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리의 소비 대모험’을 기억하시는가. 딴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기를 끌었던 바로 그 전설의 시리즈다. 안경닦이부터 믹스커피, 돈까스까지 파헤치며 편집장의 제작비를 거덜 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3년 전 홀연히 사라진 나를 두고 ‘와인 밀수를 하다 구속됐다’라느니, ‘술과 돈까스에 절어 쓰러졌다’라느니, ‘딴지 원고료가 짜서 삐졌다’라느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다른 건 몰라도 원고료 설이 사실인지는, 죽어도 밝힐 수 없다. 확실한 건, 나는 그간의 금융 사기 모험(?)으로 완벽하게 텅 빈 통장과 두툼한 뱃살만 간직한 채였다는 것이다.

1억이 넘는 빚을 감당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처절한 심정으로 울산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저... 일 좀...”
그렇게 나는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울산의 작은 소방안전용품점(소화기, 안전모 등을 파는)에서 일을 시작했다. 3년간의 화려한(?) 모험을 뒤로하고, 창고에서 소화기 재고나 파악하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1장: 지옥 불, 그리고 한 줄기 동아줄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어두웠다. 뉴스 속보로 울산 화력발전소에서 대형 구조물 붕괴 및 화재 사고가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시 전체가 사이렌 소리로 울리는 듯했다.
가게 전화기가 불이 났다. 보통은 “소화기 한 개 얼마예요?” 같은 전화뿐이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따르르릉!”
“네, OO 안전입니다!”
“울산 소방본부 현장 지휘팀 OOO입니다! 지금 화력발전소 현장입니다! 정신없으니, 용건만 말합니다. 지금 당장 산업용 소화기 150개, 방독면 200개 물량 있습니까? 1초가 급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야! 저쪽 라인 막아!” 하는 고함과 사이렌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네! 네! 있습니다! 150개 다 있습니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저희 트럭 보낼 테니 준비해 주세요! 결제는 저희 행정팀에서 바로 처리할 겁니다! 끊습니다!”
“뚝.”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이 불가사리가 어머니께 효도하는구나! 창고에서 먼지 쌓인 소화기를 닦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거 한 건이면 밀린 원고료 따위... 아니, 그간의 손해를 조금이나마 메꿀 수 있다!
2장: 덫, “특수 소화포가 급합니다!”
소화기를 모두 꺼내 트럭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10분 뒤,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아까 그 소방관이었다. 목소리가 더 다급해져 있었다.
“아,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특수 화학물질에 불이 붙어서 일반 분말로 안 잡힙니다! ‘특수 내화 소화포’가 급하게 필요한데, 이게 울산에 재고가 없어요! 지금 저희 행정망이 사고로 마비돼서 결제가 안 됩니다!”
“네? 그... 그럼 어떻게...”
“제가 유일한 납품 업체인 ‘대한 특수 방재’라는 곳 연락처를 드릴게요! 지금 저희가 현장에서 1분 1초가 급해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사장님이 먼저 ‘대한 특수 방재’에 900만 원만 입금해 주시면, 저희가 아까 소화기 값 1,200만 원이랑 합쳐서 2,100만 원을 30분 내로 바로 이체해 드리겠습니다! 사람 목숨이 달렸습니다! 빨리요!”
900만 원. 어머니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이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사람 목숨이 달렸다”라는 말과 “2,100만 원”이라는 숫자만 맴돌았다.
나는 이 재난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 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이 큰 거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불러주는 ‘대한 특수 방재’ 계좌로 900만 원을 이체했다.
ㄴ
“입금했습니다! 확인...!”
“감사합니다! 사장님이 영웅입니다! 곧 트럭 보냅니다!”
“뚝.”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나도 사회에 쓸모 있는...

출처 〈한겨레〉 (링크)
3장: 침묵, 그리고 ‘없는 번호’
30분이 지났다. 트럭은 오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났다. 입금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아까 그 ‘소방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잘못 걸었나? 다시 걸었다. 없는 번호다. 그럼 ‘대한 특수 방재’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사용이 정지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 감각, 이 패턴. 아아, 사기라니! 이 불가사리가! 그것도 119에게! 아니, 119를 사칭한 놈에게! 어머니의 피 같은 돈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뉴스를 다시 보니, 화력발전소 사고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맞았고, 소방관들 다수가 일을 해야 하는 것도 맞았다. 그러나 그놈들은 진짜가 아니었고, 실제 재난을 이용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4장: 박 변의 일침: “그거, 전형적인 ‘노쇼 사기’입니다.”
