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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게임을 해봤어요

 

시민들 스스로의 손으로 최악의 대통령을 뽑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치권력, 경제 권력, 기성 언론의 담합 속에서 그 폐단이 감춰집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힘에 의해 그 폐단이 밝혀지고, 그러한 시민들의 힘이 정치적 영향력을 쌓아 올려 정권을 교체해 냅니다. 이내, 그 새로운 정권을 둘러싼 목소리들이 분열됩니다. 그 사이, 끌어내려진 권력자들은 다시 경제 권력, 기성 언론과 힘을 합쳐 새로운 정권을 위협합니다. 그 결과 시민들 스스로의 손으로 다시 한번 최악의 대통령을 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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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언론 민들레, 링크)

 

이 순환은 한 주기가 지나가는 데에만 고통 속에 몇 년이 흘러버립니다. 인생 속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라 할 텐데 그런 고통의 순환을 우리는 몇 번이나 반복하여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분명 지치는 일입니다. ‘지치지 않고 또 한 번 이겨냈다’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우리는 지칠 만했습니다. 그럼에도 힘을 냈습니다. 그렇게 또 한 번 최악의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정권 교체를 해냈습니다.

 

이번만큼은 또 하나의 순환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순환의 굴레가 이어지는지 가늠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위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정권교체를 이뤄내고 우리는 여전히 한뜻으로 뭉쳤을까요, 아니면 진영 내부에서 서로 불만을 품고, 갈등을 형성하고, 때때로 같은 편 내에서도 서로를 악마화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을까요.

 

각자의 관점과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제 눈앞에는 내부 갈등의 단서가 어렵잖게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대선 이후 이어진 몇몇 민주당 내부의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의 상대방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증오하는 발언들, 당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모습, 탈당하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는 푸념을 목격하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앞서 말한 순환 중 이 단계가 계속 이대로 흘러간다면 다음 단계가 기존의 순환대로 재현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만큼 또 한 바퀴의 순환이 반복될 가능성도 높아질 겁니다. 물론, 현재 상황이 비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몇 차례의 정권교체 중 가장 낙관적인 집권 첫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자꾸 눈에 보일 뿐입니다. 이다음 겨울은 어느 빈틈에서 자라나고 파고들어 들이닥칠지… 빈틈에서 자꾸 눈에 띄는 겨울의 단서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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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컬처앤스타, 링크)

 

〈오징어 게임〉 시즌2에서 주인공 성기훈은 다시 참여한 〈오징어 게임〉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그 유명한 대사, ‘나는 이 게임을 해봤어요’라고 소리칩니다. 그건 단지, 첫 게임에서 움직이면 총에 맞아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임이 끝날 때까지 어떤 시도와 어떤 욕망이 어떤 과정과 결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경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 지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 게임이 쉬워지거나 결말을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좀 더 극적인 예를 볼까요. 빌 머레이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이나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 같은 타임 루프 장르에서 주인공의 경험 지식은 극단적으로 축적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그 경험 지식이 무조건 이상적인 결말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는 내용을 담아냅니다. 우리는 그 점에 매우 공감하며 개연성을 느낍니다.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일이 더 꼬이기도 하고, 점점 문제가 커지기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결과가 똑같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앎의 한계’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대체로 큰 힘이 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앎의 한계

 

이 관점에서 현 상황을 다시 돌아볼까요. 자꾸 눈에 들어오는 내부 갈등의 단서들은 내부를 향한 증오나 혐오의 표현, 탈당하겠다는 과격한 표현들입니다. 차라리 이들이 정치참여 경험이 적어 이렇게 티격태격하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에게 우리의 경험 지식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런 표현들이 줄어들고 내부 갈등을 줄여갈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제가 내부 갈등의 단서라 말하는 행위들은 오히려 같은 경험 지식을 갖고, 고통의 순환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의 열정적 정치활동입니다. 그런 표현과 활동이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해결 방안인 것이고, 이를 최대한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이죠. 그저 서로가 ‘내가 경험하여 알고 있는 지식을 상대방은 모르고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그러므로 내가 더 강력하게 알려줘야 한다’라는 의지를 불태우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한 개별 의견들의 디테일을 파고들다 보면 머리가 더 복잡해집니다. 예를 들어 구글에서 ‘○○○이 수박인 이유’라는 검색어를 넣고 ○ ○ ○자리에 민주당 주요 정치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넣어보면 거의 모든 인물이 내부 비난을 받은 내역과 나름의 근거가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한 것이 사실이고, 의도된 여론조작이 섞여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의심과 지적이 모두 잘못됐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민주당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암적 존재들이 바로 이러한 지지자들의 의심과 지적 가운데에서 발견되어 왔기 때문이죠.

