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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어리딩 문화가 영국에 자리 잡지 않은 이유를 단순히 테라스 문화와 팬 중심의 응원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 뒤에 숨은 메커니즘, 그 밑바닥에는 여성을 둘러싼 오랜 사회적 긴장이 깔렸다. 영국이 처음부터 성평등을 추구하던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 영국 여성은 법적으로 완전한 시민이 아니었고, 결혼한 여성의 재산은 남편에게 귀속되었으며 이들은 투표권조차 갖지 못했다. 가정의 영역에 속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사회의 주변부에 놓인 채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상황이 바뀐다.
서프러제트, 여성 참정권 운동의 시작

1914년 국왕을 만나려다 버킹엄궁 앞에서 체포되는 행크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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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를 창설한다. 이 단체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이며 남송보다 열등하거나 지능이 낮은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했다. 단순한 청원 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여성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라는 선언이었다.
"Deeds, not words(말이 아니라 행동을)"
여성들이 거리로 나왔다. 시위를 하다가 때로는 공공건물을 점거하고 폭탄을 설치해 공공 기물을 파손했다. 마치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의 항일운동과 비슷했다. 단식 투쟁을 단행하고 체포와 투옥까지 감수했다. 이 운동은 당시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여성도 정치적 요구를 할 수 있고 권력을 압박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 결과 1918년, 영국 의회는 선거법을 개정한다. 그러나 완전한 평등은 아니었다. 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1918)에 따라, 30세 이상의 일정한 재산 요건을 충족한 여성에게만 참정권이 제한적으로 부여되었다. 반면 남성은 21세 이상이면 대부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여성은 시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조건부 시민이었다. 이에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동등한 참정권을 요구했고, 10년이 지나 1928년, 정부는 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1928)을 통과시키면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21세 이상이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25년 간의 저항을 통해 비로소 법적으로 완전한 정치적 평등을 확립한 것이다. 이 전환을 계기로 여성은 정책과 권력을 선택하는 존재가 되었다. 경기장 응원석에 앉아 혹은 응원석 옆에 서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참정권을 요구하고 실제로 쟁취한 주체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축구장에서 쫓겨난 여성들
1921년, 축구 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는 여성의 축구를 금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참정권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여성은 정치적으로는 시민이 되었지만 스포츠 영역에서 배제된다. 협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랬다.
"축구는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은 경기이며 장려되어서는 안 된다."
일부 자선 경기에서 모금된 자금이 투명하게 관리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여성의 건강과 도덕성 그리고 재정 관리에 대한 우려로 내린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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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사회는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 수많은 남성이 전선으로 떠나면서 공장과 사회의 여러 영역은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군수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들은 퇴근 후 축구팀을 조직했고 경기를 열었다. 이 경기는 전쟁 부상자를 위한 기금 모금 경기였으며 때로는 수만 명의 관중을 모았다. 1920년 리버풀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한 경기에는 5만 명이 넘는 관중이 입장했다. 여성 축구는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대중 스포츠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1차 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나타났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성들이 다시 일자리와 공적 공간을 되찾는 과정에서 전시(戰時)에 확장되었던 여성의 영역은 자연스럽게 축소되었다. 사회 전체에는 정상 질서, 즉 남성 중심 사회로의 복귀라는 분위기가 흘렀다. 여성은 전쟁하는 동안 공적 역할을 수행했지만, 평시에는 다시 가정과 주변부로 돌아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축구의 인기는 단순한 스포츠 현상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녔다.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뛰는 여성 선수들은 능동적이고 경쟁적인 주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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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요인은 경제적 이해관계였다. 당시 축구 경기장은 FA의 통제 아래 있었고, 관중과 수익은 제한된 자원이었다. 여성 경기의 흥행이 남성 경기와 경쟁하는 수준으로 성장할 경우, 기존 구조에 균열이 생길 수 있었다. 공식 문서에 이러한 우려가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다수의 역사 연구는 전후 남성 축구 구조를 보호하려는 이해관계가 작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여기에 의료 담론도 더해진다. 20세기 초, 격렬한 신체 활동이 여성의 생식 능력을 해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여성의 몸은 본질적으로 연약하며, 과도한 운동은 건강에 부정적이라는 주장이 의학적 권위를 빌려 제기되었다. 당시의 인식 구조로 보았을 때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는 주장이었다.
