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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가수 그리고 빌런의 부활

 

1990년대 후반 가요계는 아이돌 열풍과 함께 또 다른 트렌드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얼굴 없는 가수와 블록버스터급 드라마타이즈(극의 형식으로 스토리와 서사를 담아 표현하는 기법) 뮤직비디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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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가수라고 하기엔 앨범 표지에

가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박아놓았다.

〈조성모 1집 - To heaven〉 앨범 재킷(좌)

마치 드라마 예고편 같았던 뮤직비디오

To heaven〉뮤직비디오 중(우)

 

조성모의 데뷔는 일반적인 가수들과 달랐다. 앨범 발매와 동시에 공식 데뷔 무대를 갖는 대신, 이병헌, 김하늘이 출연한 드라마 예고편 같은 뮤직비디오를 방송에 내보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가수 이름과 노래 제목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정보가 없었다. 노래가 히트할수록 궁금증이 커졌고 여러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한 달 만에 등장한 그는 훈훈한 외모와 소년 같은 미성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동시에 인기 예능 〈출발 드림팀〉 출연을 통해 성실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부각되며 오랜만에 남녀노소에게 고루 사랑받는 스타가 탄생했다.

 

조성모의 성공 뒤에는 제작자 김광수 대표가 있었다. 당시 IMF로 그 역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1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초호화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전까지 뮤직비디오는 가수가 적당히 나와 립싱크를 하거나 신인 배우를 써서 가사에 충실한 이미지를 담는 수준이었고, 보통 그 돈을 아껴 홍보(PR)비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모험이 실패하면 완전히 망하는 상황에서 그는 ‘얼굴 없는 신비주의 마케팅’과 ‘블록버스터형 뮤직비디오’ 전략으로 잊혔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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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 윤상의 입대 이후 별다른 후속작이 없던 김광수 대표는 MBC 은경표 PD의 소개로 ‘구본승’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데뷔했다. 여담으로 당시 구본승은 〈카페 라구나〉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카페로 말할 것 같으면 정우성이 일하는 곳으로 알려져 문전성시를 이뤘다는 전설의(?) 카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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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TV에

출연했고 바로 스타덤에 올랐다.

〈구본승 1집 - 너 하나만을 위해〉 앨범 재킷(좌)

하이틴 스타로 급부상하게 만들어준

드라마〈종합병원〉중(우)

 

특이한 점은 가수지만 음반 없이 MBC 예능 프로에 먼저 나와 얼굴을 알렸다. 이후 드라마에 캐스팅되어 인지도를 넓히는 동시에 음반이 발매된 것이다. 이는 김광수 대표와 은경표 PD의 비즈니스 파트너십 전략이 발휘된 결과였다. 구본승은 가요톱텐에서 1위를 두 번이나 할 정도로 성공한 톱스타가 되었다.

 

1994년 발표한 구본승 1집 〈너 하나만을 위해〉는 듀스의 이현도가 작곡한 히트곡이었다. 사실 듀스가 데뷔를 위해 데모를 돌릴 당시, ‘자기 스타일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던 제작자가 바로 김광수 대표였다. 결국 그가 선택한 댄스 그룹은 E.O.S였다. 결과는 대부분이 기억하듯 〈넌 남이 아냐〉와 보컬 김형중의 빡빡머리만 남은 실패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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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S 1집 - 꿈, 환상, 그리고 착각〉 앨범 재킷(좌)

〈E.O.S 2집 - 넌 남이 아냐〉 앨범 재킷(우)

 

듀스를 거절하고 이 팀을 만든 것을 보면, 아마 당시 일본의 ‘샤란큐’와 ‘코무로 테츠야’의 ‘TM네트워크’에 영향을 받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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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가수들은 사장을 피해 군대로 도망을 갔던 걸까?

〈구본승 2집 - 미궁〉 앨범 재킷

 

구본승은 가수, 배우, 예능을 모두 섭렵한 멀티 엔터테이너였다. TV를 켜면 늘 나올 정도로 잘나가는 스타였지만, 2집 앨범을 발매하고 바로 군대를 가는 김민우 때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물론 병역기피 없이 인기 연예인을 군대 보내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구본승은 제대로 된 활동 한 번 못 해보고 2집 활동을 접었다. 사실상 손해 보는 장사를 한 셈이었다.

