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의 균열로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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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열린 2026 다보스 포럼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이는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다. 하버드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옥스포드로 건너가 석박사 과정을 마친 뒤 영국의 중앙은행(Bank of England, 흔히 영란은행으로 불린다)의 총재를 지냈던 인물로, 그는 이번 포럼에서 핵심을 찌르는 메시지를 전했다. 지구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지난 50년을 뒤로 하고, 곧 다가올 지구촌의 변화에 대한 예고였다.
"지금은 전환(transition)이 아니라 단절(rupture)이다."
규범 기반의 국제질서는 그럭저럭 유지되는 변화가 아니라, 강대국의 경제적 강압과 안보 거래가 일상화되는 '질서의 균열'로 접어들었다는 진단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국제 정치는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와 국가 간의 협의, 협상을 통해 마련한 규칙과 규범 중심으로 굴러갔는데, 이젠 강대국들이 군사력을 통해 힘으로 밀어붙이고 경제적 압박과 흥정을 통한 안보 거래가 일상화되고 있다. 즉, 그동안 지구촌이 세워놓은 규칙 기반의 질서에 금이 가고 있음을 말한다.

AP통신은 카니의 발언으로 미국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것에 대해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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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흐름 속에서 중견국들이 각자도생을 넘어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이제 각국은 "협상 테이블에 앉지 못하면 메뉴판에 오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단지 캐나다만의 불만 표출이 아니다. 최근 몇 달간 서방, 특히 유럽 국가들의 정상 외교 방향은 같은 불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동맹국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관세·안보 압박을 경험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외교 방향성은 자국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가치 외교의 언어는 유지하되 실제 정책은 자율성(autonomy)과 실익(interest)을 중심으로 재정렬되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카니의 다보스 발언은 미국 측의 반발을 불러왔고, 발언의 파장을 둘러싼 공방으로까지 이어졌다.
스타머와 시진핑, 관계 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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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에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의 중국 방문은 단순한 양자 이벤트가 아닌, '새 질서 적응'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보수당 정권에서 총리를 역임한 테레사 메이의 방중 이후 8년 만에 이뤄진 중국 공식 방문을 두고, 로이터는 “관계 리셋(reset)”이라 규정하며 스타머가 중국과의 관계를 보다 "정교하게(sophisticated)" 다루겠다고 밝힌 점을 부각했다.
영국이 미국의 최측근 국가였던 만큼 영국도 중국과의 미묘한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번 방중을 통해 그간의 껄끄러움을 완전히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충돌 사안이 존재하더라도 경제와 기술, 문화 협력을 거래 가능한 패키지로 묶어 진전을 만들겠다는 실용 노선을 택한 것이다.
스타머 총리의 방중 성과물은 이번 만남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예시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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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영국인의 중국 30일 무비자(비자 면제) 합의가 발표됐다. 둘째, 스카치 위스키(Scotch whisky) 대중 관세가 절반 수준으로 하향 조정됐다. 셋째, 영국 정부가 가장 민감한 국내 이슈로 생각하는 불법 이주 대응까지 의제에 올랐다. 유럽 대륙에서 영국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중국산 소형 보트의 엔진 공급망을 겨냥한 공조가 논의된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관광 서비스(사람의 이동), 수출 산업(상품), 국내 정치(이민)를 직접 다룬 것으로, 이는 단순한 관계 개선을 넘어 영국 국민이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전형적인 실익 외교의 구성이다. 그동안 중국이 상호 간의 무비자 협정도 꺼렸던 것을 고려하면 영국인들의 무비자 입국은 입지전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또한 중국이 영국의 대표 기업 투자를 성과로 묶어 제시하도록 만든 점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로이터와 가디언은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의 대중 투자 계획을 이번 정상회담 성과의 일부로 함께 언급했다. 정상회담을 통한 기업의 투자가 시장 접근에 용이성을 보장하고 이를 성장으로 끌어내려는 방향성은 침체와 성장 압박을 동시에 받는 영국 정치에 꽤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8년 만의 방중, 어떤 의미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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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머 총리의 방중과 비교되는 사례는 영국의 보수 정권 총리였던 테레사 메이의 2018년 방중이다. 당시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 이후의 '글로벌 브리튼(Global Britain)' 전력을 전면에 내세우며 중국에서 약 90억 파운드 규모의 거래를 확보했다. 동시에 중국 시장에서 영국의 금융 서비스 진출을 확대했고, 영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와 같은 구체적 수출 의제를 강하게 밀었다. 이 시기 메이 총리 방중의 핵심 동력은 EU를 떠나는 영국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무역 사절단 형식의 방문에 가까웠다.