나는 넋이 나간 채로 박기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영원한 돈까스 메이트이자 법률 노예... 아니, 구원자.
“변호사님... 저... 저 119에 사기당했습니다...”
“(한숨) 불가사리님. 119를 ‘사칭’한 사기겠죠. 그거, 요즘 유행하는 ‘노쇼(No-show) 사기’ 또는 ‘대리구매 사기’입니다.”
“노쇼요? 제가 안 갔다고요?”
“아니요, 그놈들이 노쇼한 거죠. 이건 소상공인들만 전문적으로 노리는 아주 악질적인 수법입니다. 특히 불가사리님이 당한 건 실제 재난 상황을 악용한 최악의 케이스고요.”
나는 ‘세상에 이런 것까지?’ 싶어 자세히 물었고, 박 변호사는 마치 돈까스 튀김옷의 원리를 설명하듯 차분하게 사기의 구조를 해부했다.
“아이고, 불가사리님... (깊은 한숨)”
수화기 너머로 박 변호사의 뱃살만큼이나 육중한 한숨이 들려왔다.
“제가... 제가... 119라는데 어떡합니까! 사람 목숨이 달렸다는데!”
“하... 불가사리님. 제발 그놈의 '한 방' 심리 좀 버리세요. 그리고 그놈의 얇은 귀! 그게 바로 불가사리님이 1억 넘는 빚을 지고도 또 당하는 이유입니다. 자, 잘 들으세요. 제가 지금부터 불가사리님이 좋아하는 돈까스 튀김옷에 비유해서 이 사기의 5단계 공식을 설명해 드릴 테니까, 두 번 다신 당하지 마세요!”
“도... 돈까스요...?” (꿀꺽)
“자, 1단계! ‘미끼(The Bait)’! 이게 바로 ‘밀가루’ 단계입니다.”
박 변호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놈들은 일단 ‘소화기 150개’, ‘도시락 100개’처럼 사장님(재료)의 눈을 뒤집어 놓을 거대한 주문을 던집니다. ‘와! 이거 한 건이면!’ 싶은 생각이 들게 하죠. 불가사리님처럼 텅 빈 통장을 보며 한 방을 노리는 분들에게 이 ‘밀가루’는 아주 두껍고, 아주 달콤하게 발립니다. 이미 이성을 잃기 시작하는 거죠.”
“그... 그렇죠. 1,200만 원이었는데...”
“자, 2단계! ‘권위(The Authority)’! 이건 ‘계란물’입니다.”
“계란물이요?”
“밀가루가 재료에 착! 붙듯이, 미끼가 피해자에 착! 달라붙게 만드는 접착제! ‘울산 소방본부’, ‘시청’, ‘대기업’ 같은 공공기관이나 거대 기업을 사칭합니다. 그냥 사칭하면 안 믿죠. 그래서 뭘 합니까? ‘지금 울산 화력발전소 붕괴 사고 현장입니다!’처럼 실제 재난이나 행사를 엮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사이렌 소리? 그거 유튜브에 1시간짜리 ‘긴급 상황 효과음’ 널렸습니다. 아무튼! 이 ‘권위’라는 계란물이 발리는 순간, 피해자는 ‘아, 공무원이 바쁘구나’, ‘진짜 급한 일이구나’ 하고 의심을 싹 거둬 버립니다.”
“아...”
“정신 차리고 들으세요. 이제 핵심입니다. 3단계! ‘갈고리(The Hook)’! 드디어 ‘빵가루’를 묻힐 차례입니다.”
“빵가루...”
“놈들은 이미 ‘소화기 150개’라는 거대한 밀가루와 ‘소방본부’라는 계란물에 흠뻑 빠진 불가사리님에게 다시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아주 뜬금없는 요구를 하죠. ‘아, 근데요! 저희가 지금 〈특수 내화 소화포〉가 급하게 필요한데...’, ‘아, 서장님이 드실 〈고급 와인〉이 필요한데...’ 이게 바로 빵가루입니다. 기존 주문(돈까스)과는 하등 상관없는 물건(빵가루)이죠. 하지만 이미 불가사리님은 1,200만 원짜리 돈까스를 머릿속으로 다 튀기고 있단 말입니다!”
