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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점에서 젤렌스키는 무언가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얼마 전 백악관에서 그에게는 더 이상 카드가 없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미국 행정부의 소통 채널을 통해 종전안을 전달받았다. 이번 종전안은 평화적 해결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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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엘멘도르프-리차드슨 합동 기지에서 만난 트럼프와 푸틴

출처 〈조선일보〉 (링크)

 

전쟁 4년 차에 접어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군은 도네츠크주의 도시 포크로우스크에 병력을 집중해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있다. 도시의 대부분은 러시아군이 이미 점령했으며, 약 10% 남짓한 지역만을 우크라이나군이 사수한 채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포크로우스크는 우크라이나에게 목줄과 같은 곳이다. 규모만 보면 인구 약 6만 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주변에 석탄 등 광물 자원이 매장되어 있고, 무엇보다 철도 요충지라는 점에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곳은 루한스크, 도네츠크뿐 아니라 수도 키이우까지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 지점이 무너지면 도네츠크주 전체가 러시아 손에 넘어가는 것은 물론, 키이우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군은 2024년 8월부터 극심한 교전을 이어 왔다. 현대판 스탈린그라드에 비유될 정도로, 양측은 건물 하나하나를 두고 ‘혈투’를 반복하며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 전황만 놓고 보면, 도시의 주인은 조만간 러시아로 결정이 날 것 같다. 이 전투가 결말에 이르면 젤렌스키 정부는 더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트럼프 젤렌스키를 압박하다

 

올해 초 젤렌스키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부터 정세는 기울고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바이든 정부는 달랐다. 우크라이나를 더 이상 ‘지원의 대상’이 아닌 ‘정리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이 부통령 J.D. 밴스다.

 

“평화와 번영의 길은 아마도 외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부통령이 ‘협상’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젤렌스키는 즉각 반응했다.

 

“밴스, 당신이 말하는 외교가 뭘 의미하는 겁니까?”

 

젤렌스키는 정치적 수사를 걷어내고 직설적으로 반박했다. 그 역시 정치인이었기에 숨어있는 맥락을 읽어낸 것이다. 광물 협정은 이제 뒷전이 됐다. 미국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생각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발언이었다.

 

트럼프는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그의 발언에서 의중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리석은 대통령(바이든) 때문에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3,500억 달러나 쏟아부었다.”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해 노골적인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지원으로 유지된 전쟁이며, 이는 단순히 무기 지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공무원 월급과 연금 지급조차 미국과 유럽의 지원 없이는 어려웠다. 2023년부터 이러한 상황에 내몰린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의 최대 ‘돈줄’이 미국이었고 미국의 지원 없이는 포탄 한 발도 쏠 수없는 것이 지금 우크라이나의 상황이다. 결국 지난 8월 15일 알래스카에서 트럼프와 푸틴이 회동해 종전 방안을 논의했고, 그 결과로 제시된 28개 항의 평화안은 우크라이나로서는 사실상 항복문서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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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리 예르막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장(좌)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우)

출처 〈글로벌이코노믹〉 (링크)

 

평화안에는 러시아가 요구해 온 추가 영토 양도와 전선 동결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군을 60만 명 수준으로 제한하고 중·장거리 무기 제한과 비핵화, 나치 이념 및 활동 금지, 그리고 나토(NATO) 가입을 포기하고 이를 헌법에 명시할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및 정치 체제 관련 조항까지 들어가 있다. 아무리 전쟁으로 어렵다고 해도 한 나라가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이 안대로라면 원래 우크라이나 영토의 5분의 1을 빼앗기게 된다. 이 국면에서 나온 젤렌스키의 발언을 보자.

 

“우크라이나는 국가의 존엄성을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핵심 지지자를 잃을 것이냐 하는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전쟁을 치르면서도 유지해 온 그의 정치적 자존심이 크게 흔들린 셈이다.

 

트럼프는 10월 가자지구 전쟁에서도 휴전 합의를 이끌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중재 역할을 과시했다. 트럼프의 휴전안에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동의했으니, 트럼프의 공이긴 하다. 이 합의가 노벨평화상 발표 전날에 딱 맞춰 이루어진 것이 무척 공교롭지만, 그의 공인 걸로 치자.

