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정치에 나타난 변화
최근 한국 정치에서 갑작스럽게 보수 인사들이 여권으로 이동하고, 전통적인 이념 구도가 흔들리는 모습이 낯설게 보일 수 있다. 진보 진영 일부는 “정체성의 훼손”을 이야기하고, 보수 내부에서는 “보수의 배신자”라는 비난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이 혼란을 단순한 인사 정치나 정치공학 수준에서만 본다면, 지금 한국 정치가 겪고 있는 변화의 깊이를 놓치게 된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한국 내부의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세계 정치가 먼저 겪은 거대한 변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진보·보수 구도의 붕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오랫동안 정치의 기본 좌표였다. 경제에서의 국가 개입 여부, 복지와 시장, 변화와 안정이라는 축 위에서 진보와 보수는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하며 경쟁해 왔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확인되는 변화는 이 구도가 자연스럽게 진화한 결과라기보다, 위기 상황 속에서 기존 민주 정치가 흔들리며 나타난 붕괴의 현상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 불평등의 심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불안, 팬데믹과 지정학적 충돌이 만든 불확실성 속에서, 지구촌 시민들의 불안과 분노는 합리적 경쟁의 정치보다 감정과 선동의 정치로 더 빠르게 끌려갔다.
그 결과 기존 보수와 진보 내부의 합리적 층위가 약화되었고, 음모론과 적대적 동원, 반(反)지성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진보·보수 구도의 붕괴는 정치의 성숙으로 인한 해체가 아니라, 반이성주의가 정치의 중심부까지 파고든 결과에 가깝다.

출처-<로이터>
미국의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책임 있는 재정, 제도 존중, 보수적 국제주의라는 가치를 강조해 왔지만, 트럼프 시대 이후 극단적 선동과 음모론, 제도 경시가 정당을 잠식하며 전통 보수주의자들조차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혼란을 겪게 됐다.
프랑스에서는 한때 주변부 정치 세력이던 극우가 국가 정치의 중심으로 올라섰고,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도 기존 보수의 자리를 포퓰리즘과 반지성 정치가 대신했다. 헝가리와 폴란드 역시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지금 세계 정치의 대립선은 더 이상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차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대신, 합리주의 대 반계몽주의,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적 충동이라는 새로운 축이 정치 공간을 재편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전환이 진보·보수의 발전적 통합이 아니라, 위기와 불안 속에서 등장한 정치 질서의 시험대라는 점이다.
새로운 정치의 대립축 : 합리와 반지성
오늘날 세계 정치의 균열은 단순한 이념 대립을 넘어,
‘사실과 제도에 기반한 합리 정치’
vs
‘감정 동원과 신념 체계에 기댄 반지성 정치’
사이의 충돌로 점차 구조화되고 있다.
반지성 정치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불안과 위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정치의 한 형태다.
합리 정치는 제도와 법의 틀을 존중하고, 정책을 증거와 데이터, 책임과 절차 위에서 다룬다. 이는 민주주의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지탱하는 긍정적 정치이며, 복잡한 사회 문제를 냉정한 토론과 점진적 조정으로 풀어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와 위기의 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경제적 불안, 사회적 양극화, 기술 혁신이 만들어낸 불확실성 속에서 시민들은 느린 합의와 절제된 언어보다 즉각적인 위로와 단순한 해답, 강한 확신을 제시하는 위계 정치에 더 쉽게 끌리게 된다. 이 지점에서 감정과 신념을 앞세운 정치가 급부상하고, 합리 정치는 시대의 불안을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느리고 신중한 정치로 오해되기 시작한다.

지난 9월,
영국에서 일어났던 극우 집회
출처-<연합뉴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 반지성 정치가 대부분 ‘극우’의 얼굴로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전통 보수 정치와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는 역사적 보수주의가 중요하게 여겨온 질서, 책임, 절제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전통 보수주의자들조차 자신이 속해 있던 공간을 낯설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 정치, 같은 길 위에 서다
한국 정치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 한국의 보수 공간은 더 이상 전통적 보수 가치와 같은 층위에서 논의되기 어렵다. 책임, 제도 존중, 안정이라는 보수의 고전적 덕목 대신, 극단적 동원, 음모론, 감정 정치가 장기간 보수 진영의 중심을 차지해 왔다.

