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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테이블과 전장 사이의 괴리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싸고 최근 국제사회에서는 휴전이 임박했다는 전망이 잇달아 제기되고 있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우크라이나가 평화안에 큰 틀에서 동의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남은 이견이 크지 않다며 협상이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여러 외교 채널에서 고위급 접촉이 이어지고 비공식 중재 움직임까지 포착되면서, 전쟁이 빠르게 종착점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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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소방관들이 러시아의 야간 드론

공습으로 발생한 건물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AP 뉴시스〉 (링크)

 

그러나 실제 전장의 상황은 이러한 기대와 다르다. 주요 전선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뚜렷한 우위를 점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협상이 급진전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휴전 임박설과 조기 타결 기대감이 확산되는 모습은 현실과의 괴리를 남긴다. 외교와 정치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서사가 전장의 조건과 사회적 현실을 앞서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평화는 언제나 최우선 과제다. 포성이 멎는 순간부터 비로소 인간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가 강요되거나 책임과 균형 없이 던져진 평화는 갈등을 해소하기보다 또 다른 불안을 예고하는 결과에 가깝다. 힘의 불균형이 고착된 평화, 책임을 묻지 못한 채 넘어가는 평화, 한쪽의 상실과 패배만을 남기는 평화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서둘러 타결한 합의가 당장의 폭격을 멈추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권력과 책임의 구조를 충분히 검증하지 않은 채 합의만을 주장한다면, 그 합의는 분쟁을 종식시키기보다 새로운 갈등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몇 년 뒤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현재의 협상에서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을 확보하는지, 그 결과 어떤 질서가 만들어지는지를 차분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를 향한 러시아의 전면 침공이 만 4년을 향해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제는 전쟁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과 “잘못된 평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이 교차한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24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겠다”라는 호기를 반복하며 중재 역할을 자처하자, 두 감정은 더욱 복잡하게 얽혔다. 

 

2025년 1월 트럼프 취임 이후 미국의 역할은 확연히 달라졌다. 이전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의 방어와 승리를 우선시했다면, 현재의 미국은 양측을 테이블에 앉히고 큰 거래를 성사시키는 ‘중개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드미트로 쿨레바가 지적하듯 이러한 변화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와 압박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설득과 양보 요구가 더 눈에 띄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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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시스〉 (링크)

 

 

28개 조항이 드러낸 불균형

 

이런 흐름 속에서 미국이 설계한 ‘28개 조항 평화안 초안’이 등장했다. 알려진 내용을 종합하면, 초안은 크게 네 가지 축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크름반도와 루한스크·도네츠크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통제를 사실상 인정하며, 도네츠크주 상당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명명하되 실제 관리는 러시아가 맡는 구상을 담고 있다.

 

둘째, 우크라이나군 병력을 약 90만 명에서 60만 명 수준으로 줄이고, 나토 가입을 영구히 포기하며 나토군의 영구 주둔을 금지하는 군사적 제한이 포함돼 있다.

 

셋째, 러시아에는 제재 완화, 주요국 모임 복귀, 에너지·인프라·희토류·데이터센터 등에서의 대규모 경제 협력이라는 당근이 제시된다.

 

넷째, 전쟁범죄를 포함한 광범위한 사면과 트럼프 대통령이 의장을 맡는 이행위원회 설치 등 정치·사법 분야의 조치가 포함된다. 우크라이나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알렉산드라 마트비이추크는 이 사면 조항이 수만 건의 전쟁범죄 기록을 무력화하고 향후 침략을 부추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초안이 공개되자 우크라이나와 유럽에서는 강한 반발이 일었다. 언론에서는 이를 “평화 계획이라기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구조적 항복 문서”라고 표현했다. 이후 제네바에서 열린 미·우크라 회담을 거쳐 초안은 19개 조항으로 축소되었고, 전면 사면과 같은 일부 독소 조항이 수정되었다. 병력 상한이나 안전 보장 조항 역시 완화된 것으로 전해졌지만, 돈바스 지역 구도·군축·나토 문제라는 기본 뼈대는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덜 나쁜 문서’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내용 못지않게 작성 과정 역시 논란을 키웠다. 트럼프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가 러시아 고위 관리 유리 우샤코프와의 통화에서 푸틴이 트럼프와 언제 통화해야 하는지, 어떤 칭찬부터 꺼내야 하는지, “러시아는 평화를 원해 왔다”라는 문구를 어떻게 강조해야 하는지까지 ‘짜놓은 대본’ 수준의 녹취록이 공개된 것이다.

