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챙김(mindfulness)이라는 말이 점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정의나 유래 같은 지루한 얘기는 일단 넘어가고, 제 얘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몇 년 전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자연스레 마음 챙김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심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마음 챙김이라는 말을 지금처럼 많이 사용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와 같은 심리 장애를 치료하는 데 ‘지금, 여기(now, here)’에 주의 집중하는 방식을 많이 언급했었습니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책이나 강의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같은 맥락을 아우르는 개념으로써 마음 챙김이라는 단어가 표준용어처럼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마음 챙김의 개념에 대해 내키지 않는 면도 있었습니다. 관련된 내용을 찾다 보면 제가 보기엔 신비주의적 접근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더군요.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MBTI에서 T 성향이 강한 편입니다. 게다가 의심이 많은 성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적인 접근이 별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마음 챙김이라는 개념이 현대적 종교 신앙 체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만약 마음 챙김이 신앙 체계에 가깝다면 어차피 저는 관심 없으니 더 알아보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제 취향에 맞는 내용들을 점점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신경 체계에 대한 해부학적 접근이라든지, 제 전공이었던 심리학 연구 내용 중 제가 몰랐던 영역 등 제가 받아들이기 편한 내용에 관심을 두고 찾아보게 된 것이죠. 예를 들어 넷플릭스에 〈익스플레인: 뇌를 해설하다(The Mind, Explained)〉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시즌1 제4화가 마음 챙김에 대한 내용인데, 명상 수련을 오래 한 사람의 뇌 반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넷플릭스, 링크)
명상 수련을 통해 신체적 고통의 감각을 인지하고 이를 처리하는 방식에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동일한 신체적 고통에 대해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고통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체적 고통 감각에 반응하는 뇌의 특정 부위(이 경우, 편도체 Amygdala)의 활성화 정도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매우 흥미로웠고 이 시리즈는 진지하게 명상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음 챙김의 과학적 효과를 지지하는 연구를 찾아보면서, 어떤 노력을 해야 그 효과를 저에게 가져올 수 있는지 탐구했습니다. 그런 노력을 ‘마음 수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마음 수련을 하다 보면 근력운동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순식간에 변화가 생기진 않지만 분명 좋은 변화가 누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효과가 느껴지지 않는 수련도 있었고, 귀찮아서 중단한 것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저 나름의 속도로 마음 수련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명상 외에도 요가를 하거나, 전혀 관심 없었던 희한한 고대 운동을 찾아보거나, 오래된 불교 경전을 공부하기도 하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무언가를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았고, 그 외에도 기존에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 깨져나가는 경험도 이어졌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거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던 것들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경험들이죠. 지식과 경험의 양이 늘어난 것뿐만 아니라, 내용에도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이쯤에서 지난 글을 통해 제가 제안한 화두로 다시 돌아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분별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하지만, 분별은 또한 망상이다.’ 이 화두에 대한 본격적 이야기의 시작은 일단 제 성격에 따라, 다분히 과학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하려 합니다. 일단 ‘분별’이라는 걸 과학적으로 표현하는 데에서 시작해 보죠.