 

그 뒤 1996년, 김광수 대표는 4년 만에 복귀하는 김완선의 7집 매니지먼트를 맡았다. 그러나 타이틀곡 〈탤런트〉의 표절 시비로 활동에 차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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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모 MV 제작비는 대만에 있던

김완선의 차를 몰래 팔아 마련했다고.

〈김완선 7집 - INNOENCE〉 앨범 재킷

 

게다가 PD 비리 사건으로 고발당하며 회사 소속 연예인의 방송국 출연 정지 징계까지 받았다. 이렇게 90년대 스타 김완선의 복귀는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그렇게 제작자 김광수의 암흑기가 시작되며 가요계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 같았는데, 그는 조성모를 통해 제작자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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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모 2집 - For your soul〉 앨범 재킷(좌)

〈조성모 3집 - 아시나요〉 앨범 재킷(우)

 

조성모는 솔로 가수였지만 아이돌급 팬덤을 보유했다. 발표하는 음반마다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며 90년대 초반의 신승훈, 김건모급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IMF로 인한 경기 침체와 MP3의 등장으로 음반업계가 불황이었음에도 3연속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특히 3집 〈아시나요〉는 최단기간 100만 장이 팔리며 연간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김광수 대표의 조성모식 신비주의 마케팅과 블록버스터급 뮤직비디오 제작은 유행처럼 번졌다. 그는 이 성공을 바탕으로 다시 가요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온갖 논란과 비리로 가요계에서 퇴출당할 뻔했던 ‘문제적 인물’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혁신적인 성공을 통해 다시 ‘업계의 정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빌런의 부활이었다.

 

 

JYP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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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2집 - 딴따라〉 앨범 재킷(좌)

〈박진영 3집 - 썸머 징글벨〉 앨범 재킷(우)

 

박진영은 1994년 데뷔 이래 자신의 2집과 3집을 모두 성공시키며, JYP의 전신인 태흥기획을 설립했다. 가요계에 여러 유행이 있었음에도 그는 흐름에 영향받지 않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고한 댄스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보수적인 시절에 과감한 차별성을 보여준 〈엘리베이터〉와 같은 곡은 노골적인 섹스 어필의 가사와 춤, 의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사람을 들썩이게 하는 음악과 〈그녀는 예뻤다〉 같은 재치 있는 아이디어로 발표하는 앨범마다 1위를 차지하는 인기 가수였다.

 

1996년부터는 해외 진출의 열망을 보였다. 미국의 팝그룹과 〈영원히 둘이서〉를 듀엣으로 녹음하고, 영어 버전 앨범도 내놓을 계획을 발표하며 출국했지만 아쉽게도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1년 전속 계약금 5억 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EMI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동남아 진출을 시도했다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행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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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1집 - 난 괜찮아〉 앨범 재킷(좌)

SM 곽상엽, JYP 방시혁을 배출한

제6회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앨범 재킷(우)

 

1997년, 박진영의 첫 번째 제작 가수 진주가 1집 〈난 괜찮아〉로 데뷔했다. ‘박진영과 김형석이 프로듀싱한 가수’라는 타이틀로 홍보를 펼치며 엄청난 보컬의 괴물 신인이라는 수식어로 주목받았지만, 중위권 정도의 성적에 그쳤다. 박진영은 진주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제작 시스템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때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를 통해 가요계에 입문한 작곡가 방시혁을 영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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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에 대한 과한 오마주는

간혹 표절 논란을 불러내기도 했다.