결과적으로 보수 내부에서조차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졌고, 합리적 보수 인사들은 ‘자신이 속해 있던 진영이 과연 여전히 보수인가’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 지점에서 한국 정치의 대립축 역시 전통적 ‘진보 대 보수’라는 오래된 구도에서 벗어나, ‘합리 대 반지성’이라는 새로운 축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최근 여권이 전통적 보수 출신 인사들을 잇달아 영입하고 협력의 문턱을 낮추는 움직임 역시 단순한 정략적 조합이나 인물 영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특정 정당에 누가 서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기본 구조를 다시 세팅하려는 움직임으로 읽을 수 있다. 합리 정치의 복원, 민주주의 제도의 정상화, 그리고 극단적 반지성 정치와 결별하려는 방향 설정이 그 기저에 놓여 있다.
유럽이 먼저 경험한 정치의 재편 : 프랑스·독일·영국의 경우
프랑스는 지난 10여 년 동안 극우 정치가 어떻게 주변부 세력에서 제도권 중심으로 진입하는지 그 과정을 거의 전형적으로 보여준 나라다.
국민연합(RN)은 한때 프랑스 정치의 ‘금지 영역’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이민, 치안, 세계화 이후의 불안이라는 감정의 지점을 파고들면서 점차 대안적 집권 세력으로까지 상승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정치의 전통적 좌·우 구도는 크게 흔들렸다.
프랑스 극우의 대표주자인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
출처-<AFP>
흥미로운 점은 그 반작용이었다.
극우의 확장 앞에서 전통 보수와 중도, 그리고 일부 진보 세력까지가 “공화국의 규칙을 지키는 세력”이라는 더 근본적인 기준 아래 서로를 묶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치에서 종종 반복되는 ‘극우 저지 연대’는 단순한 선거 전술이 아니라, 좌·우의 차이를 일시적으로 뒤로 미루고 민주주의 규범을 공유하는 세력이 하나의 합리적 블록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프랑스의 경험은 정치가 더 이상 진보와 보수의 경쟁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제도를 지키려는 합리 정치와 반감정·동원 정치 사이의 충돌이라는 새로운 축 위에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일의 경우는 또 다른 층위가 더해진다. 나치라는 역사적 경험을 가진 독일에서 극단주의의 부상은 단순한 정치 현상을 넘어, 헌정 질서 그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
지난 9월 기사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안우파(AfD)는 반이민 정서와 음모론적 정치 언어를 결합하며 지지 기반을 넓혀왔다. 그러나 그 성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전통 보수 정당인 기독민주당(CDU/CSU)의 대응 방식이다.
독일 보수는 “같은 보수 진영”이라는 이유만으로 AfD와 손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AfD와의 협력은 넘지 말아야 할 선으로 규정되었고, 민주주의 질서를 지키는 ‘합리 보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정치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독일 정치에서는 전통 보수와 중도·진보 정당이 경우에 따라 협력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이 역시 좌·우의 대립을 넘어 “규범을 지키는 세력 대 규범을 훼손하는 정치”라는 새로운 정치 질서의 형성을 보여준다.
영국은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전통적인 양당 구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년 전부터 정치의 내부 지형이 크게 요동쳐 왔다. 그 출발점이 바로 브렉시트였다. 유럽연합 탈퇴를 둘러싼 논쟁은 좌파와 우파라는 오래된 좌표를 해체했고, 그 과정에서 UKIP(영국 독립당)와 이를 계승한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보수당의 지지 기반을 실질적으로 잠식할 정도로 성장했다.
영국 극우 정당인
‘영국 개혁당’ 대표 나이절 패라지
보수당 내부도 브렉시트 찬반으로 갈라졌고, 노동당 역시 계급과 지역에 따라 다른 선택을 보였다. 많은 관측자들이 지적하듯, 이 과정에서 영국 보수당은 점차 전통적 의미의 보수정당이라기보다 감정 동원과 강한 수사를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는 포퓰리즘 정당에 가까운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재정 보수주의, 안정적 외교, 점진적 조정이라는 고전적 보수 정치의 덕목이 약화되고, “단순하고 강한 해답”을 요구하는 정서 정치가 더 큰 공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반대로 노동당은 극단적 노선 일부를 조정하고, 제도 존중과 책임정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재정렬하려 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이 ‘극우의 외부 돌파에 맞서는 합리 보수의 방어선’을 보여준다면, 영국은 한국의 보수와 유사하게 주류 내부에까지 포퓰리즘과 반지성의 언어가 스며들고, 그에 대한 제도·합리 정치의 재정렬이 주로 중도·진보 쪽에서 시도된다는 점에서 더 닮아 있다.
이 세 나라의 경험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된 흐름이 분명해진다. 정치의 가장 강력한 대립선은 더 이상 진보와 보수의 고전적 구도가 아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제도를 존중하고 사실에 기대려는 합리 정치와, 감정과 신념, 동원과 극단을 앞세우는 반계몽 정치 사이의 충돌이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어느 한 국가의 특수 현상이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가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구조적 변화라는 점이다. 프랑스에서, 독일에서, 영국에서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서로를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고, 때로는 공동의 방어선을 형성하며 정치 질서를 재정비하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정치를 이해할 새로운 좌표 역시 드러난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재편은,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이미 세계 여러 민주주의가 지나온, 혹은 지금도 겪고 있는 그 길 위에 놓여 있다.
이재명 정부의 선택 : ‘정체성 파괴’인가 ‘정치 문명 재정렬’인가

