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진출
지금은 K-pop 가수가 일본의 오리콘 차트 정상을 손쉽게 점령하지만, 2000년 초까지 일본 음악시장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처럼 여겨졌다.

일본의 음악산업은 1억이 넘는 인구의 내수시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본력과 판매량, 공연 규모 면에서 한국보다 저 멀리 앞서 있었다. 빌보드에 이어 세계 2위 음반시장을 보유한 일본의 오리콘은 한국 가수들에게 매력적인 도전 대상이었다. 그곳에서의 성공이 곧 아시아를 점령하고 빌보드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SM은 S.E.S.의 기획 단계부터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한국 최고의 아이돌 H.O.T.가 아닌 S.E.S.부터 일본 진출을 시도했을까? 보이 그룹의 경우 병역 문제로 해외 활동에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병역의무 대상자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국외 여행 허가를 받아야 했던 점을 생각해 보면, 시간과 비용 면에서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해외 활동은 걸 그룹보다 리스크가 컸다.

일본 데뷔 싱글〈S.E.S - めぐりあう世界〉 앨범 재킷(좌)
일본 진출 기사 〈경향신문〉 (우)
1998년 1집 활동을 성공리에 마친 S.E.S.는 일본 진출을 선언하고 현지 회사 ‘스카이플래닝’과 3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소니 뮤직과 계약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과거에도 일본에 진출한 가수들이 있었지만, 성인을 타깃으로 하거나 일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한국보다 아이돌 산업이 발달한 오리콘에 10대를 겨냥한 가수가 정식 데뷔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S.E.S.의 일본 진출은 실패로 평가받았다. 약 2년간 정규 앨범 2장, 싱글 7장을 발표하며 활동했지만, 상업적 성과는 미미했다. 일본 소속사 스카이플래닝은 주로 배우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곳으로 가수를 지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슈를 제외한 멤버들의 언어 장벽으로 인해 그들의 매력을 제대로 어필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특히 일본 최정상 걸 그룹 ‘SPEED’를 벤치마킹하고 일본에서 제작한 음악을 부르는 한국 걸 그룹은 현지 팬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주로 라이브 무대가 많은 일본 활동 덕분에
실력이 향상되어 돌아왔다. 일본 싱글곡을 모아 발표한
〈S.E.S 4.5집 - 꿈을 모아서〉 앨범 재킷
그래도 얻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차후 SM 일본 진출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남소영과 김영민을 이때 만났고, 일본 진출 실패의 시행착오는 시장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고생했던 S.E.S는 인기와 영향력에 비해 국내 활동이 적었고, 그로 인한 팬들의 원망과 비난은 고스란히 회사와 이수만 대표에게 돌아갔다.
중국 진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권 진출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다. 중국 본토는 공산국가로 사실상 장막에 가려져 대중문화 교류가 제한적이었다. 경제적 수준이 비슷하거나 한국보다 시장이 큰 곳에서의 성공이 인정받던 시기였기에 동남아권 진출은 논외의 대상이었다.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 정도를 중화권 진출로 여겼으며, 자력 진출보다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현지에서 인기를 끌어 강제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대만 공연 개런티가 ‘마이클 잭슨’과 같았다는..
〈클론 2집 - 도시탈출〉 앨범 재킷
클론의 경우 대만 여가수 ‘YUKI’가 2집 수록곡 〈도시탈출〉을 리메이크해 대만 차트 12주 연속 1위를 기록했는데, 원곡의 인기도 자연스럽게 상승하며 예상치 못한 진출 기회를 얻었다. (무단 리메이크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나고 유쾌한 한국에서의 이미지와 달리 차분한 분위기의 곡 〈빙빙빙〉이 엄청난 사랑을 받아 대만에서 국빈급 대우를 받는 스타로 성장했고, 그 인기는 중화권으로 확산되었다
1997년 홍콩 반환을 계기로 중국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본토에도 자본주의의 바람이 불어오며 주변국의 드라마들을 수입해 방영하기 시작했다. 1999년 중국으로 수출된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의 인기로 주인공 안재욱이 중국 진출을 하게 되었고, 가수 활동을 병행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가수 겸 배우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중화권 최고의 슈퍼스타 유덕화, 장학우, 여명 등과 같은 만능 엔터테이너 포지션이었기에 더욱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남자들 머리에 젤 많이 발랐다.
〈안재욱 1집 - Forever〉 앨범 재킷(좌)
드라마의 역할이 현실로 이어진 ‘안재욱 신드롬’(우)
물론 안재욱은 한국에서도 스타였지만, 중국에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인기를 누렸다. 그의 콘서트에 5만 명 이상이 운집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선보였다. 그 결과 한국 기업의 현지 광고 모델로 활약하며 드라마, 공연을 통한 직접적인 수익 창출 가능성을 확인한 제작자와 투자자들이 본격적으로 중국 공략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나이키를 비롯한 서구 문화를 동경하고 자본주의의 맛을 경험한 중국의 청소년들은 가까운 나라 한국의 대중문화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1세대 중국 진출 아이돌 NRG
중국 진출 앨범 재킷 〈QQ뮤직〉 (좌)
베이비복스(우)
1998년 한중 수교 6주년 기념 축하 공연을 계기로 ‘NRG’가 현지의 좋은 반응을 얻으며 중국에 진출했고, '베이비복스'도 중국 음반 라이센스 계약 체결을 시작으로 중화권을 공략하며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권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중국 청소년들은 한국 아이돌의 화려한 무대와 비주얼에 열광했다.

최초로 ‘한류’라는 단어가 등장한 H.O.T.의 북경 콘서트
〈H.O.T. - 무광십색북경2000〉콘서트 실황 앨범 재킷
이 열기는 2000년 한국 가수 최초로 중국 베이징공인체육관에서 열린 H.O.T.의 단독 콘서트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만여 명이 운집한 이 공연이 끝난 직후 중국 대중매체들은 최초로 ‘한류’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한류(韓流) 풍폭!!!”이라는 헤드라인의 특집기사를 게재하며 한류가 몰아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의 청소년들은 한국 가수를 따라 머리를 염색하고 춤을 커버하는 등 단순한 공연을 넘어 중국 내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를 불러왔다. 특히 한국 가수를 지망하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글로벌 오디션에 지원하는 지망생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1세대가 겪은 시행착오는 시장의 한계성도 드러냈다. 14억 인구라는 엄청난 내수시장을 가진 중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매력적인 곳이었지만, 체계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H.O.T.는 1998년 정식 출판 경로를 거쳐 음반을 발표했지만, 중국 내 불법 음반을 막을 수 없었다. 현지에서 10만 장이 판매되었는데 SM 계좌에는 250만 원 정도만 입금되었다고 한다.
시장을 개척하다시피 진출하면서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안재욱, NRG, 베이비복스도 큰 인기를 바탕으로 국빈급 의전을 받았지만, 정작 공연 개런티나 광고 모델료 등을 지급받지 못하거나 현지 회사와 9:1이라는 불합리한 정산 비율을 적용받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는 SNS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국내 팬들은 한류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체감하기 어려웠고, 외국에서의 인기가 마치 부풀려진 거짓말처럼 여겨져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SM은 이러한 실패들을 모아 큰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Jay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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