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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현대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한경직 목사. 1992년,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템플턴 상(Templeton Prize)을 수상한 인물로, 국제적으로 종교 및 영성 분야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대표적 사례다.

 

참고로 템플턴 상은 1972년 미국의 투자자이자 자선가인 존 템플턴 경(Sir John Templeton)에 의해 제정된 국제상이다. 인간 삶에 대한 영적 이해와 실천에 탁월한 기여를 한 살아 있는 개인에게 수여된다. 이 상은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개신교뿐만 아니라 천주교, 이슬람교 등도 포함되며 철학자, 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도 수상해 왔다. 상금은 전통적으로 노벨상보다 많은 금액으로 책정되어 있으며 비공식적으로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전쟁 이후 혼란 속에서 교회를 재건하고 난민과 빈곤층을 위한 구호 활동과 사회봉사에 헌신해 온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특히 신앙을 개인적 경건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책임과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한 목회적 태도가 템플턴 상의 취지와 부합했다. 그의 템플턴 상 수상은 단순한 개인적 영예를 넘어 한국 기독교가 국제 사회에서 도덕적·영적 공공성을 인정받은 상징적 사건으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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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흑역사는 존재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경험이 있다. 수십 년간 비밀에 부쳐 있던 그의 과거는 템플턴 상 수상 축하 석상에서 밝혀진다. 당시 한경직 목사는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는데 그 죄를 제대로 참회하지 않았다. 일생의 짐이었는데 이제야 우상숭배의 죄를 참회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한국 기독교의 최고 원로 목회자의 친일 행적 고백은 교계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수십 년간 아무 말 않고 있다가 왜 죽음을 앞둔 노인이 되어서야 고백했을까?

 

이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 교계에서는 그를 큰 거목이자 훌륭한 지도자로 여긴다. 차차 알아보겠지만, 한경직 목사는 서북청년단을 제주에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친일 행적을 가진 이가 광복 후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면,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고한 이들을 학살하는데 일조한 이력은 고아와 과부, 굶주린 이들을 위해 노력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한경직,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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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대기를 빠르게 살펴보자. 한경직은 1902년 12월 29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기독교를 접한 뒤, 선교사가 세운 진광소학교에서 공부하고, 이어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수학, 1919년에는 평양 영성소학교에서 교사로, 숭실전문학교에서 배움을 이어 나갔다. 어릴 적부터 언어 감각이 뛰어났다고 알려진다. 영어에 능숙했고 이러한 그의 재능을 알아본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33년부터 신의주 제2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고, 1934년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9년 사회복지 성격의 기관인 보린원을 설립해 사역을 잇다가 해방 직후 정치적 긴장이 급격히 높아지던 상황에서 1945년 10월 월남했다. 그해 12월 2일 서울 저동에서 베다니 전도교회를 세우고 1946년 11월 12일 교회 명칭을 영락교회로 변경했다. 영락교회는 초기부터 서북 지역 출신 월남민(피난민) 신자들을 집중적으로 수용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피난민 구호와 복지, 교육 등 사회적 활동을 적극 전개한 교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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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31일,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시위 중인 서북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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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회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다. 27명의 성도로 시작한 영락교회는 1년 만에 1,500명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47년에는 한국 최초로 2부 예배를 도입할 만큼 교세가 커졌다. 해방 후 고아원인 영락보린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와 무연고 노인들을 돌보고, 대광중·고등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미국 선교사 밥 피어스와 함께 전쟁으로 굶주린 한반도 아이들을 돕기 위해 월드비전을 출범시켰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월드비전이다. 말년엔 본인이 이북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북한 동포들을 위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주도하여 통일 이후를 대비한 대북 인도적 지원에 앞장섰다. 실제로 1990년대 초 한경직 목사가 대표로 있는 사랑의 쌀 운동본부는 북한이 추가로 쌀을 요청할 경우 국내에서 모은 쌀을 보내줄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의 이러한 공적 이면에는 정치권과의 밀착과 보수 반공 행보라는 그림자도 존재한다. 해방 직후 그는 월남 실향민 출신의 열렬한 반공주의 목회자로 알려졌으며 좌익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극우 청년단체 서북청년회 결성에 적극 관여했다. 서북청년단은 제주 4·3 항쟁 진압에서 민간인 학살까지 저지른 집단으로 악명높았는데, 한 목사는 훗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서북청년회’를 조직했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했다”라고 회고해 자신이 이 단체의 배후에 있었음을 인정했다. 민간인 학살에 도움을 주었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모순적 행보는 신사참배는 했지만 사회적 차원의 지원활동을 하겠다는 맥락과 일치한다. 어찌 보면,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10월 유신 체제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원로 목회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72년 11월 발표된 유신지지 결의문은 “10월 유신으로 조국의 통일과 번영의 기틀을 확고히 한다”라고 밝히며 유신체제를 옹호한다. 당시에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30여 명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이 결의문에 서명한 것으로 드러났다. 훗날 일부에서는 “한경직 목사가 유신 자체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공산 세력의 어부지리를 경계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독재 권력에 협조한 한국 교회 보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비판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제 치하의 신사참배를 감행한 것도, 이승만 정권 당시 서북청년단을 제주로 보낸 것도, 박정희의 유신을 지지한 것도 표면적으로 드러난 청빈과 헌신과는 상반된다. 그는 추구하고 쌓아온 이미지와 실제 삶이 전혀 다른 인물로서, 그의 이중성은 지금까지도 개신교에 남아 있는 이중적 구조의 모순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개신교의 끝없는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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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성장 가도를 달려 온 한국 개신교는 외적으로 엄청난 교세 확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교단 분열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현재 한국 개신교 교단 수는 공식 통계로 300개를 훌쩍 넘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에 따르면, 당시 한국의 개신교 교단 수는 약 374개로 집계되었다. 이 통계에는 이단으로 분류되는 군소 집단까지 모두 포함된 숫자이지만, 교단 연합 기관에 가입된 주요 교단만 따져도 126개에 달한다는 점에서 한국 개신교의 분열상은 심각하다.

