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담을 진행한 안드레이 예르마크(왼쪽) 우크라이나 협상 대표와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출처 - BBC/로이터 (링크)
러시아가 초안을 잡은 28개조 평화협정... 이게 초안이라고 하지만, 이 평화협정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가해자가 보상을 받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했다.
둘째, 미국이 보안관이 아니라 개평을 뜯는 관전자 혹은 중재자 포지션으로 돌아섰다.
셋째,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 했다.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우선 28개 평화협정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될 러시아는 그 자체로 이 세상에 하나의 사인을 보내게 됐다.
“이기는 놈이 장땡이다. 전쟁을 일으켜도 강한 놈이 다 먹을 수 있다.”
란 신호를 전 세계에 보내게 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내용물은 좀 이상하다 해도 겉포장만은 나름 모양새를 갖췄던 게 이런 협정이었다. 힘대 힘의 논리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대외적으로 어느정도 포장은 했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노골적이다. 초안을 러시아가 작성해서 그런 건지… 그렇더라도 이걸 승인한 트럼프의 정신상태를 보면,
“어차피 사람들 알 거 다 아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하느니 대놓고 챙기는 게 낫지.”
라는 느낌이다. 지금 미국은 중국 상대하기도 바쁘고, 그 이외의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장 미중 무역협상만 보더라도 미국의 머리 아픈 상황을 알 수 있는데, 트럼프가 관세 때리며 난리를 쳤지만, 이게 부메랑이 돼서 트럼프에게 날아왔다.
중국은 연간 1억 톤의 대두를 수입한다. 전 세계 대두 교역량의 60%가 중국에 빨려 들어가는 거다. 중국은 작년에만 2천7백만 톤의 대두를 미국에서 수입했다. 이는 미국 전체 수출량의 45%에 달하는 수치다. 그런데, 미국이 관세 때리자 올 6월부터 대두 수입을 중단하게 됐고, 농민표를 생각해야 했던 트럼프는 10월 30일 김해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하고, 중국은 회담 다음부터 대두 수입을 시작했다. 트럼프로서는 모양 빠지는 상황이지만, 지금 미국과 중국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전 세계가 이리저리 촘촘하게 맞물려 있는 상황이기에 이 공급망을 살살 떼어내고 시작을 해야 하지만… 이미 그러기엔 너무 많이 와 버린 상황이다. 말로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때릴 수 있지만, 직접적인 행동으로는…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이미 미국은 유럽에서 발을 빼기 위해 간을 보고 있는 상황이고, 이게 구체적으로 28개조 평화협정안에 나왔다. 트럼프답게 개평을 뜯으려는 것도 우습지만 이 행동 자체로 미국이 앞으로 어떤 스탠스인지 명확해졌다.
이 모든 것의 총합은 미국 유일의 단극체제가 다극체제로 서서히 변해 갈 거란 사실이다.

8월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진행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
출처 - 로이터/뉴스1 (링크)
로이터 통신의 보도대로 러시아가 백악관에 쏴 준 평화협정 초안이 미국의 승인하에 우크라이나쪽으로 갔다면,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러시아에 한없이 유리한 이 평화협정을 트럼프가 왜 받았지?”
라는 의문이 든다. 놀라운 건 그 이전의 행보를 보면, 트럼프와 푸틴의 밀착행보가 계속 보인다. 한때 이걸 두고 <역(逆) 키신저 전략>이라는 평이 돌았던 적이 있다. 70년대 냉전이 한참이던 시절, 헨리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해 중국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여 소련과 중국. 둘 사이를 갈라놓았는데, 이제 반대로 러시아와 미국이 붙어서 중국을 고립시키겠다는 거다.
언뜻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트럼프가 가끔씩 러시아를 때리는 걸 보면(러시아 원유를 수입하지 말라는 발언을 보면),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결정적일 때. 바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다시 러시아 편을 들어준다.
그러면서도 이게 애매한 게 미국, 러시아, 중국의 삼각함수는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러-우 전쟁을 미국이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빨리 유럽에서 발을 빼야 하기 때문에 얼른 출구전략을 찾는 모습을 미국이 보인다면, 러시아는 어쨌든 나토의 동진을 막고 푸틴 스스로도 러시아 내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압박, 그러면서도 전쟁은 빨리 끝내야 한다는 러시아 내의 여론과도 싸워야 한다.
중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다 먹는 것도, 반대로 우크라이나가 미국을 등에 업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적당히 지금처럼 전선 유지하다가 휴전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이다.
중국의 경우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를 원치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식량안보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국산 대두 최대수입국은 중국이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 정부가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식량안보문제였다. 10여년 전만 해도 중국의 식량자급율은 90% 였는데, 이게 점점 줄어들어 70% 대까지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수입선의 다변화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크라이나가 저 꼴이 나 있는 상황이다.
국제정치적으로 봤을 때 러-우 전쟁은 중국에게 나름 안겨준 게 있었다. 당장 러시아와 서방국가들 간의 관계가 벌어지면서 러시아와 가까워졌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북극항로이다. 러시아에게 무기와 보급품 등을 건네고, 블라디보스톡을 국경 통관 절차 없이 사용할 권리를 얻게 됐다. 북극항로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서 유럽을 가는 것보다 20일 정도 더 빨리 유럽에 갈 수 있는 항로다. 여기에 중국이 한 발 걸치게 된 거다. 이전까지 러시아는 북극항로에 중국이 접근할까 견제했는데, 전쟁 중에는 뭐든 못하겠는가?

