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아의 오리콘 정복
SM 엔터테인먼트는 H.O.T., S.E.S., 신화, Fly to the Sky 등 1세대 아이돌 그룹의 성공과 코스닥 상장을 기반으로 해외 진출이라는 목표를 구체화했다. 회사는 이들의 성공에 힘입어 30억 원 규모의 ‘신비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최연소 가수 보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보아 1집 - ID;Peace B〉 앨범 재킷
2000년, 만 13세의 나이로 1집 〈ID; Peace B〉를 발표하며 데뷔한 보아는 초등학생 가수라는 소문만으로 이미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1집은 큰 화제성에 비해 흥행에는 실패했다.
보아에게는 SM 연습생 중 유일하게 일본어 수업, 유명 작곡가 투입, 강제규 감독의 뮤직비디오 등 파격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회사의 최고 가수가 아닌 신인에게 30억 원이 투입되자 다른 팀 팬들은 역차별을 느꼈고, 이 때문에 보아는 데뷔와 함께 엄청난 안티팬을 맞이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들의 세계에 뛰어든 보아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돈만을 쫓는 듯한 이미지의 이수만에 대한 거부감까지 불러일으켰다. 특히 H.O.T.의 해체 시기와 맞물리며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어린 보아는 흥행 실패보다 도를 넘어선 악성 루머와 안티팬들의 공격을 감당해야 했다.
비록 한국에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지만, 한국 활동은 애초 일본 데뷔를 위한 포트폴리오 단계였기에, 보아는 활동 종료 후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오리콘 데뷔를 준비했다. S.E.S.의 현지화 실패를 발판 삼아, 정식 프로모션을 진행했고, 데뷔 전 방학 기간에 일본 어학연수를 보내 의사소통 능력을 확보했다. 향후 직접 매니지먼트와 마케팅을 위해 에이벡스, 요시모토 흥업과 함께 현지 법인 SM 재팬을 설립했다.

일본 데뷔 싱글 〈ID;Peace B〉 앨범 재킷(좌)
두 번째 싱글 〈Amazing Kiss〉 앨범 재킷(우)
하지만 야심 차게 오리콘에 데뷔한 보아의 초기 싱글들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동시에 이수만 대표가 연예계 홍보비 상납 사건과 횡령, 배임으로 인한 수사 대상에 오르는 악재까지 겹쳤고, 보아는 한국 대중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져 갔다.

네 번째 싱글 〈LISTEN TO MY HEART〉 앨범 재킷(좌)
일본 첫 정규앨범 〈LISTEN TO MY HEART〉 앨범 재킷(우)
2002년 1월, 일본 활동을 마무리할 시기에 발표한 싱글 〈LISTEN TO MY HEART〉를 휴대폰 CM송으로 사용된 광고가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마침내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사실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국내 2집 준비를 위해 귀국했던 차에, 이 싱글이 20만 장 가까이 판매되며 오리콘 일간 차트 3위, 주간 차트 톱 5에 진입하자, 보아는 급히 일본으로 돌아갔다.
계획은 전면 수정되어 한국 앨범 발매를 미루고 일본 정규 1집을 발표했다. 보아는 한국 가수 최초로 오리콘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고, 밀리언셀러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BTS의 빌보드 1위 소식에 버금가는 엄청난 뉴스였다 〈MBC〉 (좌)
〈보아 2집 - NO.1〉 앨범 재킷(우)
일본 진출 당시 반신반의하던 여론은 완전히 역전되었고, 언론은 보아의 성공을 앞다투어 대서특필했다. 보아는 이 기세를 몰아 한국에서 발표한 2집 〈No.1〉으로 1집 때와는 확연히 다른 인기를 누렸고, 최연소 가요대상을 받으며 일본을 정복한 자랑스러운 한류 스타로 인정받았다.

보아를 시작으로 오리콘 폭격이 시작된다. 〈MBC〉 (좌)
첫 밀리언을 기록한 일본 정규 2집 〈VALENTI〉 앨범 재킷(우)
이러한 보아의 인기는 단순한 일회성이 아니었고, 일본에서 발표하는 앨범마다 오리콘 1위를 차지하는 가수로 성장했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 시기에는 양국을 오가며 활약하던 보아의 행보가 더 주목받았고, 걸어 다니는 1인 기업이라고 불릴 만큼 일본에서의 큰 성공이 화제가 되었다.
2003년 상반기에만 보아가 올린 매출이 450억 원을 넘었는데, 이는 전년도 SM 전체 매출 357억 원을 한참 뛰어넘은 수치였다. 경제 전문가들은 보아의 잠재적 경제 가치가 1조 원에 달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보아는 단순한 연예인을 넘어 양국 문화 교류의 상징이 되었고, 2003년 한일 정상회담 만찬에 참석하기도 했다.