 

특히 개신교 교단 중에서도 장로교의 분열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주류를 형성해 온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간판을 내건 교단만 해도 무려 337개나 된다. 이름만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같을 뿐 서로 다른 총회와 조직을 가진 교단이 300개를 넘는다는 사실은, 한국 장로교회가 얼마나 자주 갈라져 나뉘었는지를 방증한다. 물론 이 중에 일부 사이비 성향의 군소 교단도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 결과물이 수백 개 교단으로 난립한 현실은 부정하기 어려운 한국 교회의 민낯이다.

 

장로교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입장 차이로 해방 직후 첫 분리가 시작되었다. 일제에 끝까지 항거하다 옥고를 치른 이른바 출옥 성도들 중심으로 1952년 예장 고신(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이 독립했고, 1953년에는 신학 노선 차이로 예장 기장(기독교장로회) 측이 떨어져 나갔다. 기준이 모호했다. 분명 뭔가 대단한 잘못은 한 거 같은데, 기독교는 용서의 아이콘이니 봐줘야 할 거 같고. 그런데 무작정 용서를 할 수 없으니 회개와 뉘우침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본인들은 잘못했다고 하니 가타부타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신사참배 문제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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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9월 10일, 장로교 총회 점심시간을 이용해 평양 신사에서 참배하는 장로교총회 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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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에 협력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해방 이후 “나 역시 강요 속에서 고통받았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심각한 내적 갈등과 죄책감을 안고 살았고, 또 어떤 이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더 나아가 감옥에 간 이들보다 남아서 교회를 유지한 자신들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옥고를 치른 이들의 고통과 신앙적 결단을 제도 유지의 고단함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명백한 비약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논리는 완전히 엉뚱한 말로만 치부되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 교리 자체가 이미 상식의 언어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믿으면 용서받고, 회개하면 새사람이 되며, 과거의 죄는 은혜 앞에서 덮인다는 사고방식은 도덕적 직관이나 세속적 정의 개념과 긴장 관계에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라는 교리는, 잘못의 크기나 피해의 깊이와 무관하게 적용될 수 있는 위험한 단순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기독교가 이상한 곤경에 빠진 이유다. 분명히 뭔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있었음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동시에 기독교는 용서를 말해야 했고 회개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끝까지 정죄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기에는 상처가 컸다. 회개와 뉘우침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회개가 진짜인지, 충분한지, 공동체 앞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된 판단 기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잘못은 했지만…”이라는 말이 모든 논의를 중단시키는 주문처럼 작동했다.

 

이 지점에서 분열은 필연적이었다. 기준이 없는 용서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지 못했다. 오히려 각자가 자기 나름의 정의와 자기 나름의 은혜 해석을 들고나와 상대를 판단하게 했다. 출옥 성도들은 신사참배를 신앙의 배신으로 보았고, 협력자들은 그것을 비극적 선택 혹은 역사의 강요로 해석했다. 둘 사이에는 화해를 가능하게 할 중간 언어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용서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용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두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구조는 오늘날의 친일파 논쟁과도 놀라울 만큼 닮았다. “잘못은 했지만 기여도 있었다”라는 논리는, 책임을 묻지 않기 위해 동원되는 전형적인 장치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늘 양극단으로 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식민지 협력과 군사독재라는 분명한 과오가 있음에도 경제 성장이라는 성과가 덧붙여지면서 판단 기준은 흐려진다. 문제는 공과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먼저 판단할 것인가다. 그런데 그 기준이 부재할 때, 사회든 교회든 결국 분열로 귀결된다.

 

해방 직후 장로교 분파의 시작은 단순한 교리 차이나 정치적 갈등이 아니라, 죄와 용서, 책임과 은혜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실패한 합의의 역사였다. 신사참배 문제는 하나의 계기였을 뿐이고 그 밑바닥에는 “용서는 말해야 하지만, 책임은 어떻게 물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끝내 답하지 못한 한국 교회의 구조적 취약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모호함은 이후 한국 교회가 반복적으로 겪게는 분열의 원형이 되었다.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정인영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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