분별은 좌뇌의 기능
눈앞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습니다. 이걸 보고 ‘강아지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분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대체로 그 대상을 보는 순간, 조류인지 포유류인지, 포유류 중에서도 고양이인지 개인지, 개 중에서도 어린 강아지인지 성견인지 등에 대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예로 기차에서 앞자리 승객의 대화를 듣고 어느 지역 사투리인지를 구분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 귀로 듣는 소리와 같이 물리적인 것만을 분별하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가 정부의 새로운 경제정책에 대해 남긴 의견을 보고 우리는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과 같은 추상적인 분별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광범위한 분별은 몇 가지 요소를 갖습니다. 가장 먼저, ‘대상’입니다. 눈앞의 동물, 앞자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 누군가의 정치 성향 등이 그 대상에 해당합니다. 이 대상을 ‘분별’하고 나면 이들은 강아지, 부산 사투리, 진보적 성향 등의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그 결론이라는 것은, 그 대상과 공통적인 속성을 지닌 다른 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범주’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 보죠. 눈앞에 하얀 털로 뒤덮인 동물이 있습니다. 네 발이 있고 꼬리가 있으며 주둥이가 조금 나와 있고 혀를 날름거리며 꼬리를 흔듭니다. 우리는 분별이라는 과정을 거쳐, 네 발을 지니고 꼬리가 있으며 체온 조절을 위해 혀를 자주 날름거리고 감정의 표현으로 꼬리를 흔드는 포유류의 한 종류인 개라는 ‘범주’에 그 대상이 속한다고 판단합니다. 결국 분별은 개별 대상을 일정한 범주와 연결하는 과정입니다. 분별의 구성요소는 대상, 범주, 연결, 이렇게 3가지가 되겠네요.
이 요소 중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둘, ‘범주’와 ‘연결’ 우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머릿속에 있는 범주 중에서 하나를 골라 대상과 연결합니다. 때때로 대상이 너무 새로워서 어떤 범주에도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학습하는 과정은 더 다양하고 체계적인 범주를 머릿속에 쌓아두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게 쌓아둔 범주 중 하나에 연결하는 이 과정은 머릿속에서 벌어지므로, 범주와 연결은 분명 뇌에서 수행되는 어떤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뇌과학자이자 불교철학가인 크리스 나이바우어(Chris Niebauer)의 책 〈자네, 좌뇌한테 속았네〉에서는 이 기능이 뇌 중에서도 ‘좌뇌’에서 수행되는 기능이라 설명합니다. 대상 - 범주 - 연결 기능을 일종의 라벨링(labeling)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의 좌뇌는 정말 효율적이고 뛰어난 라벨링 전문 기계와 같다고 합니다. 뇌에는 수많은 범주가 체계적으로 쌓여있는데, 새로운 대상을 발견했을 때 순식간에 그 대상에 맞는 범주를 찾아 그 범주의 이름이 적힌 라벨을 붙이는 것이 좌뇌의 대표적 기능 중 하나입니다.

(불광미디어, 링크)
분별이 만드는 오류의 늪
좌뇌가 분별하는 것은 때때로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어나는 분별에는 때때로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크리스 나이바우어는 앞서 소개한 책에서 이 분별의 신기한 현상으로 ‘카니자의 삼각형(Kanisza Triangle)’이라는 착시를 예로 듭니다.

카니자의 삼각형
이 그림에서 우리는 서로 포개져 있는 2개의 삼각형을 분별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삼각형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이죠. 아무리 노력해도 그 2개의 삼각형이 ‘안 보이게’ 만들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좌뇌의 분별은 이렇게 즉각적이면서도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리고 분별의 또 한 가지 특징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바로, 한번 분별이 일어나면 없는 것까지도 확실히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위 그림을 부분적으로 떼어보면 우리는 입을 벌린 팩맨처럼 생긴 검은 도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팩맨의 벌어진 입 양옆으로 꺾인 선이 놓여있음을 볼 수 있죠. 하지만 시야가 조금만 넓어져도 팩맨과 꺾인 선들 대신 테두리나 색이 없는 삼각형에 가려진 3개의 검은 원과 검은 테두리의 삼각형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테두리 없는 삼각형이 보이는 순간, 우리는 마치 그 윤곽선이 손에 잡힐 듯, 아주 명확한 삼각형의 경계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검은 팩맨과 꺾인 선 사이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지만, 좌뇌는 이 공백 영역에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이어진 흰색 삼각형이라는 라벨을 붙입니다. 그리고는 온전히 이어져 있고 차이가 전혀 없는 공백의 영역임에도 완전히 구분 가능한 경계가 있는 것처럼 인식합니다.