2003년 한일 정상회담 만찬에도 참석한다.
출처 - 청와대 사진기자단
보아의 성공은 많은 제작자들을 고무시켰다. 그동안 아시아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했고, 난공불락의 오리콘을 공략하는 마중물이 되어 해외 시장의 길을 열어준 사례였다. 박찬호의 메이저 리그 입성, 박세리의 LPGA 우승을 보며 자란 ‘○○키즈’처럼, 제2의 보아를 꿈꾸는 신인들과 제작자, 투자자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속성과 장래성에 대한 불투명함이 고질병이었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었다. 이때 발 빠르게 움직인 몇몇 회사들은 우회상장을 통해 코스닥에 입성했다.
보아를 만든 SM의 기획력과 연습생 인큐베이팅 방식은 재조명받았고, 1세대에서 불안정했던 시스템은 체계가 잡히며 완성되었다. 이수만의 부재로 시작된 신인 가수로 대박(?)을 노리는 2년간의 ‘연습생 대방출 프로젝트’는 대실패로 돌아갔지만, 보아의 이른바 ‘멱살 하드 캐리’ 덕을 보며 SM은 전혀 다른 회사로의 일대 전환기를 맞이했다.

이수만 대표는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KBS〉 (좌), 〈SBS〉 (우)
보아의 국위선양급 성과로 돌파구를 찾은 이수만 대표는 9개월의 해외 생활 끝에 자진 입국했다. 2004년 9월 재판 결과 금품 제공은 혐의없음으로 인정되었으나 횡령 등의 혐의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으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당시 연예계 비리 사건은 제작자, 매니저, PD뿐만 아니라 스포츠 신문 기자들까지 30여 명이 연루된 큰 사건이었다. 함께 입건된 서세원은 당시 최고 인기 예능이자 출연 파급력이 엄청났던 〈서세원 쇼〉의 MC였다. 그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 홍보를 위해 방송국 PD와 스포츠 신문 관계자에게 홍보비 명목으로 금품을 건넨 혐의와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3억 7천만 원의 조세를 포탈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김광수 사장 역시 기획사의 소속 가수를 키워달라며 방송국 PD들에게 금품을 제공하고, 60여 차례에 걸쳐 회사 공금 46억여 원을 빼돌려 빌딩 및 주택 구입 자금 등으로 사용한 혐의로 수사가 시작되자 잠적했고, 후에 자수했다.
은모 PD는 그동안의 과도한 금품 수수와 심각한 갑질로 결국 MBC에서 퇴출당했다. 그는 1995년에도 가수 매니저 KKS 씨로부터 쏘나타 승용차를 받아 구속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남자 셋 여자 셋〉, 〈일요일 일요일 밤에〉, 〈목표 달성 토요일〉, 〈강호동의 천생연분〉 등을 연출했던 스타 PD였던 만큼 퇴출에 굴하지 않고 외주 제작사를 차려 SBS로 자리를 옮겼다. 프로그램 기획 능력만큼은 출중했던 그는 자리를 옮겨서도 〈엑스맨〉, 〈연애편지〉, 〈패밀리가 떴다〉 같은 히트작들을 연이어 제작하며 여전히 방송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뛰어난 연출력 뒤에 부정한 뒷거래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였다.
2세대 아이돌의 등장
보아의 일본 활동은 에이벡스의 후방 지원과 SM 재팬의 김영민, 남소영이 고군분투한 덕분에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지만, 국내 사정은 전혀 달랐다. 이수만이 자리를 비운 2년 사이 데뷔한 가수들의 저조한 성적이 악화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획력과 조직력이 모두 무너졌고, 소속 가수들의 재계약 문제와 그룹 해체 후 잔류한 인원들에 대한 활동 계획이 관리되지 않고 있었다.
S.E.S. 해체 후 웅진 미디어와 거액의 계약을 맺고 솔로 앨범을 낸 바다, 정해익의 새 회사로 이적하며 연기자로 변신한 유진과 달리, 홀로 회사에 남은 슈는 뚜렷한 방향성을 찾지 못한 채 ‘SM 선배’로 활동했다.