반면, 이번 키어 스타머 총리의 방중은 거래 성격이 다층적이다. 무역·투자뿐 아니라 국내 정치의 난제(이주), 인적 교류의 상징적인 조치(무비자), 산업 로비의 핵심(위스키) 그리고 지미 라이(Jimmy Lai) 문제와 같은 인권 이슈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이 한 묶음으로 다뤄졌다.
참고로 지미 라이는 홍콩의 대표적인 인권 운동가로, 한때 홍콩을 지배했던 관련국으로서 영국은 중국의 인권 탄압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다. 다만, 이번 방중 시 스타머 총리는 인권 및 제재 문제를 의식한 냉정한(clear-eyed) 접근을 강조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이는 2018년식 ‘시장 개척’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안보, 경제, 국내정치가 한 덩어리로 결속된 시대의 외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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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영국만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프랑스의 마크롱은 이미 중국을 다녀갔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캐나다의 마크 카니도 중국과의 접촉면을 넓히려는 중이다. 사실, 중국은 서방을 하나의 블록으로 인식해 왔다. 하지만 미국을 등지고 중국을 잇달아 방문하는 과거 미국의 동맹국들의 행보는, 더 이상의 서방 국가가 하나임을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보인다. 결국, 최근의 대중국 연쇄 정상외교는 ‘친중’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협상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의 실용 외교 노선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외신이 본 이재명 실용주의


로이터 통신은 이 대통령의 방중을 "회복"하는 계기로 표현하며, 그 상징성과 정치적 무게를 부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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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흐름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1월 초, 이재명 대통령의 방중을 중국 외교부가 '국빈 방문'으로 공식 발표하고 베이징에서 정상 회담이 열렸다. 일부 극우 커뮤니티에서는 이 대통령의 행보를 미국을 버리고 중국을 택한 친중 노선이라 선동했지만, 사실 이번 국빈 방문은 중국을 잇달아 방문 중인 흔히 선진국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최측근 국가 정상들의 방문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 대통령의 방중은 선언적 합의에 머물지 않고 실무 협력 패키지를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과학기술, 교통, 무역 등 실무 영역에서 다수의 양해각서(MOU)가 체결되며 협력 채널을 강화했는데, 이는 정치적 수사보다 정책 실행의 기반을 마련하는 이른바 실용적 접근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특정 진영에 과도하게 기울기보다 협상력을 확보하고 선택지를 넓히는 방식의 외교는 서유럽 국가 정상들의 방중 의도와도 같다.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외교적 자율성을 확장하려는 시도인데, 이미 대한민국이 이를 먼저 시도한 셈이다.
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의 방중은 단순 친선 방문이 아니며 다보스에서 나온 "질서의 단절"이라는 진단 속에서 영국이 취한 선택은 명확하다. 원칙은 말하되 정책은 실익으로 설계한다. 그리고 그 실익은 거대 담론이 아닌 무비자, 관세, 투자, 불법이주 공조와 같이 바로 표로 환산할 수 있는 항목으로 기재된다. 이제 지구촌 외교는 '어느 편이냐'를 묻기보다 '어떤 의제에서 누구와 어떤 조건으로 국익을 얻을 것이냐'를 묻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즉, 해법은 '선택과 집중'이 아니라 이슈별로 가변적 연합을 운용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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