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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sorry”는 흔한 말이다. 길에서 누군가와 살짝만 부딪혀도, 혹 가는 길이 비슷해 마주칠 때도 서로 미소 지으며 “sorry”를 주고받는다. 이때의 사과는 잘잘못을 따지는 고백이라기보다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기 위한 사회적 완충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한 예의의 언어다.
그런데 이 익숙한 단어가 정치로 들어오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영국 정치에서 “sorry”는 예의가 아니라 책임 인정에 가깝다. 그래서 영국 정치인들은 웬만해선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벨푸어 선언이나 벵골만 사건과 같은 과거의 악행에 대해서 영국 정부는 이제까지 이렇다 할 공식적인 사과가 없었다. 사과하는 순간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뜻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그치진 않는다. 영국은 식민 지배했던 국가를 돕기 위해 매년 우리 돈 약 10조 원에 달하는 예산을 편성한다. 각국에 사무소를 마련해 해당 국가에 대한 원조를 하기 위해서다. 사과 대신 실질적인 도움으로 갚는 것이다. 정책이 실패해도, 판단이 틀렸어도, 흔히 등장하는 표현은 “실수가 있었다”, “교훈을 얻겠다”, “절차를 개선하겠다”와 같은 비인칭적 문장들이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주어는 없애고 책임을 제도와 과정 속으로 옮기는데, 이것이 영국식 정치이자 외교 스타일이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영국 총리가 공식 석상에서 “Sorry”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sorry’를 강조했다. 키어 스타머가 공개적으로 사과했을 때, 영국 사회는 즉각 반응했다. 단순한 유감 표명이 아닌 정치적 경보로 볼 수 있는 수준의 사과였기 때문이다.
피터 멘델슨은 누구인가


주미 영국대사 피터 멘델슨이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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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머 총리는 미국 주재 영국 대사 임명 건으로 성범죄 사건 피해자들을 향해 사과했다.
영국의 미국 대사는 외교관 중에서도 특별한 자리다. 영국과 미국은 군사·정보·외교를 깊이 공유하는 이른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 관계를 현장에서 관리하는 얼굴이 바로 주미대사다. 그래서 이 자리는 단순한 행정 임명이 아니라 총리의 판단력과 국가의 도덕 기준을 함께 대표하는 상징적 직위로 인식된다. 지난 총선에서 압승한 노동당은 그 자리에 피터 맨델슨을 앉혔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번 논란의 중심에 있는 피터 맨델슨(Peter Mandelson) 보통의 외교관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지난 30여 년간 영국 정치에서 공식 직함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보이지 않는 권력의 상징에 가깝다. 선거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선거에 이기는 전략을 설계하고 권력의 흐름을 조정해 온 정치 엘리트다.
1990년대 후반 토니 블레어 시절, 당시 노동당은 전통적인 좌파 정당의 이미지를 벗고, 중도-친시장 노선을 채택하며 대대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이른바 ‘신노동당(New Labour)’이라 불린 이 노선 전환의 중심에 맨델슨이 있었다. 그는 노동당이 어떻게 언론을 상대해야 하는지, 어떤 언어로 중산층 유권자에게 접근해야 하는지, 재계와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설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그는 종종 블레어의 두뇌 혹은 선거를 이기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정치 경력엔 항상 논란이 함께 했다. 맨델슨은 능력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도덕적 판단과 이해충돌 문제에 대해서는 반복적으로 의문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그는 정책 실패가 아닌 개인 대출 문제와 정치 후원자와의 관계 논란 등으로 두 차례 내각에서 물러난 전력이 있다. 이 사건들은 불법으로 단정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항상 합법과 비합법, 공적 역할과 사적 관계의 경계선 위에 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맨델슨을 전형적인 정책 관료가 아니라 사교 네트워크형 정치인으로 규정하게 만든다. 그는 정치권 내부뿐 아니라 금융계, 재계, 국제 사교계와 폭넓게 교류해 왔다. 이런 네트워크는 외교와 정치에서 자산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투명성의 사각지대를 만들었다. 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여기서 시작한다.
자신이 맺어온 관계를 공적 기준에 따라 관리했는가?