 

그 조언대로 10월 16일, 트럼프와 푸틴의 두 시간이 넘는 긴 통화가 이뤄졌다. 통화 이전까지 논의되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토마호크 장거리 미사일 제공 계획은 통화 이후 사실상 철회됐고, 이튿날 열린 트럼프–젤렌스키 회담에서는 평화안 수용 압박이 전면에 등장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우크라이나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압박 수단이 줄어드는 동시에 자신에게 요구되는 양보의 부담은 커진 셈이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여론은 평화안을 두고 복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측근들은 크름반도와 돈바스 영토, 군 병력 축소, 나토 가입 포기라는 세 가지 사안은 ‘레드라인’이라며 후퇴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협상에 참여한 일부 인사들은 19개 조항이라는 틀 자체에는 미국과 합의가 있었으며, 우크라이나에 유리한 수정도 일부 반영되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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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이 모순은 쿨레바의 설명에서 드러난다. 그는 “키이우는 패배 직전에 몰린 것도 아니고, 주권과 영토를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다”라고 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완전한 패배나 국가 붕괴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과 유럽, 국제사회는 전쟁의 피로감을 호소하며 우크라이나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치르지만, 피로감은 외부에서 호소하는 형국이다. 이런 식이라면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어떤 문서에라도 서명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울 자리가 없다.

 

러시아는 이 상황에 한층 더 계산적인 태도를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미·우크라 문서가 “향후 평화협정의 기초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도, 우크라이나군의 추가 철수와 러시아 통제 지역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반복적으로 요구한다. 러시아 정부는 아부다비 회담에 대해서도 “기술적 검토 단계일 뿐 최종안은 없다”라고 말하며 시간을 끈다. 현재의 구조가 러시아에 그다지 불리하지 않기 때문에 전선과 협상장을 동시에 활용해 더 나은 조건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미국의 태도 또 다른 측면에서 이중적이다. 백악관과 일부 고위 관계자는 “우크라이나는 이미 평화안에 동의했고, 남은 것은 몇 가지 세부 사항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크라이나에는 “추수감사절까지 답을 달라”는 내부 시한을 정해 압박하고, 유럽에는 “평화협정이 없으면 우크라이나의 장기적 안전 보장은 어렵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평화의 내용보다 속도가 우선시되는 셈이다.

 

유럽연합과 주요 회원국들은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한다. 협상 자체와 전쟁 종식에는 동의하지만, 우크라이나 영토를 강대국이 나눠 갖는 방식에는 선을 긋는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언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도네츠크주를 러시아 관리 아래 두는 구상이 “위험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독일과 프랑스 역시 과도한 군축, 나토 불가입, 전면 사면 조항 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별도의 유럽안(案)을 제시하고 있다.