 

지금 이 순간에도 민주당원 단톡방이나 게시판, 민주당 지지 성향의 커뮤니티 게시판, 바로 이곳 딴지일보 자게에도 특정 민주당 정치인을 비난하는 내용이 오르내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내부 갈등의 단서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는 수차례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바 있는 시민정치 활동입니다. 제가 만약 그 단톡방이나 게시판에서, ‘나는 이 게임을 해봤어요’를 외치며 내부 갈등을 멈추자고 주장한다면, 상대방은 ‘나야말로 이 게임을 해봤어요’라며 그런 안일함이 실제 민주당의 발목을 잡은 정치인들을 얼마나 연명시켜 왔는지를 설명할 겁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앎의 한계’입니다. 지식이라는 게 하나의 수직선 위에 놓인 숫자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저 서로 대보는 것으로 무엇이 더 옳은 지 바로 알아낼 수 있었겠죠. 실제로 지식은 다양한 색깔과 위치와 온도를 갖는 복잡한 변수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앎의 내용과 크기를 서로 비교해 보고 무엇이 더 옳은지 명쾌하게 알아낼 수 없습니다. 저 위에 예시에서도, 내부 갈등을 멈추는 게 우선인지, 위선적이고 무능한 정치인을 걸러내는 것이 우선인지, 명쾌한 답을 찾아낼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이것이, 내가 무언가를 경험하여 알고 있다는 것은 매우 큰 힘이지만, 그 힘만으로 해답을 알아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앎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 이런 유형의 문제를 우리는 사실 정치뿐만 아니라 숱하게 많은 맥락에서 발견하고 그 안에서 고뇌를 느낍니다. 사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런 문제와 고뇌로 가득하니까요. 

 

 

삶의 고뇌, 마음 챙김, 그리고 분별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제가 쓴 글이 딴지일보 마빡에 처음 오른 것이 벌써 15년 전입니다. 어맹뿌 가카 시절이었으니, 그 이후 4번의 대선이 있었고 딴지에도 저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최근 5년 간은 개인적 변화로 인해 도통 글을 쓰지 못해서 1년에 1~2편의 원고를 쓰는 데 그친 듯합니다. 그리고 그 5년은, 제가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어낸 기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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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김에 망한 ADHD 환자의 삶, 프롤로그: 애 어린이집 보내야 하는데 공황이라니

(딴지일보, 링크)

 

연재를 해보려다 꼬여 프롤로그만 덜렁 남은 예전 글에도 그 기록이 남아있지만, 저는 성인 ADHD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ADHD와 우울증이 한데 어우러지면, 환우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상당히 성가십니다. 약물치료와 상담 치료를 병행했고,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밖에 할 수 있는 노력을 시도하다 보니 대략 5년이 지난 지금은 재정적 안정성이 점점 떨어져 가는 가운데, 요가와 명상을 가까이하고, 독서 목록에 불교 서적과 뇌과학, 신경학 서적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마음 챙김’이라고 하는 키워드가 제 삶의 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이죠. 

 

같은 우울증이라도 사람마다 배경과 맥락이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 굳이 꼽자면 ‘두 마리 토끼에 대한 집착과, 둘 다 잡지 못하는 결과에 대한 자학’이라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상담과 명상 과정에서 스스로 도출한 결론의 요약입니다. 당연히 동시에 잡을 수 없는 두 마리 토끼도 문제고, ‘집착’ 자체도 문제고, ‘자학’도 문제죠. 이런 문제 종합 세트가 왜 발생했는지까지는 차차 기회가 되면 밝히기로 하고, 굳이 이 얘기를 꺼낸 이유로 바삐 돌아가겠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으면, 앞서 말한 경험 지식이 나름대로 여러 방면에서 누적되다 보니 얼추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어설프게라도 알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저는 학부 전공이 심리학이었고 특히 상담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나름대로 우울증의 배경과 상담 및 치료 방식에 대한 얕은 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앎’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책을 제시해 내지 못했습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들면 안 된다, 내 잘못이 아닌 것까지 내 잘못이라 여기면 안 된다, 같은 지침은 익히 알고 있었고 그런 얘기를 힘들어하는 주변인들에게 저 스스로가 자주 언급해 왔습니다. 그 지식이 저 자신의 고뇌와 그로 인한 신체적 증상을 해소하지는 못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운 고통에서 그 ‘앎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와중에도 여전히 명상, 심리학, 불교와 뇌과학을 아우르는 많은 책과 강연 영상을 통해 혹시라도 내가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새로이 알게 된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갖곤 했습니다. 김주환 교수의 내면 소통, 불교의 연기법, 마이클 싱어의 놓아 보내기, 타라 브랙의 받아들임, 필 스터츠의 Tools 등 새로운 앎은 분명 큰 힘이 되었지만 우울증이 눈 녹듯 사라지는 마법이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앎 가운데에서, 유독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었습니다. 불교에서의 ‘분별’이었습니다. 

