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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이런 말이 나온다. 룰라의 이상민이 사업만 망하지 않았어도 지금쯤 3대 기획사의 수장이 되어있을 거라고. 진짜 그럴 수 있었을까.

 

얼마 전, 컨츄리꼬꼬 멤버 신정환의 유튜브 속 발언이 다시 화제가 됐다. 룰라 활동 당시 정산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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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을 못 받았다는 칩사마

(스포츠동아,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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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발끈한 이상민의 SNS

(동아일보, 링크)

 

하지만 이들의 기억 속 타임라인은 꽤 뒤섞여있다. 해당 유튜브에서 신정환이 말한 ‘5년의 정산금’과 ‘1집 이후 회사를 팔아넘겼다’라는 이야기는 룰라 시절과 컨츄리꼬꼬 시절이 겹쳐 있는 내용이다. 두 시기 모두 이상민은 프로듀서로 참여했지만, 회사의 대표는 아니었다. 악덕 업주처럼 보여진 이상민으로서는 억울할 만하다.

 

그렇다고 모든 내용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한때 잘나가던 제작자이자 기획사 대표로 각인된 이상민의 이미지와 짠한 에피소드를 내세운 자숙 연예인의 대환장 콜라보가 만들어낸 작은(?) 오해였다.

 

1997년, 5집을 끝으로 해체한 룰라는 각자의 활동을 시작했다. 상민은 룰라의 음반사였던 월드뮤직과 전속 프로듀서로 계약을 맺었고, 채리나는 원소속사 서울인프로덕션에 남아 새 그룹을 준비했다.

 

당시 월드뮤직이 제작한 룰라 2집은 초대박을 기록하며 100억 원대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가수 한 팀이 스타가 됐을 때 회사에 어떤 결과가 돌아오는지 제대로 체감한 순간이었다. (소속사 서울인프로덕션과 음반사 월드뮤직을 공동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월드뮤직은 이때를 기점으로 신인 발굴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며 단순 제작사를 넘어 매니지먼트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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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훈 1집 - 내가 선택한 길〉(좌)

〈탁재훈 2집 – 1:2〉(우) 

 

그렇게 월드뮤직 신인으로 제작된 가수가 탁재훈이다. 1995년 발표한 그의 데뷔곡은 일본의 ‘나가부치 츠요시’ 이미지를 대놓고 ‘복붙’하며, 룰라의 흑역사 ‘천상유애’를 소환하게 했다. 결과는 물론 실패였다. (본인피셜 판매량 4천 장)

 

하지만 투자 기조는 유지됐다. 여기저기 신인 발굴에 물량을 투입한 결과, 1997년을 전후해 서서히 히트작이 나오기 시작하며 라인업이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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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 2집 - 맨발의 청춘〉(좌)

〈업타운 1집 - 다시 만나 줘〉(우)

 

조진수와 함께 야차로 활동했던 김병수는 그룹 벅의 멤버로 참여해 2집 〈맨발의 청춘〉을 월드뮤직에서 발표했고 빠른 BPM의 곡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파일럿〉의 OST를 통해 이름을 알렸던 정연준은 교포 3명과 함께 혼성 그룹 ‘업타운’을 결성했다. 업타운은 1집 〈다시 만나 줘〉로 성공적인 데뷔를 치렀다.

 

특히 업타운은 특유의 교포 바이브로 솔리드 때보다 한층 더 진한 블랙뮤직 색채로 주목받았다. 또 국힙 원탑 윤미래가 데뷔 초부터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많은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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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1집 - 너 그럴 때면〉(좌)

〈이브 2집 - EVE〉(우)

 

1995년에는 밴드 ‘걸’로 활동했던 김세헌이 월드뮤직에 둥지를 틀고 ‘EVE’로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상 1인 밴드 체제에 프로듀서 겸 작곡가 G고릴라가 객원으로 참여하는 형태였고, 2집까지 발매하며 비약적으로 존재감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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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바 1집 - 그래〉

작곡가로 참여한 양창익은 ‘브라운아이즈’ 윤건의 본명이다.