 

 

노벨상을 위한 평화, 사람을 위한 평화

 

여기서 또 하나의 변수로 떠오르는 것이 노벨 평화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해당 상에 각별한 집착을 보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유엔 연설과 기자회견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노벨상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라고 강조해 왔고, 2025년에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거듭했다. 미국과 유럽 언론은 가자지구 평화안과 우크라이나 평화안을 비교하면서, 이번 중재 시도에 트럼프의 노벨상에 대한 계산이 중요한 동기로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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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우크라이나 측도 이 심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우크라이나 정치인은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자는 제안을 공개적으로 내놓았으며, 이를 통해 트럼프가 러시아에 더 강하게 압박하고 우크라이나의 요구를 반영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 내 비판자들은 28개 조항의 구조가 사실상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하는 문서라며, ‘노벨상을 위한 정치쇼’가 평화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노벨상 변수는 평화에 기여하는 면과 방해가 되는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건 성과를 강하게 원한다는 점은, 협상 테이블을 스스로 뒤엎기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합의문을 만들어내려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24시간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라는 발언의 신뢰는 떨어지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이를 활용해 최악의 안을 피하고 차악의 안을 도출할 여지를 확보할 수도 있다. 최고 권위의 평화상을 노리는 사람으로서 최소한 국제 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평화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해 요인은 더 구조적이고 치밀하다. 노벨상이라는 상징적 목표는 평화의 ‘질’보다 평화의 ‘속도’에 더 무게감이 실린다. “올해 안에”, “다음 회담 전까지” 같은 정치적 기한은 전장의 현실, 피해자의 권리,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 문제를 쉽게 주변으로 밀어낸다. 실제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내부 시한을 제시하며 ‘합의 임박’이라는 연출을 반복해 왔고,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협상력은 약화되고 러시아의 시간 끌기 전략은 오히려 힘을 얻었다.

 

또한 노벨상을 향한 욕망은 침략국과 피해국 사이의 불균형을 흐리게 만든다. “양쪽 모두 조금씩 손해 보는 합의가 좋은 합의”라는 말은 중립적으로 들리지만, 점령한 쪽과 침공당한 쪽이 동일한 비율로 양보할 때 발생하는 불의는 모습을 감춘다. 이번 평화안 역시 러시아에는 점령지를 사실상 승인해 주고 제재 완화라는 보상을 제공하는 반면, 우크라이나에는 영토 포기와 군축, 나토 포기를 요구한다. “양쪽이 다 불만족스럽다”라는 설명으로 이러한 불균형을 덮어버리면, 결국 침략의 보상이 제도화되어 버린다.

 

또한 노벨상 변수는 외교 무대를 한 개인의 업적 쇼로 만들 위험도 안고 있다. 위트코프가 푸틴 측에 “가자 지구에서의 중재 성공을 칭찬하라”라고 조언한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푸틴은 트럼프와의 통화에서 그 지점을 추켜세웠고, 그 직후 러시아가 우려하던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 계획이 철회되었다. 이 장면은 외교가 ‘평화’가 아닌 한 지도자의 ‘이미지’와 ‘성과’를 위한 연출로 전락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노벨 평화상은 국제사회가 평화 외교의 성과를 인정할 때 떠올리는 상징적 이름 가운데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을 의식하는 마음이 실제로 폭력을 줄이고 협상을 성사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지금까지 드러난 흐름을 보면, 이번에는 그 기대가 평화의 내용을 촘촘히 하는 방향보다는 속도를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압력의 방향은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로 향했다. 전쟁범죄, 난민, 점령지 주민의 권리는 평화안 본문이 아니라 부록처럼 취급되었고, 책임과 정의, 안전 보장 같은 근본적인 질문은 뒤로 밀려났다. 그 자리에는 지도자의 이름과 경력, 국제적 영예를 둘러싼 정치적 계산으로 채워지고 있다. ‘상을 위한 평화’가 ‘사람을 위한 평화’를 잠식하는 현장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전쟁을 끝내는 문서 한 장을 서둘러 마련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것인지, 점령지 주민과 난민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우크라이나의 장기 안보는 어떤 틀로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다. 이 전쟁을 끝내는 서명이 언젠가 실제로 쓰인다면, 그 서명이 시상식 무대를 위한 장식이 아니라 전쟁을 견뎌낸 사람들의 삶을 보장하는 약속이 되도록 만드는 것, 그 지점이야말로 이번 협상의 진짜 기준이 되어야 한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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