분별은 그림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대상에서 수시로 벌어집니다. 소리, 냄새, 촉감, 심지어 실체가 없는 개념들까지도 좌뇌는 능숙하게 라벨을 붙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착시 그림 외에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좌뇌의 분별은 똑같은 특징을 지니지 않을까요? 바로 이 질문이 위 책의 저자 크리스 나이바우어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질문이자, 제가 이 책을 우리 이야기에 언급한 이유입니다.
그 특징을 더 명확하게 짚어보죠. 저 착시에 삼각형은 없습니다. 저 경계가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 보이지만 그 경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분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뚜렷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특징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종의 오류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마저도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오류 말입니다.
이 오류는 시각 외에 소리, 냄새, 촉각에 대한 분별에서도 발생합니다. 그 예로 어떤 외국어 발음이 희한하게 특정한 한국어 단어처럼 들리는 것을 소재로 한 개그 코너, 서로 다른 식재료의 조합으로 사용하지 않은 다른 재료의 맛을 만들어내는 요리 같은 것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착각’이라는 말도 결국 다양하게 벌어질 수 있는 분별의 오류를 의미합니다.
매 순간 수없이 많은 대상을 끊임없이 분별하면서, 그 중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극히 일부일까요, 아니면 꽤 빈번하게 일어날까요? 그걸 알아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분별은 오류이든 아니든 너무도 자명하게 작동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카니자의 삼각형 착시는 분별의 오류라는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크기나 색깔과 관련된 착시 중에서는 착시라는 걸 믿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림을 잘라서 직접 붙여보거나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으로 색상 값을 확인해야만 수긍하게 되고, 그마저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도 있죠.
사실 착각이라는 말도 분별의 오류였음이 밝혀진 이후에 붙이는 말입니다. 착각이 일어난 그 순간만큼은 그 분별을 그대로 받아들이죠. 그러므로 분별이 일어난 그 시점에는 착각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착각을 금방 깨닫기도 하지만, 때로는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 아주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뜨고 지는 태양을 보며 착각했고, 평생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도 수없이 많았을 겁니다.

데이비드 노빅(David Novick)의 ‘컨페티 착시(Confetti Illusion)’
분별의 오류는 마치 늪과 같아서 머물수록 그 안으로 더 깊이 빠져듭니다. 그러다 보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나의 분별과 다른 사람의 분별이 서로 다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오류라고 주장하는 경우이죠. 오래된 밈 중에 ‘드레스 색깔 문제’가 그 좋은 예입니다.

(한겨레, 링크)
해외의 한 가수가 SNS에 올린 사진 한 장으로 전 세계가 한바탕 시끌벅적했습니다. 소위 ‘흰-금파’와 ‘파-검파’가 나뉘어 서로의 주장을 이어갔습니다. 드레스 사진 자체는 시각적 분별 오류의 전형적인 사례 정도이지만, 이 사건의 경우는 해당 드레스 제조사의 공식 답변이라는 압도적 신뢰도의 정보가 알려지기 전까지 양측이 서로의 오류를 지적하고 자신의 분별을 증명하는 과정의 특징을 잘 담아냅니다.

이쯤 되면 정치적인 이야기와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드레스 색깔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부동산 정책 문제, 주요 공직 후보자의 도덕성 문제 같은 것들은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이 큽니다. 드레스 색깔에 대한 논쟁은 놀이였지만, 정치적 논쟁은 놀이가 아닙니다. 특히,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현시대의 상식이었던 가치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위협받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는 정치적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합니다.
그 정치적 논쟁은 아마도 분별의 오류가 발생한 편과, 이를 지적하고 오류에서 빠져나오길 요구하는 편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앞서 살펴본 대로, 무엇이 진실인지 아는 상태에서 평가할 수 있을 뿐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그 가운데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분별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분별을 오류라 지적합니다.
우리의 화두를 한번 더 떠올릴 때 입니다.


