언어였고, 그 복원의 대상은 민주주의의 심화가 아니라 국가의 자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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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FP〉(링크)

 

이 회귀의 정치가 바로 일본형 극우의 얼굴이다. 그들은 제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도를 전후 체제의 굴레로 간주하고, 헌법의 평화 조항을 해석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역사를 교정의 대상으로 삼고, 기억의 윤리를 정치의 유연성으로 대체했다. 그 결과 ‘국가의 자존’은 곧 ‘기억의 수정’으로, ‘안보의 강화’는 ‘평화의 후퇴’로 이어졌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극우 정치와 반사회적·반윤리적 일탈 세력이 결합했다는 점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자라난 혐오 담론과 여성·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애국의 언어로 포장되었다. 일탈 세력은 정치의 그늘에 숨어 차별과 음모를 일상화했고, 극우는 그들의 열광을 대중 동원의 에너지로 활용했다. 일본의 극우 정치가 제도 안에서 역사를 재해석한다면, 그 주변의 일탈 세력은 제도 밖에서 사회의 윤리를 침식한다. 두 현상은 같은 목표를 향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파괴적 리듬을 공유한다.

 

오늘의 일본은 이 리듬 속에서 방향을 잃고 있다. 전후의 민주주의는 피로했고, 자유의 언어는 혐오의 정당화로 변질되었다. 정치가 기억의 윤리를 침묵시키면, 사회는 다시 과거를 신화의 언어로 회상한다. 그렇게 일본의 민주주의는 복원의 이름으로 역사를 후퇴시키고 있다.

 

한국 또한 예외가 아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경험한 한국 사회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급격한 근대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그 성공의 이면에는 냉전의 기억과 반공의 언어가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 언어는 한때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패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정치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그 틈에서 극우적 담론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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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시스〉(링크)

 

오늘의 한국 극우는 과거의 권위주의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는다. 대신 국가의 안보와 도덕의 수호를 내세워 시민의 다양성을 압박하고, 비판의 언어를 ‘종북’과 ‘반국가’의 혐의로 몰아세운다. 그들의 정치적 언어는 여전히 제도 안에 있지만, 그 언어를 떠받치는 감정은 점점 제도 밖으로 흘러나온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반사회적·반윤리적 일탈 세력이다.

 

그들은 정치의 언어를 흉내 내면서, 사실상 공동체의 기반을 해체한다. 여성과 약자에 대한 조롱, 소수자에 대한 혐오, 거짓과 음모의 확산은 더 이상 변두리의 현상이 아니다. 이제 그 증오의 방향은 이웃 국가와 타민족으로까지 확장되어, 중국인을 향한 무뇌적 언어폭력과 금치산자 수준의 인종 비하가 일상화되고 있다.

 

이러한 언어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윤리적 능력의 붕괴를 드러낸다. 문명적 판단의 능력이 마비될 때, 폭력은 가장 쉬운 표현이 된다.

 

극우는 제도의 언어를 이용해 권력을 재구성하고, 일탈 세력은 그 권력을 빌려 윤리를 무력화한다. 전자는 체제의 방향을 바꾸고, 후자는 그 변화의 틈에서 신뢰의 기반을 허문다. 문제는 정치가 이 둘의 공생을 방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우는 일탈 세력의 분노를 대중 동원의 연료로 삼고, 일탈 세력은 극우의 그늘 아래서 자신을 ‘정의의 수호자’로 위장한다. 이렇게 권력과 일탈이 맞물릴 때, 정치는 윤리를 흡수하고, 법은 무력해지며, 도덕은 선전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문제 해결의 열쇠: 언어의 복권

 

언어가 혼란해질 때, 도덕의 책임은 정치의 그늘 속으로 숨는다. 반사회적·반윤리적 일탈 세력은 바로 그 틈을 이용한다. 그들은 폭력과 혐오, 거짓과 음모를 신념의 언어로 포장하며, 스스로를 ‘정치적 피해자’로 위장한다. 사회가 ‘극우’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급진을 단죄할 때, 이들은 오히려 그 단어 뒤에 숨어든다. 정치의 이름으로 도덕의 책임을 회피하고,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인간 존엄의 훼손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극우 정치는 일탈 세력에게 정치적 알리바이(political alibi) 또는 도덕적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우는 일탈 세력을 직접 대변하지 않지만, 그들을 두둔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한다. 그들은 비판을 ‘탄압’으로, 제재를 ‘검열’로, 처벌을 ‘정치적 박해’로 바꿔 말한다. 그렇게 도덕적 일탈이 정치적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사회는 범죄를 신념으로 오인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위기다. 언어의 경계가 무너질 때, 책임의 경로도 함께 사라진다. 정치의 언어는 권력의 공간을 설명해야 하지만, 지금은 윤리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정치와 범죄, 신념과 폭력이 구별되지 않는 혼탁한 시대가 완성된다.

 

문명은 언어 위에 세워진다. 언어가 경계를 세우고, 경계가 책임을 낳는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그 언어를 잃고 있다. 정치와 도덕, 법과 감정이 뒤섞이면서 사회는 스스로를 구별할 능력을 상실했다. 말은 넘쳐나지만, 그 말들이 가리키는 진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극우는 권력의 언어로 윤리를 대체하고, 일탈 세력은 그 언어의 잔해 속에서 자신을 정당화한다. 정치가 도덕의 이름을 빌리고, 도덕이 법의 자리를 차지할 때, 사회는 책임의 주체를 잃는다. 이것이 오늘의 문명 피로이며, 민주주의의 가장 깊은 균열이다.

 

문명사회는 정치도, 법도, 외교도 언어로 수행한다. 언어는 문명 그 자체의 구조다. 그러나 오늘의 일탈 세력은 바로 이 언어를 공격한다. 그들은 언어를 무력화함으로써 윤리의 판단을 마비시키고, 스스로를 그 언어의 잔해 속에 위장시킨다. 기술의 혁명과 뉴미디어의 확산은 시민의 언어를 분절시키고, 진실을 알고리즘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힌다. 그 틈에서 언어는 소음이 되고, 소음은 곧 통치의 수단이 된다.

 

이 시대를 퇴행으로 이끄는 유령은 바로 그곳에서 태어난다. 시민이 자신의 언어를 잃고 정치와 기술에 그 권한을 넘겨줄 때, 사회는 더 이상 말의 주체가 아니라 조작의 대상이 되고, 문명은 스스로의 윤리를 잃게 된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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