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아이돌과는 거리가 먼 케이윌, 임정희 등을 제작하며 방시혁의 작곡을 자산으로 운영해 오던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첫 아이돌로 걸 그룹을 선택했다. 2012년, JYP 시절부터 인연이 있던 소성진과 협업해, 프로듀싱은 빅히트가 맡고 매니지먼트는 쏘스뮤직이 담당하는 형태로 ‘글램(GLAM)’을 제작했다.

여러모로 레전드를 찍으며 방시혁에게 걸 그룹 PTSD를 남긴 ‘글램’
데뷔 직전 그룹명과 동일한 리얼리티 프로그램까지 제작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미 대세 걸 그룹이 많았던 시기였기에 차별화 전략으로 내세운 걸스 힙합 콘셉트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정작 데뷔 후 선보인 세 곡은 힙합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휴식기에 멤버 한 명이 유명 남자 배우를 상대로 한 불륜 협박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는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했고, 팀은 그대로 해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3년간 데뷔를 준비했던 두 소속사는 쑥대밭이 됐다. 쏘스뮤직은 설립 이후 첫 제작 그룹이었던 만큼 당장 폐업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고, 글램은 데뷔 후 3년간 이렇다 할 활동이 없어 수입은커녕 제작 적자만 떠안은 결과를 낳았다. 반면 빅히트는 글램을 데뷔시킨 와중에, 2013년 처음으로 7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 제작에 나섰다.

사실 빅뱅도 데뷔 당시 밀고 나간 힙합 아이돌 콘셉트가 잘 되진 않았다.
〈방탄소년단 데뷔 싱글 - No more dream〉
역사적인 방탄소년단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데뷔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아이돌 시장의 흐름에 역행하는 힙합 아이돌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빅뱅을 롤모델로 선언했으나, 대중의 반응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특히 방시혁이 제작했다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방탄소년단’이라는 그룹명도 ‘방시혁이 탄생시킨 소년단’이냐는 조롱과 함께 시대에 뒤처진 작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최정상 보컬들의 습관과 방시혁의 멘토링을 비교하며 조롱했다.
〈MBC 위대한 탄생〉
2010년부터 방영된 〈MBC 위대한 탄생〉의 멘토로 등장한 방시혁을 향한 부정적인 밈이 이미 대중 사이에 퍼져 있었고, JYP에서 독립한 이후 메가 히트 가수를 배출하지 못한 제작자의 첫 아이돌이라는 점도 부정적 인식의 이유였다.
방탄소년단은 아이돌계에서는 힙합이라는 장르로 쉽게 섞이지 못했고, 힙합계에서는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하는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 이는 기획 초기 단계에서 RM을 중심으로 한 힙합팀 구상이 출발점이었고, 방시혁과 함께 방탄의 음악을 만들어온 프로듀서 ‘피독(Pdogg)’ 역시 힙합 기반 작곡가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초기 기획 단계에서는 ‘빈지노’, ‘베이식’, ‘아이언’ 등도 멤버 후보로 거론됐으나, 최종적으로는 아이돌 포지션에 무게를 두며 지금의 방탄소년단이 완성됐다. 무리하게 힙합만을 고집한 결과는 아니었다.

쇼미로 인정받고 아이돌이 된 경우도 있다.
〈m.net 쇼미 더 머니〉(좌)
“야 랩몬스터!” “왜 방시혁!”으로 유명한 몰카 짤(우)
2014년 이후 〈쇼미 더 머니〉가 본격적인 흥행 국면에 접어들면서 힙합에 대한 인기와 마니아층의 자부심이 결합됐고, 방탄소년단을 향한 편견은 더욱 강화됐다. RM과 슈가 모두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실력파 래퍼였지만, 간간이 회자되던 방시혁 관련 밈 탓에 대중이 편견 없이 이들의 음악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힙합 초대석 1주년 특집에 초대된 RM과 슈가를 향한 비프리의 무례한 발언, 더콰이엇 곡에 담긴 빈지노의 방시혁 디스는 당시 방탄소년단을 둘러싼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방탄을 위해 춤을 추고 해양 생물 비유 굴욕도 웃으며 받아줬다.
