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부터 떠돌았던 러시아-우크라이나의 평화협정 초안이 구체화됐다. 28개 조항이 언론에 하나둘씩 공개됐고, 이 평화안이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받아들일 수 없는 형태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여론은 들끓었다. 이 28개 평화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경위를 살펴보면 이렇다.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이 28개 안은 러시아 측이 작성한 것이며,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난 직후인 10월 17일 트럼프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트럼프 제시한 28개 조항 종전안, 러시아 초안 토대로 작성
출처 (링크)
국제정치에서 10대 0의 게임은 없다. 처음에는 5대 5로 시작해서 협상과 협박(?!), 타협을 통해 6대 4, 7대 3으로 조정되는 것이지, 어느 일방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협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가져가려 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적어도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택했다거나, 실리 대신 명분을 택했다는 말이라도 나와야 한다. 그러나 28개 평화안은 8대 2 정도로 러시아에게 크게 기운 문건이었다.
러시아가 내놓은 평화안을 보면, 노름판에서 벌어지는 대화와 같다.
“이번 판은 내가 다 먹는다. 싫으면 따라오든가. 너 총알 있어? 없지? 돈 놓고 돈 먹는 판에서 남의 돈으로 노름하는데, 겁나면 손 털고 나가! 그리고 미국, 그동안 뒷돈 대느라 바빴을 텐데 너도 개평 좀 챙겨. 그런데 네가 뭘 이렇게 많이 가져가려고 그래!”
“나도 그동안 우크라이나 뒷돈 대주느라 허리가 휘었어.”
“그렇다고 이렇게 많이 가져가?”
“왜? 너도 판 엎게? 엎으면 어쩔 건데? 다시 노름 안 할 거야? 여기 안 올 거야?”
“......”
이 판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것은 우크라이나였고, 남의 돈으로 노름해야 했던 우크라이나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잃게 됐다. 이 정도면 트럼프와 푸틴이 사전에 협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주요 쟁점 분석
1조부터 5조까지는 우크라이나 주권을 인정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유럽 간에 불가침 협정에 관한 내용이다. 당연한, 그저 내용에 불과하다. 러시아가 앞으로 주변과 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나토는 더 이상 확대하지 않겠다는 서약의 일종인데, 이 역시 듣기 좋은 소리의 반복이다. 긴장 완화나 기타 조항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크라이나에게 안전 보장을 약속한다는 평화협정은 ‘평화로운’ 기본 구성으로 채워져 있다.
6조부터 이야기가 구체화 되는데 우크라이나 군대의 군비 제한이 들어간다. 핵심은 군대 규모를 60만으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우리 기준으로는 많아 보이지만, 우크라이나의 영토는 한반도 전체의 3배 규모다.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된 병력 수는 100만 수준이다. 이는 한반도와 비교해도 부족한 수준인데, 한반도는 강과 산이 많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적은 병력으로도 방어전이 가능하다. 6.25 전쟁 때 한강 방어와 낙동강 방어가 그 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평지에 가깝다. 저지대 국가와 다름없으며, 평균 해발고도가 175미터 정도이다. 대부분의 국토가 평원과 고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호베를라산이 있기는 하지만 루마니아 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 전선은 사실상 개방된 상태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다면 60만 병력으로는 부족하다. 경제 상황과 별개로 적대국인 러시아와 대치하기에 60만 병력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7조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가를 헌법에 명시하는 것인데, 이는 전쟁 전부터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것으로 러시아만의 이해가 담긴 영역이다. 8조는 나토 군대의 우크라이나 주둔 금지이기에 이 역시도 러시아만의 이해 영역 안에 있다.

독일, 폴란드에 유러파이터 전투기 전진배치
출처 (링크)
문제는 9조부터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된다. 유럽 전투기를 폴란드에 배치한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이 9조는 미국이 유럽과 세계에 보내는 신호다. 현재 유럽에 주둔 중인 미군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은 독일이다. 냉전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독일은 소련, 현재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는 1차 방어선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많은 미군이 주둔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독일에만 3만 8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고 그다음으로 많이 주둔한 국가가 바로 폴란드다. 무려 1만 4천여 명이다. 이 숫자가 적어 보일 수 있지만, 미군 유럽사령부의 총 병력이 8만 4천 명이다. 독일과 폴란드에 주둔하는 미군 수가 유럽 전체의 절반을 넘는 것이다.
지금 미국에게 가장 매달리고 있는 나라가 바로 폴란드다. 우크라이나 다음은 폴란드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한국은 폴란드에 국산 무기를 대량으로 팔아치우고 있다. 그런데 이 9조에서, 미국이 폴란드에 유럽 전투기가 배치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나토 전투기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왜 유럽 전투기일까?
“응, 나는 유럽에 더 이상 끼어들기 싫어. 전쟁 나면 너희들끼리 잘 꾸려봐.”
나토로 묶여 있는 미국이 특별히 유럽 전투기라고 명시한 것은, 미국이 유럽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하고 싶지 않으며, 전쟁이 나면 유럽 국가들끼리 해결하라는 신호인 것이다.
미국의 이익 추구
10조는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한다. 지난 30년간 미국 일극 체제 안에서 누렸던 호시절은 지나가고, 평화는 공짜가 아니라는 것이 문서에 명시돼 있다. 실제로 문서에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박혀 있다. 미국이 평화 보장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고 명시돼 있는 것이다.
이는 14조와도 연결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서방에 있는 러시아 자금이 모두 동결됐는데, 이 자금 중 1천억 달러를 미국 주도의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투입하고, 여기서 나오는 수익의 50퍼센트를 미국이 가져가겠다는 내용이다. 덕분에(?) 유럽도 갑작스럽게 1천억 달러를 내놓게 생겼다.
원래 우크라이나 소유였던 자포리자 원전의 전기 역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반반씩 나눠 갖기로 했다. 내정 간섭에 관한 조항도 곳곳에 포함돼 있는데, 15조를 보면 러시아어를 제2 공식 언어로 만들어야 하고, 러시아계의 언론, 교육 및 종교 활동에 대한 제한을 철폐해야 하며, 대통령 선거를 100일 안에 치러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러시아가 선을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젤렌스키가 계엄령을 선포한 후 계속 선거를 미루고 있기는 하지만, 물리적으로 100일 안에 선거를 치른다는 것도 무리가 있고, 그것을 평화협정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더욱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영토와 전략적 요충지
현 전선 안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져간다는 내용을 차치하더라도, 영토 조항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1조의 드니프로강과 흑해 항로 보장에 관한 조항이다. 이는 역으로 해석하면 우크라이나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뜻이다. 매우 심각한.