〈박진영 4집 - 십년이 지나도〉 앨범 재킷(좌)

〈박진영 5집 - KISS ME〉 앨범 재킷(우)

 

1세대 아이돌과 유승준 등 신예의 등장으로 기존 댄스 가수들이 맥을 못 추는 상황에서도, 박진영은 특유의 복고풍 디스코 음악으로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특히 엄정화의 〈초대〉, 베이비복스의 〈Get Up〉, 인순이의 〈또〉 같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싱어송라이터로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1998년, 5인조 아이돌 데뷔를 예고했다. 당시 10대들은 H.O.T., 젝키, 신화 같은 새로운 아이돌 스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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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1집 - Chapter 1〉 앨범 재킷(좌)

god의 지상파 첫 방송.

알고 보니 더 우울한 것 같다.

SBS 〈한밤의 TV연예 〉 중(우)

 

1999년, 박진영의 첫 아이돌 그룹 ‘god’가 1집 〈어머님께〉를 발표했다. 이전부터 보법이 남달랐던 박진영은 어머니의 사랑과 자식놈들(?)의 반성을 담은 한국 최초의 ‘효 팝’을 선보였다. 이는 자극적이고 강한 메시지가 주를 이뤘던 기존 아이돌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그 뒤로 다시 보기 힘든 파격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다소 심심한 음악과 춤, 메인 보컬의 고정관념을 파괴한 비주얼 등으로 소녀 팬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알던 미소년 아이돌의 모습이 아닌 세계 최초 유일무이한 생계형 아이돌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집 활동은 망한 것도, 성공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서 끝났다. 타이틀곡 〈어머님께〉는 투팍의 〈Life Goes On〉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실제로 앨범에는 샘플링 표기를 했으나 회사에서 관련 대금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 투팍 측에 편곡을 제외한 곡의 권리를 넘기고 앨범 판매 정산도 해주었다고 한다.

 

이런 문제가 발생했던 이유는 god가 JYP 소속이면서도 소속이 아닌, 특수한 계약 관계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작 부분에서 소통의 오류가 난 것인데, 원래 god 멤버 4인은 정훈탁 대표의 EBM 소속이었고, 메인 보컬 김태우만 JYP 소속이었다. 박진영은 프로듀싱을 맡고 김태우는 임대하는 형식으로, 제작과 매니지먼트를 EBM에서 담당했다. 애초에 EBM은 정우성, 김지호, 전지현 등 배우 전문 회사였다. 따라서 음반과 관련해서는 미숙한 비즈니스 처리로 인해 투팍 측과의 샘플링 대금 정산에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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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1번째 프로포즈〉 OST 앨범 재킷(좌)

KBS 미니시리즈 폴리스〉 OST 앨범 재킷(우)

 

싸이더스의 전신인 EBM의 대표 정훈탁은 조용필의 로드 매니저로 업계에 입문했다. 1993년 필기획에서 준비하던 영화 〈101번째 프러포즈〉 OST가 제작 과정에서 차질이 생기자, 투입된 진행비를 지급하고 따로 독립해 제작을 마쳤다. 영화의 흥행은 저조했지만, OST는 성공했다. 이때 영화사 신씨네의 차승재, 음악감독 송병준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KBS 드라마 〈폴리스〉 OST까지 제작하며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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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력 없이 주연을 맡은 건 외모 때문인가,

정훈탁의 능력 때문인가.

영화 〈구미호〉 포스터(좌), 스틸컷(우)

 

그는 엔터 회사 EBM(E: 이미, B: 버린, M: 몸)을 차리고 정우성을 발굴해, 신씨네에서 제작하는 영화 〈구미호〉에 주인공으로 데뷔시켰다. 뒤이어 김지호, 한재석을 발굴해 스타로 키워냈는데, 대학 동기였던 박신양을 매니지먼트하는 등 사람 보는 눈이 좋고 스타를 만드는 수완이 좋은 회사로 성장했다. 배우 매니지먼트와 드라마 OST 제작에서 연이어 성공을 거두면서, EBM은 단순히 기획사를 넘어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의 도약을 꿈꾸었다. 이에 사업을 확장하여 OST 제작을 넘어 본격적인 가수 음반 제작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97년 갑자기 찾아온 IMF 사태로 자금줄이 마르는 상황이 왔다. 제작은 무산되었고, 그 기간 회사의 관리 없이 방목되었던 연습생들로 god를 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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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기획했던 혼성 6인조 ‘god 6’(좌)