〈강타 2집 - Pine Tree〉 앨범 재킷(좌)
〈문희준 2집 -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앨범 재킷(우)
‘부자 망해도 3년 간다’라는 속담처럼 국내 최고 아이돌 멤버였던 강타와 문희준이 꾸준한 매출을 올렸지만, 그룹 시절의 화려함에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락커로의 전향을 선언한 문희준이 ‘100만 안티’를 창출(?)하는데, SM은 이에 대해 전혀 대응하지 못했고 사실상 방치에 가까운 무능력을 드러냈다.
특히 6집 활동 종료 후 계약 만료를 앞둔 신화에게 인기 멤버 위주로 차별 계약을 제안하는 최악의 방식으로 접근했고, 결국 신화는 SM을 떠났다. 이 과정에서 핵심 인력들도 이탈하게 되는데, SM 홍보 실장으로 근무했던 박권영이 ‘굿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신화와 계약한 것이다. 이후 신화는 그룹명과 상표권 문제로 오랜 시간 고생했다고 한다.
보아의 대성공과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정리한 뒤 복귀한 이수만은 애매한 위치에 있던 신인들과 자회사 간의 교통정리를 통해 연습생들을 재정비했고, 회사는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그리고 여러 팀에 분산되어 있던 데뷔 조 에이스 5명을 한데 모아 이수만 복귀 후 첫 신인 그룹을 제작했다.

데뷔 초 ‘동쪽에 방귀 뀌는 신기한 기술’이란 조롱을 받았다.
데뷔 싱글 〈동방신기 - Hug〉 앨범 재킷
동방신기는 2003년 12월 ‘보아 브리트니 스페셜’에 게스트로 출연하며 미디엄 템포의 아카펠라 곡 〈Hug〉로 데뷔했다. 팀명뿐 아니라 유노윤호, 영웅재중, 시아준수, 믹키유천, 최강창민이라는 멤버 명은 강타와 전진을 뛰어넘는 신박한 작명 센스로 대중의 비웃음을 샀다. 데뷔곡 역시 거부감이 들 정도의 달콤한 멜로디와 낯 간지러운 가사로 듣는 이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신박함은 10대에게 제대로 통했고, 팬덤을 구축하며 한국 아이돌 시장의 부활을 알렸다.
80년대생들이 서태지와 아이들과 H.O.T.에 열광했다면, 이제는 90년대생들이 자신들만의 스타를 원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동방신기였다. 동방신기는 데뷔와 동시에 팬클럽 ‘카시오페아’를 창단하며 든든한 지원군을 확보했다. 90년대에 Club H.O.T.가 있었다면, 2000년대에는 카시오페아가 가장 독보적인 팬클럽이었다. 한때 100만 대군으로 불린 카시오페아는 동방신기와 스치기만 해도 가루가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사실 동방신기는 이름만 이상했을 뿐, 외모나 실력 면에서는 청소년들이 열광할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SM 역시 초심으로 돌아가 H.O.T.의 성공 요인을 그대로 적용한 팀이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동방신기 좋아해?’가 아니라 ‘동방신기 중 누구 좋아해?’라고 묻는 것이 정설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동방신기는 제2의 H.O.T.라 불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두며 이수만의 화려한 복귀를 알렸다.
SM은 일본에 보아, 한국에 동방신기를 중심으로 향후 방향성과 해외 시장 공략 전략을 수립했다. 2005년 김경욱이 물러난 자리에 김영민이 CEO로 임명되었다. 그는 SM 재팬에서 활약했고 판당고 코리아 대표를 역임한 인물이다. CEO가 바뀌면서 지난 2년간 성과를 내지 못한 팀들은 정리에 들어갔고, 김경욱 시대의 흔적은 지워졌다.