(채널A, 링크)
손바닥만 한 신체 기관의 기능일 뿐
앞서 우리는 분별이 얼마나 자주 오류를 일으키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분별 오류의 빈도는 쉽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분별 그 자체가 망상이므로, 이 관점에서 분별 오류의 빈도는 100%, 즉 모든 분별은 오류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분별은 착각이라는 것이죠. 좀 더 불교적인 맥락에 보면, 우리는 존재하는 ‘대상’을 분별하면서, 그 ‘범주’도 존재한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눈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존재가 강아지라는 분별을 하다 보면, 강아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의 그림에 삼각형이 포개져 있으니, 삼각형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 어떤 범주도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아지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명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강아지라고 부르는 것이죠. 삼각형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모양을 삼각형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말 그대로 라벨을 붙일 때 그 라벨에 쓰여있는 이름일 뿐입니다. 모든 범주가 이름에 불과하다면, 분별은 그저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망상일 뿐이라는 결론에 쉽게 이르게 됩니다.
모든 범주는 이름에 불과하고, 모든 분별은 망상이라는 견해는 일면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분별이라는 것에는 무언가 더 객관적이고 실존적인 면이 있을 것이라는 미련이 남습니다. 저 착시는 치워두고라도 삼각형이라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강아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강릉 사투리와 다른 것은 물론이고 대구 사투리나 마산 사투리와도 분명하게 다른 부산 사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극우적 정치 성향과 진보적 정치 성향은 분명 각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중 오류가 있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 모두가 망상이라는 건 너무 극단적으로 느껴져 거부감이 듭니다. 나아가 정치적 맥락에서의 분별을 모두 망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더욱더 납득이 어렵습니다. 파시즘의 폭력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역사로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파시즘도 민주주의도 모두 이름뿐인 것이라고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갈등의 축이 존재냐 비존재냐, 실존이냐 허무냐와 같은 무거운 주제라면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너무나도 버거운 문제가 됩니다. 학교나 회사에서 극우 매체들의 가짜 뉴스를 보고 진실이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야만 하는 불편한 일상이나, 해외에 친인척이 있어서 미국, 러시아, 유럽의 국제 정세가 매일매일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일에 있어서, 그 모든 정치적 분별이 망상이라는 말은 하등 도움 되지 않는 말장난처럼 느껴집니다. 분별의 오류가 정치적 갈등을 더 심화시키는 기재는 인정하지만, 분별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기에 이 딜레마는 도저히 해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Shutterstock, 링크)
하지만 실상 이건 그렇게 무거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인간의 뇌 왼쪽에 손바닥만 하게 자리 잡은 좌뇌의 기능에 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본 분별이라는 기능의 내용과 그 기능을 수행하는 좌뇌의 특징, 그 특징으로 인해 오류가 발생함에도 거기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 이 모두는 좌뇌의 기능적 특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가치의 본질적 논의도 아니고, 삼각형이라는 기하 도형의 본질에 대한 탐구도 아닙니다. 위에서 위산으로 음식물을 분해하고, 폐에서 혈액으로 산소가 공급되며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듯, 좌뇌 중에서도 일부 영역이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게 좀 까다로운 오류가 있을 뿐입니다.
새들은 사람이 볼 수 없는 색깔을 볼 수 있지만, 그 사실에 대해 우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치타가 사람보다 빨리 달린다는 점에 대해서나, 박쥐가 초음파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좀 부러울 순 있어도 존재론적 갈등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저 신체 기관의 기능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뇌를 갖고 있지만, 그 기능에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건 철학적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가 가진 신체 기관의 성능에 대한 검토에 가까운 것입니다. 사람의 다리 근육은 거북이보다 빨리 달릴 수 있고 치타보다는 느리다, 정도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 관점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화두가 지닌 딜레마에서 발생했던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집니다. 첨예해 보이던 갈등과 모순에 약간의 틈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 여유 공간에서 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분별 망상의 좀 더 깊은 이야기를 위해 불교 인식론과 연기설 같은 내용을 조금씩 알아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뇌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비교적 최근 이론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춘심애비
제보 및 연재 문의
ddanzi.master@gmail.com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에 대한 검색결과는 제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