출처 - CNN (링크)
또 이 전쟁을 통해서 서방세계가 어느 정도까지 제재를 가할 수 있는가 경험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향후 있을지도 모르는 대만과의 전쟁에서 서방쪽 대응을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러-우 전쟁이 끝나길 바라고 있다. 당장 앞에서 언급한 식량수입노선의 다변화도 걸리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면 러시아 내의 푸틴의 제어력이 떨어져 내전이나 정치적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감, 또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어느 일방의 승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평화협정안처럼 적당한 선에서 러시아의 판정승으로 끝나면,
“이거 봐봐 미국도 이거 어떻게 못하잖아? 미국 패권이 이제 저물고 있다고!”
라는 정치적 사인을 전 세계에 보내면서, 나름 이득을 보겠다는 거다.
문제는 중국의 입맛대로 러시아가 중국과 보조를 맞춰주냐는 거다. 이건 누구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트럼프의 역 키신저 전략이 맞는 건지, 아니면 중국이 러시아와 협력해 어떻게 세상을 굴릴지 모른다. 다만, 트럼프가 역 키신저 전략에 들어갔다면… 이게 셈법이 복잡하다.
당장 유럽의 눈에 러시아는 ‘적’이다. 러시아의 다음 침공 대상은 유럽의 다른 국가가 될 것이란 게 일반적인 관측이고, 이 때문에 나토를 포함해 유럽 국가들이 미친 듯이 군비확충에 나섰다. 이 상황에서 미국이 러시아 편을 들어주며,
“자, 이제 중국이랑 싸울 거니까 너네 우리 좀 도와줘.”
라고 한다면, 유럽이 미국을 어떻게 볼까?
“야! 너 살겠다고 러시아 풀어놓더니, 우리보고 중국이랑 싸우는 거 도우라고? 미친 거 아냐?”
란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만약 이 상황에서 중국이 대만을 정말 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면, 적어도 미국과 유럽의 이인삼각이 삐걱거리는 걸 볼 수도 있을 거다. 벌써부터 계산이 복잡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트럼프의 지금 행보… 그러니까 러시아가 넘긴 평화협정 초안을 받은 걸 보면,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

사진 - AFP/연합 (링크)
결국 제네바 회담에서 28개 조항은 19개로 정리 됐다. 대충 큰 것만 추려보면,
“나토 확장금지? 이건 빼자. 러시아가 저러는데… 그리고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불가? 누가 나토 들어오게 한대? 이거 회원국 만장일치야. 그리고 폴란드에 유럽 전투기? 어디서 밑장빼기야! 나토 전투기 배치할래! 그리고 영토 조항… 음, 뭐 지금 러시아 놈들이 점령한 땅 다시 뺏기도 힘들고 이건 인정. 근데 60만 명 제한은 좀 그래… 우크라이나 땅이 좀 넓어? 80만명으로 조정하자.
야… 그리고 양심적으로 개평 뜯는 건 그렇지 않냐? 트럼프가 아무리 양아치라도 지 돈 한푼 안 집어넣고 수익을 챙겨? 이건 빼자. 또 뭐 남았냐? 아 젤렌스키… 선거는 어차피 치러야 하는데, 100일 안에는 힘드니까 상황 봐서 최대한 빨리 선거 치르는 걸로 하고… 결정적으로 사면 조항은 무조건 빼야 해! 우리가 다른 건 다 봐줘도 인권문제는 건드는 거 아니다! 러시아 놈들이 벌인 학살이 몇 건인데!”
대충 이렇게 정리가 됐다. 이걸 러시아가 받을지 말지는 푸틴 판단이겠지만, 적어도 유럽이 헛기침 한 번 크게 했고, 미국도 나름 성의를 표했다. 이 상황에서 어쨌든 종전까지 달려가야 했기에 미국도 수긍을 한 거다.
물론, 그렇다고 유럽과 우크라이나가 이긴 협상은 아니다. 8:2 정도의 협상이 7:3 정도로 조정 됐다고 봐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이번 협상 테이블에서 우크라이나는 호구 잡힌 게 맞고, 너나할 거 없이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혈안이 된 상황이다.
미국은 얼른 유럽에서 발 빼고, 중국과의 대결을 준비 중이고 여기서 러시아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대충 이야기가 끝난 것처럼 보인다(물론, 러시아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푸틴 마음이겠지만).
유럽도 이번 제네바 회담을 통해 나름 존재 이유를 보이긴 했지만, 미국이 유럽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를 확인했고, 이에 발맞춰 군비증강에 들어가야 할 이유를 하나 더 발견하게 됐다. 이제부터 약육강식의 시대, 다극체제로 넘어가고 있다는 건 분명해졌다.