〈MBC 라디오 스타〉
중소 기획사라는 한계 속에서 홍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미 대형 기획사 아이돌들이 장악한 예능 프로그램에 한 번 출연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그나마 대중적 인지도가 있던 방시혁이 직접 예능에 나가 춤을 추고 곤란한 질문에도 웃으며 방탄소년단을 홍보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당시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팀에 외국인 멤버를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방탄소년단은 한국인 멤버로만 구성돼 있다는 점에서도 불리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음악 역시 유행하는 장르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뚜렷한 힙합 색채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학교 시리즈는 후에 BTS의 음악을 이어주는 세계관이 된다.
〈BTS 미니 1집 - O!RUL8,2?〉(좌)
〈BTS 미니 2집 - 상남자〉(중)
〈BTS 정규 1집 - Danger〉(우)
그럼에도 방탄소년단은 꾸준히 음악을 발표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학교 시리즈’를 완성했다. 대중의 반응은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고, 인기 아이돌이라 부를 만한 성적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회사와 가수 사이에 어떤 믿음이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를 통해 스스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미 자작곡 중심의 팀이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진정성 있는 가사는 10대들의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퍼포먼스 또한 점점 견고해졌다.
흥행 면에서는 팀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부진했지만, 작은 가능성의 신호들도 감지됐다. 당시 K-pop 한류 열풍을 타고 동남아, 유럽, 북미 지역에서 이벤트성 콘서트가 종종 열렸는데, 방탄소년단의 무대에는 예상보다 많은 현지 관객의 환호가 있었다.
예능이나 TV를 통한 홍보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만큼, 이들은 유튜브와 SNS를 통해 자체 콘텐츠를 선보이며 미래의 팬과 직접 소통했다. 이는 오늘날 ‘자컨(자체 컨텐츠)’이라 불리는 흐름의 시초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꾸밈없는 매력에 공감한 팬들이 국경을 넘어 모이기 시작했고, ‘ARMY’라는 팬덤이 형성됐다. 물론 병역 의무가 있는 한국 사회에서 미필인 아이돌의 팬덤명이 ARMY라는 점을 조롱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데뷔 초 롤모델로 언급했던 빅뱅 역시 힙합을 벗어난 음악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는 점에서 평행 이론처럼 겹친다.
〈BTS 미니 3집 - 화양연화 pt.1〉(좌)
〈BTS 미니 4집 - 화양연화 pt.2〉(중)
〈BTS 스페셜 1집 - Young Forever〉(우)
2015년, 멤버 대부분이 성인이 된 방탄소년단은 더 이상 학교 안의 10대를 노래하지 않고 청춘을 주제로 한 ‘화양연화’ 시리즈를 시작했다. 음악 역시 힙합에서 벗어나 보다 대중적인 방향으로 변화했다. 세계적 트렌드에 맞춰 팝, R&B, EDM 요소를 적극 수용했고, 보컬 멤버의 비중을 늘려 좀 더 듣기 편한 음악을 완성했다. 스타일 역시 힙합 아이돌 특유의 강한 느낌에서 벗어나 깔끔하고 댄디한 방향으로 정리됐다. 이러한 변화는 성공적으로 작용해 〈I NEED U〉로 데뷔 695일 만에 지상파 음악방송 1위를 기록했다.
특히 해외 반응이 두드러졌는데, 이른바 ‘칼군무’에 집중한 〈쩔어〉를 비롯해, 〈Run〉, 〈불타오르네〉 등 히트곡의 뮤직비디오와 퍼포먼스 영상이 해외 유튜브 리액션 채널 유행과 맞물리며 빠르게 확산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ARMY는 글로벌 팬덤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BTS 정규 2집 - 피, 땀, 눈물〉 앨범 재킷(좌)
〈BTS 스페셜 2집 - 봄날〉 앨범 재킷(우)
정규 2집 〈피, 땀, 눈물〉을 기점으로 국내 인기도 가파르게 상승하며 ‘엑방원(엑소, 방탄소년단, 워너원)’으로 불리며 3세대를 대표하는 대세 아이돌 반열에 올랐다. 해외에서도 주목도가 높아져 빌보드 200 차트에 3회 연속 진입했고, 콘서트 규모 역시 체조경기장에서 고척스카이돔으로 확대됐다. 수용 인원만 약 두 배 가까운 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업 위기설이 돌았던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매출 360억 원, 영업이익은 110억 원을 기록하며 ‘중소의 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16년 기준 3대 엔터테인먼트사의 영업이익이 SM 207억 원, YG 319억 원, JYP 138억 원이었다.