 

1997년에는 채리나가 한국의 TLC를 지향한 디바를 결성했다. 걸스힙합을 베이스로 이상민이 프로듀싱하고 양창익이 작곡한 〈그래〉로 데뷔했다. 당시 대성기획의 이호연 사장은 룰라 해체 이후 FA 시장에 나왔던 채리나에게 자신의 회사에서 그룹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디바는 룰라 시절에도 독보적으로 인기 있었던 멤버 채리나의 새 그룹으로 화제를 모으며 그녀의 독립 활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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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츄리꼬꼬 1집 - 오 해피(좌)

샵 1집 - yes(우)

 

1998년, 월드뮤직과 프로듀서로 계약 중이던 이상민은 탁재훈과 신정환을 묶어 컨츄리꼬꼬를 기획한다. 코믹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운 예능형 가수 전략이었다. 이들은 가수로서의 활동보다 ‘좋은 친구들’, ‘서세원 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입담과 밑도 끝도 없는 개그로 존재감을 알렸다. 대중 역시 이들을 진지한 보컬 그룹이라기보다는 유쾌한 캐릭터로 받아들였다. 1세대 아이돌이 가요계를 장악했던 시기, 컨츄리꼬꼬는 다른 결의 전략으로 인지도를 확보한 팀이었다.

 

같은 해 혼성 그룹 샵 1집도 기획하며 프로듀서로서 활동 폭을 넓힌다. 하지만 두 팀 모두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성공적인 출발은 한 것은 아니었다. 컨츄리꼬꼬는 가수라기보다 예능 캐릭터 이미지가 강했고, 야심 차게 준비한 샵 역시 이상민이 만든 타이틀곡은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뚜렷한 히트 없이 시간이 흐르면서 월드뮤직과의 관계도 점차 틀어졌고, 결국 그는 자신이 발굴해 데뷔시킨 팀들의 차기 앨범 프로듀싱에서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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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 엔터테인먼트 역시 이상민이 대표는 아니었다.

룰라 6집 - 기도(좌)

브로스 - 윈윈(우) 

 

1999년, 돌파구가 필요했던 이상민은 룰라 시절 스태프들과 함께 A&B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다. 그리고 흩어졌던 룰라를 다시 모아 6집으로 컴백했다. 전성기 멤버로 재결합한 6집은 활동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큰 호응을 얻었다. 룰라 커리어 중에서도 이상민의 색이 가장 짙게 묻어난 앨범으로 평가받으며, 그는 다시 한번 프로듀서로서의 존재감을 입증했다.

 

이 흐름을 발판 삼아 자신이 제작했거나 제작 예정이던 가수들을 모아 ‘브로스’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선보였다. 기세가 오른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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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크라 1집 - 한(좌)

디바 4집- Up & Down(우)

 

이듬해 그는 4인조 걸 그룹 샤크라를 데뷔시킨다. 데뷔 후 비교적 이른 시일 내 1위를 기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인도풍의 이국적인 콘셉트는 당시 걸 그룹 시장에서 보기 드문 시도였다.

 

채리나가 빠진 디바 역시 구심점이 사라졌다는 우려와 달리 히트를 이어갔다. 두 팀 모두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지만, 콘셉트의 선명함만큼은 확실했다. 이 시기는 프로듀서 이상민의 전성기로 불린다.

 

이 흐름을 바탕으로 2001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기획사 ‘상마인드’를 설립한다. 당시 자신감과 위세는 3대 기획사 못지않았지만, 상승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Q.O.Q, 엑스라지 등 새롭게 선보인 팀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투자금과 개인 자산까지 투입한 앨범들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이후 제작에 참여한 김지현 솔로 앨범, 이혜영 1집, 백지영 4집까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다른 사업까지 꼬이기 시작하면서 자금 사정은 급격히 악화됐고, 완성된 백지영 5집은 끝내 발표하지 못했다. 계약 해지가 아닌 내용증명 발송이라는 방식으로 갈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빛났던 시절은 이 무렵을 기점으로 저물기 시작한다.