 

일상적 개념으로써의 ‘분별‘은 서로 구분하고 나누는 인식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옳고 그름을 대상으로 하죠. ‘분별 있는 사람’이란 보통 옳고 그름을 잘 나누어 그중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하곤 합니다. 하지만 불교적 맥락에서 분별은 착각이자 망상이라고 합니다. 분별이 망상이라니요. 저는 평생 전형적인 T에 해당하는 성향이었고,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추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미세한 것들에 대한 분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해를 즐겼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숭배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저에게 ‘그 모든 게 망상’이라는 불교의 메시지는 받아들이기에 버거웠습니다. 그 모든 게 망상이라면 인류의 그 수많은 학술적 유산과 첨단 과학과 눈부신 기술의 발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지 황당하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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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심 떠나면 시비할 일 없어”

(불교신문, 링크)

 

한편, 저의 이성적·논리적 성향은 저의 삶과 이를 둘러싼 환경들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모든 순간, 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아주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수십 년이 이어지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가 생겨 많은 경우 그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느 하나가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때 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저를 질책했습니다. 그런 삶의 방식이 쌓이고 쌓여 ‘두 마리 토끼 모두 잡아내야 하며, 그것을 못해내는 나는 무가치하다’라는 잔인한 평가를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내리게 된 것이죠. 겹겹이 쌓인 분별이 제 고뇌의 원인이었습니다.

 

불교에서의 ‘분별’은 저에게 딜레마를 남겼습니다. 분별이 망상이라는 건 도대체가 받아드릴 수 없는데, 사실 그 분별이 저의 몸과 마음을 고통스러운 상태로 몰아넣은 가장 주요한 범인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 돌아가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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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이란 무엇인가

(불교문화, 링크)

 

 

마음 챙김에서 다시 정치로

 

정치활동에는 필연적으로 온통 분별로 가득합니다. 이 가치와 저 가치의 구분, 이 신념과 저 신념의 구분, 이를 바탕으로 내가 추구할 가치와 나의 신념을 정하면 동지와 상대가 구분됩니다. 만약 그러한 구분이 전혀 없다면, 정치라는 건 필요치 않았을 겁니다.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이라면 정치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익히 체감하셨을 겁니다. 정치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첨예한 구분과 분별은 필요합니다. 

 

한편, 우리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 고통스러운 순환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도 그 분별입니다. 우리 각자는 현 상황에서 다시 한번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자 바람직한 것과 피해야 할 것을 구분하고,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일과 절대로 막아야 할 일을 구분합니다. 그것이 각자의 신념을 만들고, 다른 신념을 가진 이와 부딪히게 만듭니다. 때때로 그 충돌은 내부에서 발생하고, 외부의 세력이 그 충돌을 이용합니다. 지금까지의 순환은 모두 그렇게 벌어졌고, 그걸 막고 싶은 강한 의지마저도 그 순환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이 근원에 ‘분별’이 있음을 딱 잘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딜레마는 쉽게 해법을 찾을 수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저 말장난에 불과해 보이기도 합니다. 철학적 사유의 차원을 현실 정치의 차원에 무리하게 대입하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한번 가정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만약 이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어떨까요? 불교철학에서는 분별이 망상이며 깨달음으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 챙김과 관련한 많은 스승도 같은 가르침을 남깁니다. 최신 현대 과학과 의학 연구에서 이러한 가르침이 신비주의적 믿음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조금씩 밝혀내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어서 분별에서 시작하는 개인적 고뇌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이 정치적 차원에서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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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자 간결한 가르침에 담긴 깨달음의 지름길

(법보신문, 링크)

 

저는 몇 년간의 탐구 과정에서 적어도 개인 차원의 ‘분별’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깨달음의 단서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불교철학을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결국 그 깨달음이란 반야심경에 이미 정리되어있다는 걸 아시겠지만 저에게는 그 260자의 간결함 외에도 뇌 과학과 신경학적 연구 결과가 함께 어우러졌을 때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이해의 과정은 제가 삶의 고뇌를 받아들이는 태도나 방법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고 있고, 대체로 고뇌가 덜어지는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보통 간화선(看話禪)이라 부르는 참선법이 있죠. 참선이나 명상을 할 때에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그 화두는 일반적인 논리나 상식으로는 의미를 알기 어렵거나 딜레마에 빠지기 쉬운 특성을 보이곤 합니다. ‘분별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하지만, 분별은 또한 망상이다’라는 이 딜레마를 하나의 화두로 삼아보면 어떨까요. 이 화두를 제가 어떻게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이해가 삶에서의 정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시각을 가져올 수 있는지, 다음 편부터 본격적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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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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