“크윽...”
“자, 이제 튀길 차례죠? 4단계! ‘송금(The Scam)’! 드디어 불가사리님의 통장을 끓는 기름에 튀겨버리는 단계입니다.”
“튀... 튀겨요?”
“놈들의 혓바닥 1,200cc짜리 핑계가 나옵니다. ‘아, 지금 행정망이 마비돼서 결제가 안 됩니다’, ‘법인카드가 갑자기 정지됐네요!’ 그러면서 결정타를 날리죠. ‘사장님이 일단 그 〈특수 소화포〉 대금 900만 원을 A 업체(당연히 대포통장이죠)로 먼저 쏴주세요. 저희가 아까 소화기 값 1,200만 원이랑 합쳐서 2,100만 원으로 바로 이체해 드릴게요!’
하! 불가사리님. 이게 바로 ‘매몰 비용의 함정’입니다. 1,200만 원짜리 돈까스를 먹기 직전인데, 900만 원짜리... 아니, 그냥 콜라 한 잔 시켜 달라는데 그걸 거절하겠어요? 이미 눈앞의 돈까스에 눈이 멀어서 ‘네!’ 하고 900만 원을 끓는 기름... 아니, 대포통장에 냅다 들이붓는 겁니다!”
“으아아아아!”
“그리고 마지막, 5단계! ‘노쇼(The No-Show)’!”
박 변호사는 마지막 말을 힘주어 말했다.
“돈까스가 아주 바싹하게 다 튀겨졌습니다. 그런데, 먹기로 한 놈이 안 와요. 그래서 ‘노쇼 사기’입니다. 불가사리님이 900만 원을 입금한 바로 그 순간, 그놈들은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합니다. 당연히 ‘소화기 150개’를 실으러 오겠다던 트럭은? 영원히 오지 않죠. 불가사리님 손에 남는 건 뭡니까? 900만 원은 날아갔고, 1,200만 원어치 소화기는 창고에 고스란히 쌓여있고. 완벽하게, 튀김옷만 뒤집어쓰고 버려진 신세가 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나는 박 변호사의 이 완벽한 ‘돈까스 사기론’에 반박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나는... 튀겨졌다.

출처 〈광주 서구 소상공인 경영지원센터〉 (링크)
5장: 왜 당하는가? 그리고 나는...
“크윽... 하지만! 사람 목숨이 달렸다는데! 소방관이라는데! 어떻게 안 믿습니까!”
“그게 이 사기의 핵심입니다. 불가사리님은 두 가지 함정에 동시에 빠진 거예요.”
박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첫째는 ‘매몰 비용의 함정’이다. 이미 ‘소화기 150개’라는 거대한 수익을 눈앞에 뒀기 때문에, 그 거래를 깨기 싫어서 ‘900만 원 대리 입금’이라는 비상식적인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권위와 긴급성의 함정’이다. ‘소방관’이라는 공적 권위와 ‘화재 현장’, ‘사람 목숨’이라는 긴급성이 합쳐져, 피해자의 이성적인 판단 회로를 완전히 마비시킨다.
“결론적으로, 피해자의 ‘절박함(큰 장사를 하고 싶은)’과 ‘선의(사람을 구해야 한다는)’를 동시에 이용하는 최악의 사기죠. 특히 불가사리님처럼 ‘한 방’을 노리고, 귀가 얇고, 남의 말을 잘 믿는 타입이...”
“그만! 그만!!”
나는 어머니의 텅 빈 통장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나는 사람을 구하는 영웅은커녕, 어머니의 가게를 나락으로 빠뜨린 불효자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딴지의 수많은 자영업자 ‘대표님’들. 명심하시라. 모르는 번호로 오는 대량 주문, 그리고 그에 딸려 오는 ‘대리 입금’ 요구. 그것이 소방관이든, 경찰이든, 군인이든 상관없다.
100% 사기다.
‘불가사리의 법률 대모험’은... 내 빚과 함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발!)
다음 싸움은, ‘리딩방 사기’입니다.
(이 글은 본문 내 기사의 실제 사건과 전문가의 의견을 토대로, 극적으로 가공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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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태 변호사 keith@hjlaws.com
편집: 이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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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마성의불가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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