 

“역사상 누구도 이렇게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노벨위원회는 여전히 나에게 평화상을 주지 않을 이유를 찾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트럼프를 보면, 그의 노벨평화상에 대한 욕망은 노골적이라는 표현도 한참 모자라다. 결국 노벨평화상은 트럼프에게 가지 않았고 세계 평화를 위한 그의 영명한(?) 전쟁 중재는 우크라이나를 향하게 됐다. 트럼프식 ‘밀어붙이기 중재’의 다음 타자라고나 할까. 우크라이나 중재안을 보면 전투 중단, 전후 복구 자금 조달, 트럼프 본인을 의장으로 지정한 평화위원회 설치 등 가자지구 합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구조다.

 

“어느 시점에는 젤렌스키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발언으로 젤렌스키를 압박했다. 게다가 11월 27일, 미국 추수감사절을 평화안 수락의 최종 시한으로 제시했다. 미국 정치 일정에 맞춰 평화안을 받아들이라는, 오로지 트럼프 자신의 업적 과시를 위한 것이었다.

 

 

젤렌스키에게 남은 선택지

 

젤렌스키가 최종 시한을 넘길 수도 있지만 트럼프의 중재안을 전면 거부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당장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전쟁 자체를 수행할 수 없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처지다. 이 상황에 젤렌스키 개인을 둘러싼 부패 의혹까지 더해지며 그의 협상 여지는 더욱 좁아졌다. 적어도 미국이 옆에 있어야 평화안에 대한 수정이나 협상이 가능할 테니 트럼프를 쫓아갈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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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FP〉 (링크)

 

‘내정 간섭’에 가까운 몇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항거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협상을 이어갈 것이고, 러시아는 영토 조항과 나토 가입 포기 등의 핵심 쟁점을 제외하고는 수긍하는 척 협상에 응할 것이다. 

 

그렇게 줄다리기라도 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이 협상안의 핵심 쟁점을 받아들이는 순간 젤렌스키의 정치적 생명은 사실상 종료된다. 우크라이나 역시 상당한 혼란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EU는 이미 올해 초에 우크라이나 재건 비용을 5,240억 달러로 추산했으며, 현재는 10년간 약 6천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는 전쟁 이전 우크라이나 국내총생산(GDP)의 약 3배 수준이다.

 

여기에 해외로 빠져나간 우크라이나 청년층의 귀환에 대한 보장도 없고 젤렌스키 이후의 우크라이나 국내 정치 혼란, 러시아의 정치 공세까지 고려하면 전쟁이 끝난다 하더라도 이후 국가 재건은 더욱 난관에 직면할 것이다.

 

이 상황은 우리의 아픈 기억인 6·25 한국전쟁 당시 한국이 처했던 구조와 크게 닮아있다. 그때의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현재 모습은 너무도 흡사하다. 미국의 지원으로 싸웠던 전쟁이었기에 미국이 지원을 철회하려는 순간부터 한국 정부의 발언권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며 혼자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나섰지만, ‘돈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국제정치에서 정의나 도덕은 ‘사치’라는 것을 사실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결국 푸틴은 크름반도로, 육지로 연결되는 회랑을 확보했고,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등 친러시아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할 최소한의 근거를 마련했다. 2014년 돈바스 전쟁으로부터 이어진 11년의 긴 전쟁이 마침내 그 끝을 향해 가는 것 같다.

 

“정의로운 전쟁보다는 비겁한 평화가 낫다.”

 

이 말의 무게를 다시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다.

 

트럼프는 유럽을 배제한 채 독단으로 러시아와 협상에 나서며 유럽 내부에, 미국에 대한 ‘의구심’을 남겼다. 향후 유럽 국가들은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 독자적인 군사력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 수단 확보에 열을 올릴 것이 확실해졌다. 트럼프가 이번처럼 유럽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협상을 진행하는 방식을 계속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유럽은 자신들의 안보가 걸린 문제임에도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되었고, 이는 미국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이어졌다. 하긴 한 30년 동안 미국 뒤에서 안보를 의존하며 편승해 온 것을 생각하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유럽이 이제야 독자노선을 모색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트럼프의 독단이 오히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을 멀어지게 만들면서,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점점 쪼개져 나가고 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다.

 

추신: 이와중에 우크라이나 정부가 미국이 중재한 러시아와의 평화협정에 동의했다는 속보가 나왔다. 이 건에 대해서는 조만간 또 해설을 쓰겠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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