또다시 등장한 제프리 엡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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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국 사법당국이 엡스타인 관련 문건을 대규모로 공개하면서 엡스타인 사건으로 다시 전 세계가 떠들썩하다. 핵심 피의자가 세상을 떠났으니 사건이 덮일 만도 하지만, 여러 의혹이 담긴 자료들이 계속 공개되면서 그 파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 문건 속에 피터 멘델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을 통해 맨델슨이 과거에 밝혔던 것보다 엡스타인과 훨씬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을 가능성 제기되었다. 그동안 맨델슨은 엡스타인을 거의 알지 못했고, 제한적인 만남만 있었다는 취지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공개된 자료들은 그 설명과 어긋났다.
영국 사회가 이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멘델슨이 직접 범죄와 연루되었는가보다 엘리트 네트워크 안에서 "몰랐다"라는 해명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남용되어 왔는가에 있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과 문제적 인물의 교류가 밝혀졌음에도 책임에서 벗어나 왔다는 인식이 이미 사회 전반에 누적되어 있었다. 맨델슨은 그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 된 것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멘델슨이 미국 대사로 임명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는 여전히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았고, 미국 정치·재계와의 네트워크, 국제 협상 경험, 외교 감각 면에서 강점을 지닌 인물이었다. 스타머 정부는 이러한 능력을 신뢰했고, 과거의 논란은 이미 검증이 끝난 문제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스타머 정부의 이런 안일함이 이번 사태의 반발을 키웠다.
피터 맨델슨을 둘러싼 논란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넘어서 영국 정치 엘리트가 무엇을 ‘능력’으로 간주하고, 무엇을 ‘감수할 수 있는 위험’으로 여겨 왔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맨델슨은 성공한 전략가이자 동시에 엘리트 네트워크의 그늘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엡스타인 문건에서 다시 등장했을 때, 문제는 한 사람의 스캔들이 아니라 영국 정치 문화의 균열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인물을 미국 대사로 임명한 결정에 대해 영국 총리가 “sorry”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이번 사태의 쟁점이다. 단순히 인사 실수에 대한 유감 표명이 아니라 영국 정치가 설정해 온 도덕적 경계선을 다시 점검하는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개 사과의 의미

스타머 총리에게 멘델슨 임명을 조언한 책임으로 사임한 스타머 비서실장 모건 맥스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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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리의 이번 사과가 영국 정치에서 이례적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사과의 대상이다. 정책이나 행정이 아닌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한 총리의 사례는 매우 드물다. 둘째, 사과의 내용이다. 스타머는 절차상의 문제나 시스템의 한계로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판단 실패를 인정했다. 셋째, 영국 정치 문화와의 충돌이다. 영국 정치는 오랫동안 개인의 사생활과 공적 책임을 구분해 왔다. 그러나 이번 사안에서 스타머는 그 선을 허물었다. 과거의 성범죄 네트워크 전력이 외교 인사 임명이라는 공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엡스타인 사건은 권력과 사교 네트워크가 어떻게 서로를 보호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정치, 외교, 재계, 왕실이 얽힌 폐쇄적 관계망 속에서 문제는 오래도록 지연되거나 축소되어 왔다. 이번 주미대사 임명 논란은 그 네트워크의 그림자가 영국 외교의 핵심 직위까지 드리웠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분노는 한 인물에게서 멈추지 않고, 인사 검증 시스템과 정치 문화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이제 남은 건 사과의 진정성에 대한 판단이다. 영국 정치에서 사과는 대개 후속 조치를 요구한다. 인사 검증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엘리트 네트워크에 대한 감시는 강화될 것인가, 피해자 중심 원칙은 실제적인 제도로 이어질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면, 이번 “sorry”는 오히려 더 큰 냉소를 낳을 것이다.
영국 정치가 어디까지 책임을 논할 것인지 판단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그리고 그 시험대는 이제 시작이다. 14년 간의 보수당의 독선을 넘어 어렵게 의회를 장악한 노동당의 당수인만큼, 스타머는 이 사태를 순탄하게 해결하고 총리직을 지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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