출처 - 매일경제 (링크)
트럼프는… 아니, 미국은 이제 확실히 자신의 위치와 앞으로의 행보를 선언했다. 유럽을 정리하고, 앞으로 어지간한 지역분쟁에는 나서지 않을 것이고,
“네들 문제는 네들이 알아서 해. 난 중국 상대할래.”
라는 명백한 신호를 보냈다. 물론, 원자재부터 시작해 반도체, 농산물 등등 이리저리 얽혀있는 글로벌 공급망의 난제를 올해 관세협상과 무역분쟁을 통해서 재확인했지만, 그래도 중국을 때리겠다는 의지는 확고하단 걸 알 수 있다.
이 상황에서 확실한 건 하나다.
“젤렌스키는 끝났다.”
라는 거다. 유럽과 같이 내놓은 19개 협상안을 러시아가 받든 받지 않든 간에 젤렌스키의 정치적 생명(혹은 물리적 생명까지)은 이미 끝났고, 앞으로 우크라이나는 또 다른 ‘겨울’을 맞이할 게 확실하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드니프로 강변의 흑토지대와 수로, 자포리자 원전까지… 평화를 얻었다 하지만, 생활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궁핍해지고 위험해 질 거다. 당장 돈바스 지역의 공업단지는 어떻게 할까? 석탄산업을 기반으로 제철, 화학, 기계제작 등등 하나의 거대한 산업도시였는데… 이게 뚝 떨어져서 완전히 러시아 땅이 됐다(뭐 2014년부터 이건 우크라이나 땅이라 하기 애매했지만). 한국으로 치자면, 울산, 포항, 구미, 창원 등등이 떨어져 나간 건데… 우크라이나는 이번 전쟁으로 공업생산력, 농업생산력, 전력 생산 등등 많은 부분이 반토막 혹은 그 이하로 떨어져 나가게 된 거다.

사진 - 로이터/텔레그래프 (링크)
그리고 러시아와의 충돌을 예상해 최소 60만, 최대 80만의 병력을 계속해서 동원해야 하는 상황. 전쟁 중에 입은 인명피해는 전쟁이 끝나면 나오겠지만, 당장 우크라이나를 떠난 난민 숫자만 600만명이 넘어가고, 젊은 남자들… 그러니까 징집되기 싫어서 뛰쳐나간 남자들의 숫자는 우크라이나 생산성에 타격을 주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2022년 2월 개전 이후 18~60세 사이의 남성은 허가 없이 출국하지 못하게 했다. 징집 대상 연령도 처음엔 27세였다 점점 낮춰져서 25세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지난 8월 18~22세 남성의 국경통과를 자유롭게 했는데, 이 조치 이후 18~22세 우크라이나 남성이 폴란드에 입국한 숫자가 12배 이상 증가했다.
이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에 대해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비판여론이 많다.
“이거 허용하면 젊은 남자들 다 해외로 튈 거 아냐! 지금 전선에서는 병사가 부족해 난린데, 이거 허용해 버리면 누가 나라를 지킬 거야?”
이미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 데 UN 보고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난민 중 3~17세 사이의 연령층이 대략 14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전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학생들 숫자는 지속적으로 감소 중이고, 청년들… 그 중 남성들의 숫자는 기록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는 군대에 끌려간 것도 있지만, 군대를 피해 해외로 도피한 경우도 포함이다. 그리고 일단 해외에 나간 남성들은 돌아올 생각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해당 국가에 임시망명 신청을 하면서 어쨌든 전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고, 설사 끝나더라도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전쟁 전 한국 인구와 비슷한 5천만의 인구를 자랑하던 우크라이나가 지금은 4,13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는 통계를 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알 수 있을 거다. 더 무서운 건 그 인구의 상당수가 생산을 담당하는 젊은 층이라는 거다.
우크라이나는 지금 전쟁이 끝나더라도 패배한 게 맞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대목은 우크라이나 전쟁 다음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이건 십중팔구 한국이 어떻게든 개입이 되거나 상당히 심각한 영향을 받을 전쟁이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끝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라는 것. 이게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이다.
추신: [펜더의 국방브리핑]은 편집부와 매주 수요 연재를 약속했으나, 이 건은 시의성이 지나면 죽은 기사가 되니 빨리 올린다. 국제 정치란 게 그만큼 빨리 움직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바로 해설할 필요가 있는 사안은 속도를 더 올려보겠다.
그리고 딴지일보 이번에 "12.3 민주헌정수호 특별상" 받은 거, 계엄군이 사옥에 왔을 때부터 매일 실시간으로 분석 기사 쓴 내 공이 큰 걸로 알고 있다. 알아서 고료 잘 챙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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