출처-<연합뉴스>
이재명 정부의 보수 인사 영입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운 이유는 명확하다. 한국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좌표는 오랫동안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준이었다. 그런데 이 익숙한 틀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길을 잃는다.
진보 진영에서는 “왜 굳이 보수와 손을 잡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고, 보수 진영에서는 “왜 보수가 다른 진영으로 이동하는가”라는 분노가 터져 나온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전통적 정체성이 충돌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현상을 단순히 ‘정체성의 파괴’나 ‘배신의 정치’로만 읽는 것은 지금 정치의 좌표가 실제로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편은 특정 정권의 전술적 선택이나 인사 퍼즐의 조합 문제를 넘어서 있다.
이미 세계 여러 민주주의가 겪은 경험처럼, 정치의 가장 중요한 대립선이 더 이상 진보와 보수라는 고전적 이념 구도로 설명되지 않는 지점으로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민주주의에서 핵심적인 분열은 ‘누가 진보이며 누가 보수인가’라는 문제보다, ‘누가 제도를 지키고, 누가 사실과 책임의 원칙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갈라지고 있다.
감정의 동원과 음모론, 극단적 서사를 통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커질수록, 정치는 점점 합의와 토론의 공간이 아니라 동원과 적대의 전쟁터가 된다. 이 흐름이 일정 수준을 넘어설 경우, 전통적 진보와 보수 모두가 타격을 받는다. 제도의 안정 위에서 경쟁해야 할 진보도, 책임과 절제라는 정체성을 지켜야 할 보수도 함께 무너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는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같은 진영에 서야 하는 순간이 생긴다. 그것은 이념적 유사성 때문이 아니라, 공유하는 규범이 같기 때문이다.
선거의 규칙을 인정하고, 국정을 사실 위에서 운영하며, 정책을 책임 있게 관리하려는 세력끼리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같은 민주주의의 울타리 안에 서게 된다. 반대로, 감정의 정치와 반계몽의 정치가 제도 위에 올라타기 시작하면, 그 순간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사라지고 “합리 대 반합리”, “민주 대 반민주”라는 훨씬 근본적인 대립이 남는다.
이념의 싸움에서, 의사결정의 싸움으로
정치 질서가 재정렬되는 순간은 언제나 소란스럽다. 익숙했던 언어가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오래 믿어왔던 구분선이 흐릿해질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그 혼란은 종종 새로운 정치 문명을 향해 넘어가는 관문이 되기도 했다. 과거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이 그 문턱을 통과하며 확인한 것은, 정치가 스스로를 구분하는 방식이 바뀔 때 민주주의의 내용 역시 성숙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 정치도 지금 그런 지점 위에 서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전통적 지도 위에서는 더 이상 현재의 갈등과 재편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 대신,
“제도를 지키는가?”
“권력을 위해 제도를 소모하는가?”
“사실 위에서 통치하는가?”
“신념과 감정으로 국가를 끌고 가려 하는가?”
라는 훨씬 본질적인 질문이 정치를 가르고 있다. 누가 어디에 서느냐는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드러날 것이다.

출처-유튜브 <이재명>
지금의 변화가 일시적인 정권 운영의 전술로 남을지, 아니면 한국 정치의 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될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국 정치가 더 이상 과거의 좌표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가 다시 원칙과 규범을 중심으로 정렬될 수 있다면,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새로운 방식으로 공존하는 공간이 열릴 수 있다. 반대로 이 변화가 감정의 정치를 자극하는 또 다른 재편으로 흘러간다면, 지금의 혼란은 단지 더 큰 혼란의 예고편에 그칠 것이다.
선택은 정치의 몫이고, 판단은 시민의 몫이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지금 한국 정치가 직면한 문제는 한 정권의 흥망이나 특정 인물의 이해관계를 넘어선다.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성숙할 것인가, 앞으로 어떤 정치 문명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미래를 규정하게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자아와 타자 간 상호성의 중심을 합의에 두느냐 위계에 두느냐에 따라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했다. 다만 합의와 위계의 방식과 내용에 따라 진영이 늘 바뀌어 온 것뿐이다.
지금 세계의 보혁 갈등은 어쩌면 과거처럼 분배, 시장과 국가의 역할, 복지와 경쟁 같은 정책 내용의 차이보다, 합리적 의사 결정 구조냐 반이성적 동원 구조냐라는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정책의 차이를 넘어, 민주주의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할 것인가라는 더 깊은 차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정치의 내용이 아니라 정치의 형식이 시대를 나누고 있다.
편집: 임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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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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