시트콤 출연으로 연습생들의

생계를 책임진 와썹맨 쭈니형

SBS 〈순풍 산부인과〉중(우)

 

가수 전문 매니지먼트가 아니었던 EBM은 회사 내부에 관련 전문 인력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박진영에게 프로듀싱을 위탁하고 팀 구성과 콘셉트 등 가수 제작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다. 애초 혼성 6인조 ‘god 6’로 제작 예정이던 팀은 박진영의 개입으로 혼성을 포기하고, JYP 연습생인 김태우를 합류시켜 5인조 남성 그룹으로 전환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데뷔한 god의 1집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앨범 활동이 끝난 후 팀은 존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고, 박진영의 프로듀싱도 시험대에 올랐다.

 

 

3대 기획사 구도의 완성

 

1세대 아이돌 시대는 이수만의 SM, 이호연의 대성기획이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은 상태에서, 군소 세력들이 소소한 지분 싸움을 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가수의 인기를 알 수 있는 지표는 지상파 1위, 음반 판매량, 가요 대상 등이었다. 외부 요인과 여러 사정으로 미세한 차이를 보였다면, 그 시점에서 팬덤의 크기를 체감할 수 있는 바로미터는 합동 콘서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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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콘서트 - 내일은 늦으리〉 앨범 재킷(좌)

스피드 012 콘서트 포스터(우)

 

합동 콘서트는 90년대 초반, ‘환경 콘서트’라는 이름이었고, 중반에는 ‘스피드 012’ 같은 통신사 주관의 행사였다가, 후반에는 ‘드림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합동 콘서트라는 이름 그대로 정상급 가수들을 모두 모아 한 무대에 올리는 대규모 이벤트인데, 대중들은 이 무대를 통해 가수의 현재 인기와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잠실 주 경기장에서 개최하는 이 콘서트의 엔딩 무대와 관객석 최상층을 차지하는 팬덤을 보유한 가수가 당시 대세이자 한국 최고의 가수였다. 가수는 보이지도 않는 드넓은 잠실 주경기장 최상층 자리를 팬덤은 자부심으로 채웠다. 잠실의 주인이 곧 한국 최고의 아이돌인 셈이었다.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 신화와 클릭비, Fly to the sky까지 이 콘서트 출연진 절반이 SM과 대성기획의 가수였다. 이것만 봐도 당시 두 회사의 영향력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YG, GM기획, OK뮤직, 월드뮤직 등이 패권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뜬금없는 곳에서 이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회사가 등장했다.

 

1999년 1집의 실패로 팀의 존폐가 논의된 god가 다시 박진영의 프로듀싱으로 2집을 발표한 것이다. EBM(E: 이미, B: 버린, M: 몸)은 사명을 싸이더스로 바꾸고 SM에서 나온 정해익을 영입했다. 국내 최정상 아이돌을 매니지먼트한 그의 노하우가 더해지면서, god는 점점 아이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god는 전혀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은 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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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좌)에 비해 많이 아이돌 티가 나기 시작한 2집(우)

 출처 - 윤계상 인스타그램(좌)

〈god 2집 - Chapter 2〉 앨범 재킷(우)

 

god는 신곡이 주목받기 시작할 즈음, MBC 육아 예능에 캐스팅되었다. 첫 방송이 나간 다음 날, 놀라운 상황이 펼쳐졌다. 아이돌이라고 하기엔 너무 옆집 청년들 같았고, 소탈함을 넘어 짠하기까지 한 모습에 귀여운 아기 재민이와의 좌충우돌한 모습이 폭발적인 시너지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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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는 재민이에게 집 한 채 해줘도 모자르다.