 

당시 이상민은 기획력과 콘셉트 설계 면에서는 분명 강점을 보였지만, SM·YG·JYP처럼 메가 히트를 연속으로 만들어낸 프로듀서로 보기는 다소 애매한 지점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데뷔시킨 가수들의 전성기는 그가 프로듀싱에서 손을 뗀 이후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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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바 2집 – 왜 불러(좌)

컨츄리꼬꼬 2집 – 일심(우)

 

디바는 2집에서 처음 1위를 기록했는데, 당시 프로듀서는 양창익(윤건)이었고 대표 히트곡 〈왜 불러〉는 최준영 작곡이었다. 마찬가지로, 컨츄리꼬꼬를 인기가수로 만들어준 2집 타이틀곡 〈일심〉 역시 최준영 작곡이었다. 신정환이 훗날 언급한 “1집 이후 우리를 회사에 팔아넘겼다”라는 발언도 시기상 이 무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월드뮤직이나 A&B 엔터테인먼트의 대표가 이상민은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5년간 이어졌다는 정산 갈등 역시 룰라 시절 서울인프로덕션, 컨츄리꼬꼬 시절 월드뮤직 측의 문제로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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샵 2집 - 가까이, Tell me Tell me(좌)

샵 3집 - 잘됐어!(우)

 

샵 역시 2집부터 대중적 인지도를 본격적으로 얻기 시작했다. 해당 앨범은 박근태가 프로듀싱을 맡았고, 이후 팀은 룰라·쿨에 이어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게 된다. 팀이 큰 인기를 얻은 시점이, 항상 이상민의 초기 기획 방향과는 다른 노선으로 활동하던 때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대목은 이상민 커리어에서 반복되는 아이러니로 남는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컨츄리꼬꼬, 업타운, 샵, 이브 등이 소속된 월드뮤직은 이상민 개인의 부침과는 별개로 라인업이 탄탄한 중견 기획사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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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니 1집 - 경고(좌)

T 1집 - 시간이 흐른 뒤(우)

 

윤미래는 정연준의 프로듀싱 아래 솔로 앨범을 준비하던 중 애니가 합류하며 ‘타샤니’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위상과 비교하면 타샤니는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이후 업타운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팀이 계속 유지되기 어려워지자, 윤미래는 ‘T’라는 이름으로 솔로 데뷔해 큰 성공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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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4집 - I'll be there(좌)

샵 3.5집 -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우)

 

한편 이브와 샵이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 월드뮤직은 음반 제작을 넘어 유통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멀티 레이블 체제를 구상 중이던 SM과 협업을 맺고 투자까지 유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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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요사에 전례 없던 멤버간 현피 사건

 

그러나 2003년 2월, 이랬던 월드뮤직이 갑작스럽게 최종 부도 처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2002년 말, 회사의 대표 가수이자 수익원이었던 샵이 여성 멤버 간 불화로 하루아침에 해체되면서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것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문제는 월드뮤직 대표 김 모 씨가 샵 해체 이후 SM으로부터 받은 선급 투자금을 상환하지 않은 채 고의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월드뮤직 소속 가수들의 저작인접권은 SM으로 넘어갔고, 정산이 중단되거나 소송에 휘말리는 등 긴 공백기를 겪게 된다. 결국 가장 큰 피해는 소속 가수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이 과정에서 윤미래는 월드뮤직과의 불공정 계약과 열악한 대우 문제로 활동이 장기간 중단되며 표류하게 되었고, 그동안 잘 활동하던 이브 역시 해체를 맞이하게 됐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이상민이 제작한 팀들 역시 연이어 성과를 내지 못했고, 번외로 했던 여타 사업까지 흔들리며 그는 구설에 오르게 된다.

 

사실 이상민은 월드뮤직 초기 라인업의 프로듀싱을 맡았다는 이유로 대중에게 그가 회사의 대표였다고 오해를 산 억울한 사정이 있다. 이상민은 그저 계약 프로듀서로 참여했을 뿐 경영 책임을 질 사람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분명 번뜩이는 기획 아이디어로 주목받았던 순간이 있었다. 다만 그 성과가 지속되지 못했고, 가요계에 장기적인 시스템이나 산업 구조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SM·YG·JYP와 같은 대형 기획사 반열에 오를 가능성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월드뮤직 사태는 김 모 대표와 같은 사람들로 인해, 당시 연예 제작자 전반에 대한 불신을 뿌리 깊게 만들었다.

 

이상민의 커리어는 늘 한발 앞선 기획과 한발 늦은 결과 사이에 놓여 있었다. 방향은 맞았지만, 타이밍과 구조는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형 기획사 수장’이 되지는 못했지만, 2000년대 초반 가요계의 굴곡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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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Jay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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