리바이스 501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SS501 싱글 1집 - 경고〉 앨범 재킷
SM이 2세대의 시작을 알리자, 라이벌 DSP가 발 빠르게 반응했다. 2005년 DSP는 ‘플러스 1’ 전략이 아닌 동일한 5인조로 SS501을 데뷔시키며 다시 한번 SM 대 DSP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냈다.
비록 최근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데뷔 전 선행 프로그램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 ‘M! Pick’에 출연하며 팬덤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이호연 사장의 뛰어난 비즈니스 능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전통적인 DSP의 강점인 믿고 보는 외모, 히트 작곡가에게 받은 곡, 적절히 준비한 안무라는 스피드 전략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대항마로 성장했다.

무엇이든 설득되는 리즈 시절 김현중의 외모를 보라.
출처 - 온라인 커뮤니티(링크)
하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가수로 평가하기에는 음악적 이력이 부족했고, 실력을 논하기에는 기억에 남는 무대나 노래가 없었다. 물론 〈암욜맨〉이 상당한 중독성을 보여주긴 했다. 결국 SS501은 가수라기보다는 종합 엔터테이너 그룹을 지향하는 쟈니스 방식의 아이돌로 보는 편이 맞았다.

완전체 마지막 앨범이 된 〈핑클 4집 - 영원〉 앨범 재킷(좌)
4인조로 재편된 〈클릭비 4집 – 카우보이〉 앨범 재킷(우)
2세대 아이돌 시대가 도래하기 전, SM과 마찬가지로 대성기획 역시 암흑기를 겪었다. 갑작스러운 젝스키스의 해체로 핑클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높아졌고, 아이돌 밴드로 자리 잡아가던 클릭비는 기타와 드럼을 담당하던 멤버, 그리고 외모 담당 멤버까지 탈퇴하며 더 이상 밴드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DSP 미디어로 사명을 변경한 대성기획은 2대 기획사로 불리던 만큼 SM 못지않게 많은 인재들이 찾아왔지만, 문제는 언제나 자신의 직감에만 의존하는 이호연 사장이었다. 후속 아이돌을 내놓아야 할 시점에 뜬금없이 솔로 여가수 엄지선을 데뷔시켰으나 실패했다. 엄지선은 이후 〈그댄 행복에 살 텐데〉를 부른 리즈로 재데뷔했다. Fly to the Sky를 겨냥한 R&B 듀오 2Shai를 제작했지만 사실상 원히트 원더로 막을 내렸다.

〈엄지선 1집 - 꿈이라도〉 앨범 재킷(좌)
〈2Shai 1집 - Love letter〉 앨범 재킷(중)
〈샤인 1집 - Too late〉 앨범 재킷(우)
2004년에는 여고생 쌍둥이 R&B 듀오 ‘샤인’을 데뷔시켰으나, SM에서 비슷한 포지션으로 데뷔시킨 ‘이삭N지연’의 실패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이들 역시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건국 이래 최고의 스타성이라는 ‘이효리 신드롬’의 시작
〈이효리 1집 - 10 Minutes〉 앨범 재킷
다만 이러한 암흑기에 솔로로 나선 이효리의 1집이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며 모든 것을 만회했다. 대부분의 1세대 아이돌이 그룹 해체 후 하락세를 겪었는데, 핑클 시절의 인기를 훨씬 뛰어넘는 성공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효리는 한국의 비욘세, 제니퍼 로페즈로 불리며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회사를 떠받쳤고, 이를 발판으로 DSP는 SS501을 데뷔시키며 부활에 성공했다.

시작은 12명, 중간에 13명, 지금은 9명.
〈슈퍼주니어 05 - Twins〉 앨범 재킷
2005년 SM은 12명으로 구성된 초대형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를 선보이며 다시 한번 아이돌 시장의 선두 자리를 노렸다. 데뷔 초기에는 과도한 인원수에 대해 연습생 대방출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여러 드라마나 뮤직비디오를 통해 얼굴을 알린 연습생들답게 음악뿐 아니라 방송 전반에서 각자의 매력을 발산하며 인기를 얻었다.
가수로서도 빠르게 자리를 잡아 ‘카트엘’ 3대 팬덤 구도를 형성했고, 동방신기, SS501과 함께 ‘동슈501’로 불리며 2세대 아이돌을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카트엘은 동방신기의 카시오페아, SS501의 트리플S, 슈퍼주니어의 엘프를 통칭하는 용어다.
다만 인원 구성과 활동 시스템이 일본의 ‘쟈니스 주니어’를 참고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며, 여전히 일본 아이돌 산업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제기되기도 했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Jay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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