MBC 〈god의 육아일기〉중

 

관찰 예능의 시초 격인 <god의 육아일기>는 H.O.T.에게 먼저 제안이 갔으나, 꾸미지 않은 사생활을 담아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껴 거절했다고 한다. 프로그램의 인기와 함께 god의 인기와 음반 판매량이 동반 상승했다. 이 여세를 몰아 god는 데뷔 후 첫 1위를 달성하며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애수〉, 〈Friday night〉 3곡을 연속 히트시켰다. 단숨에 H.O.T., 젝스키스, 신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1세대 Big 4로 올라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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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5집 - Outside Castle 앨범 재킷(좌)

god 3집 - 거짓말 앨범 재킷(우)

 

이듬해 발표한 god의 3집은 젝스키스의 해체로 라이벌이 사라진 H.O.T.의 5집과 활동 시기가 겹치게 되는데, 두 팀의 맞대결이 주목할 만 했다. 결과부터 보면, 10월에 컴백한 H.O.T.의 타이틀곡 〈Outside Castle〉이 열 한 차례 1위를 기록했고, 11월에 컴백한 god는 〈거짓말〉로 14회의 1위를 기록했다. 앨범 판매량 총 192만 장의 god는 KBS 가요대상까지 받으며 완전히 떠오른 태양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H.O.T.마저 해체하면서 god는 아이돌을 넘어 국민 그룹으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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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 4집 - 성인식 앨범 재킷(좌)

량현량하 1집 - 쌍둥이 파워 앨범 재킷(우)

 

god의 성공은 바로 박진영의 성공이었고 방시혁도 히트 작곡가가 되었다. 같은 해, JYP는 태원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해 가수, 배우 활동으로 주목받던 박지윤의 4집 〈성인식〉을 내놓았다. 이전까지 고교생 같았던 박지윤을 전혀 다른 인물로 만들어내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뒤이어 초등학생 쌍둥이 듀오 ‘량현량하’의 깜짝 성공까지 이어지며 승승장구했다.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2001년, 대영 AV 이사 출신인 홍승성과 함께 사명을 JYP 엔터테인먼트로 변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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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의 새로운 모바일 인터넷 플랫폼

June을 홍보하기 위한 콜라보

〈노을 1집 - 붙잡고도〉 앨범 재킷

 

JYP는 SM과 대성기획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의존한 아이돌이 아닌, 변칙적인 플레이와 아이디어를 가진 박진영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목받았다. 업계 최초로 대기업 SKT의 지원을 받아 모바일 가수 노을을 데뷔시켰다. 통신사의 모바일 플랫폼을 이용한 티저 광고와 박진영 효과로 꽤 많은 홍보를 했지만, 앞선 가수들보다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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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1집 - 나쁜 남자〉 앨범 재킷(좌)

별 1집 - 12월 32일〉 앨범 재킷(우)

 

2002년, JYP는 남자 솔로 ‘비(RAIN)’와 여자 솔로 ‘별’을 차례로 선보이면서 무서운 속도로 소속 가수 라인업을 탄탄히 다져갔다. 많은 기획사들이 10대 팬덤만을 노린 음악을 만드는 사이, JYP가 조금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 성공의 요인이 된 것이다.

 

박진영과 그의 음악 파트너 방시혁은 10대보다는 좀 더 다양한 연령층이 반응할 수 있는 노래들을 선택했다. 당시 아이돌 음악에 비해 차분하고 그루브 있는 스타일의 음악을 지향했는데, 다른 회사 가수들보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가 되었다. 다만 빌보드와 유사한 스타일의 음악과 콘셉트를 둘러싼 논란은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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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2집 - 태양을 피하는 방법〉 앨범 재킷(좌)

인기의 시너지를 만든

KBS 드라마 〈상두야 학교가자〉 포스터(우)

 

특히 비가 2집 〈태양을 피하는 방법〉으로 솔로 가수 원탑으로 성공하게 되는데, 이로써 ‘SM, 대성기획, JYP' 3자 구도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수만이 아이돌 시스템을 만들고, 이호연이 그 시장을 확장했다면, 박진영은 아이돌과 솔로 아티스트를 넘나들며 제3의 영역을 개척한 셈이었다. 이로써 한국 대중가요 시장은 완전히 3대 기획사 체제로 재편되었고, 이들의 경쟁과 협력 속에서 K-POP이라는 거대한 산업의 기틀이 다져지기 시작했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Jay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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