2차 대전 당시부터, 그 이전의 역사에서도 드니프로강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크라이나는 거의 평지다. 자연적인 지형 방해물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니프로강은 전략적 방어 거점이 될 수 있다. 농지로서도 최상의 선택지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보면 이 지역의 비옥함을 극찬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흑토 지대가 드니프로강을 끼고 발달돼 있고, 여기에 이 엄청난 수량을 바탕으로 한 수로로서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북유럽과 흑해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고, 이 때문에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내륙 곳곳에 내륙항이 만들어져 북유럽 여러 곳을 연결했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이곳이 하나의 분단선이 됐다. 2차 대전 당시의 독일과 소련군처럼 이 강을 배경으로 전선이 형성되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이 멈춘다면? 이미 목줄을 틀어쥔 것이나 다름없다.
더 암담한 것은 드니프로강 상류를 벨라루스와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작정하고 우크라이나에 해를 끼치려 한다면, 수공의 위험성을 보여주겠다며 댐을 건설할 수 있다. 그리고 물이 차단되면? 농사는 물론 교통망에도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 다른 강들도 있겠지만 한계가 있다.
21조의 흑해와 드니프로강의 항로 보장은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우크라이나의 목줄을 러시아가 쥐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항로는 보장해 주지만, 이미 흑해의 제해권은 러시아가 가지고 있다. 물론 드론 등으로 러시아 흑해 함대를 노보로시스크로 후퇴시키기는 했지만,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변변한 해군 전력이 없는 우크라이나로서는 흑해 제해권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초계정이 전부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 경우 흑해를 통해 밀을 수출하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즉, 전쟁이 끝나도 우크라이나는 전쟁 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의미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포로와 민간인 송환, 전쟁 피해자 구제 대책 같은 조항은 ‘구색 맞추기 식’으로 포함돼 있다. 가장 노골적인 것은 사면 조항이다.
“전쟁 중 저지른 모든 행위에 대해 양측 지도자 및 행위자에 대한 전면 사면을 약속하고, 향후 소송 제기를 금지한다.”
이러한 내용이 명문화돼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2022년 4월에 있었던 부차 학살이 있다. 키이우 인근 소도시인 부차에서 퇴각하던 러시아군이 최소 300명 이상의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전쟁 범죄가 있었는데, 러시아가 평화협정을 맺고 모두 묵인하자고, 덮어버리자고 한 것이다.
아마도 2차 대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하고 벌인 엄청난 강간과 학살을 대충 눙치고 넘어간 것을 떠올린 것 같다. 베를린 점령 당시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독일 여성의 수만 200만 명이 넘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를린 인구의 10분의 1은 러시아인 유전자를 가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의 전쟁 범죄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유럽의 반발과 제네바 회담

미국(왼쪽)과 우크라이나 대표단이 현지 시간 23일,
스위스 제네바 미국 대표부에서 러-우 전쟁 평화안과 관련해 회담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링크)
개인적인 생각으로 큰 틀에서 이 28개 조항은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쨌든 초안이 나와야 이 안에서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겠냐는 것인데, 실제로 이 초안을 본 많은 사람들, 특히 유럽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가만히 있으니 만만하게 보는 것인지, 왜 유럽을 빼놓았는지, 돈만 내라는 것인지,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그냥 눈감고 무시하라는 것인지, 불만이 터져 나왔다.
트럼프와 푸틴이 내놓은 초안을 보고 유럽이 반발했고, 결국 제네바 회담이 열렸다. 유럽연합 및 영국, 프랑스, 독일이 참여했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장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 그리고 트럼프의 사위가 참석했다.
제네바 회담에 대해 트럼프가 나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비쳤다. 그렇게 해서 19개 협상안이 나오게 됐다.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제시한 28개 조항에 유럽이 개입하며 19개 조항으로 축소된 것은,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협상의 여지가 생겼다는 의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잃어야 할 것들의 무게는 여전히 무겁다. 전쟁은 테이블 위로 옮겨졌지만, 총성이 멈춘 자리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펜더
제보 및 연재 문의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에 대한 검색결과는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