다만 이들의 세계적 인기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시기상조라는 여론도 있었다. 그간 ‘월드스타 호소인’의 사례가 많았던 탓에, 일시적 현상이나 소수 마니아층의 과대 해석 아니냐는 의견이 뒤따랐다. 하지만 2017년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톱 소셜 아티스트’ 부문을 수상하며 이러한 의구심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셀레나 고메즈 같은 슈퍼스타들을 제치고 받은 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컸다.
이는 중소 기획사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생존 전략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했다. 대형 기획사 아이돌은 기존 미디어를 통한 진입이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에 SNS 홍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자사 아티스트의 개인 활동에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싸이의 빌보드 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유튜브는 이제 빌보드 차트 집계에도 반영될 만큼 세계 음악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팀이 방탄소년단이었다. 이들은 더 이상 대중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SNS를 통해 직접 팬에게 다가가 소통하고 매력을 드러냈다. 그 결과 ARMY는 방탄소년단의 성장 서사를 함께 써 내려가는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강남 스타일〉의 빌보드 2위는
일종의 ‘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BTS 미니 5집 - DNA〉(우)
〈BTS 정규 3집 - FAKE LOVE〉(중)
〈BTS 리패키지 - IDOL〉(우)
〈DNA〉, 〈FAKE LOVE〉, 〈IDOL〉을 연이어 발표하며 방탄소년단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빌보드 핫 100 차트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단발성 진입이 아니라 기존 기록을 경신하며 인기가 거품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 시기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 참석해 K-POP 그룹 최초로 무대에 오르며, 미국 내에서 BTS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당시 공연장을 가득 채운 ARMY는 카메라가 BTS를 비출 때마다 폭발적인 환호를 보내며 단독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시상식에 참석한 현지 스타들마저 BTS의 엄청난 인기에 놀라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팬덤 문화로 여겨지던 ‘우리 ○○이 기죽이지 않기’, ‘떼창 응원’, ‘음원 줄 세우기’, ‘화력으로 투표 밀어붙이기’ 같은 문화가 해외 ARMY에게 그대로 흡수됐다는 사실이다. BTS는 ‘세계에서 가장 큰 보이 밴드’라는 수식어를 얻었고,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가요대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성장세는 폭발적이었다. 2017년 매출 924억 원, 영업이익 325억 원으로 기존 3대 기획사를 추월했고,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200 차트 1위를 달성했다. BTS 월드 투어와 재계약이 이뤄진 2018년에는 매출 2,142억 원, 영업이익 641억 원을 기록하며 상장도 하지 않은 회사의 가치가 1조 원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잠실 주경기장 5회 공연과 영국의 웸블리 스타디움을 포함한 월드 투어는, 90년대 뉴키즈 온 더 블록이나 백스트리트 보이즈, 엔싱크의 월드 투어 영상을 보며 자란 세대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후 BTS와 빅히트는 또 한 번의 도약으로 4번째 월드 투어를 준비했지만,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팬데믹으로 활동에 제약이 걸렸다. 그러나 이 위기는 또 다른 기회가 되는데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이 보이 밴드는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 즉 메시지를 노래에 담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BTS 디지털 싱글 - Dynamite〉(좌)
〈BTS 스페셜 앨범 - Life goes on〉(중)
〈BTS 디지털 싱글 - Butter〉(우)
그동안 고수해 온 한국어 가사 대신 전 세계 팬을 위해 영어 가사로 제작한 〈Dynamite〉는, 팬데믹으로 지친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당시 유행이던 뉴트로 감성의 디스코 사운드와 신나고 밝은 분위기에 희망적 가사를 더한 이 곡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핫 100 1위를 이뤄냈다. 연이어 발표된 〈life goes on〉은 한국어 가사로 빌보드 1위에 오르며, 또 하나의 ‘최초’를 기록했다. 이 분위기를 이어 발표한 〈Butter〉는 빌보드 핫 100 1위로 등장해 10주 동안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BTS의 성공은 K-POP 전체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이 만들어낸 낙수 효과는 산업 전반으로 확산됐고,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지형도 빠르게 재편되기 시작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서구권과 일본 대중문화를 벤치마킹하던 작은 나라에서, 한때는 불가능이라고 여겨졌던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작은 기획사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Jay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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