1921년의 여성 축구 금지는 단순히 스포츠 분야에서만 작동하는 행정 조치가 아니었다. 전쟁 이후 성 역할을 재정비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공적 공간을 둘러싼 권력 구조의 유지 그리고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918년과 1928년을 거치며 여성은 투표소에는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만 축구 경기장에서는 뛸 수 없게 되었다. 이 역사는 영국 사회의 여성 인권 역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다. 여성은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고 그 싸움은 정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노동, 교육, 스포츠 등 공적 공간의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성 상품화 반대, 배제와 저항의 기억
영국에서 여성의 권리는 거리에서 요구하고 감옥에서 단식하며 쟁취한 것이다. 정치적 시민권, 교육 기회, 노동권, 스포츠 참여 권리도 마찬가지다. 권리는 투쟁의 산물이라는 기억이 기저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영국 사회는 공적 공간에서 여성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대한 감수성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특히 여성의 신체를 소비하거나 시각적 장식으로 전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반복적인 논쟁이 인다.

<The Sun>의 3면에는 상반신을 노출한 여성 모델의 사진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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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사례가 대중지의 'Page 3' 논란이었다. 1970년 11월, 영국의 대중지 <The Sun>은 상반신을 노출한(토플리스, Topless) 여성 모델의 사진을 3면에 게재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이 코너는 전통이라 불리며 유지되었으며 지지자들은 관습이자 유머로 또 일부는 표현의 자유 문제로 옹호했다.
그러나 여성의 신체를 공적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상품화하는 행위라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온라인 캠페인과 여성 단체의 조직적 활동이 강화되면서 <No More Page 3>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공공장소에 배포되는 신문에 여성의 몸을 성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시하는 것은 부적절한 사회적 메시지라고 비판하며, 여성이 여전히 보여지는 존재로 배치된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논쟁은 신문사의 편집 방향에 국한되지 않았다.
'여성의 신체 공개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인가?'
아니면 '구조적 성 역할을 강화하는 장치인가?'
영국 사회는 위 질문에 대해 오랜 기간 공개 토론을 벌여왔고 2015년, Page 3의 상반신 노출 사진은 중단되었다. 이 사건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여성은 성 상품화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비판하고 수정하려는 사회적 역량이 존재하며 비판의 중심에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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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이후 5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여성의 축구 금지령은 197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해제된다. 1970년대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 전반에서 여성 해방 운동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참고로, 스위스 역시 1970년 후반이 되어서야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했다). 노동 시장 진입, 동일 임금 요구, 재생산 권리, 교육 기회 확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의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확산되었다. 또한 영국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여성의 스포츠 참여권을 요구해 왔고, 축구 협회는 더 이상 여성의 축구를 금지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후 여성 축구는 천천히 제도권 안으로 돌아왔다. 초기에는 인프라와 지원이 부족했고 남성 리그와의 격차도 컸지만, 선수들은 굴하지 않고 경기의 중심으로 들어와 공적 공간에서의 지위와 권한을 얻어냈다.
미국식 치어리딩 모델은 여성에게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여성을 경기의 주변부로 구조화한다. 그동안 영국 여성들이 주창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는 맞지 않았다. 미국식 치어리딩 문화가 영국에 스며들지 못한 이유다.
영국엔 치어리더가 없다. 다만 선수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스포츠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여성이 어디에 위치할 것인지에 대한 오랜 역사적 선택의 결과이다.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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