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만난 노동자 출신 대통령들
브라질 대통령 전용기가 서울 공항에 내려왔다.

금속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그리고 소년공 출신으로 정치적 부침과 수많은 고비를 넘어 이 자리에 선 이재명. 순탄한 엘리트 코스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두 정상이 마주했다.



23일 청와대에서 국빈 방한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을
이재명 대통령이 맞이하며 포옹하는 모습
출처-<연합뉴스>
가난과 실패, 고난과 시련을 통과해 권력의 정점에 오른 두 지도자가 청와대에서 포옹과 함께 손을 맞잡았고 카메라는 악수를 비췄다. 그 순간만큼은, 고생을 딛고 올라온 두 인물이 서로의 시간을 인정하는 장면으로 충분해 보였다.
여러 재래식 언론에서 딱 이 수준까지 다뤘다.
‘노동자 출신 대통령들의 만남’
‘비슷한 환경을 헤쳐온 대통령들의 만남’
여기서 하나 더해진 정도라면,
‘한국-브라질,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
본지는 한 스텝, 두 스텝 더 들어간다.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건 알겠다. 이게 룰라 대통령이 온 목적인가? 그러면 이게 한국과 브라질 사이에서 정확히 어떤 변화가 생김을 의미하는가?’
브라질 대통령을 초청한 진짜 이유
국가 정상들도 사람이다 보니 어떤 정상에게 인간적으로 좀 더 끌리기도 하고 비호감으로 느끼기도 한다. 정상끼리 외교 할 때 이런 부분도 영향이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국제 외교는 차갑다. 냉철하다. 이것이 기본이다.
두 정상이 서로에게 인간적인 친밀함을 느꼈다고 해서 시간과 에너지, 돈을 써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오진 않는다. 이번 정상회담이 이뤄진 건, 두 국가 사이 새로운 전략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브라질 공동 언론 발표
이번 한-브 정상회담으로 인해 두 국가 사이 행동계획이 채택됐고, 10건의 문서에 서명했다. 정례 협의체를 만들고, 경제·금융 대화를 열고, 과학기술 공동위원회를 가동하겠다고 했다. 핵심 광물 협력, 보건 규제 협력, 농식품 시장 접근, 치안 협력까지 한 묶음으로 올려놓았다.
뭔가 여러 분야 협력을 하겠다는 거 같은데, 국가 사이에 이런 식으로 협력을 약속했다고 하는 건 수도 없이 봐 온 흔한 장면이다.
질문은 지금부터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표한 한국-브라질의 새로운 국가 전략 설계도는 실제 투자로 이어질 수 있을까. MOU가 계약으로, 계약이 자본으로, 자본이 공장과 일자리로 이어질 수 있을까. 아니면 이번에도 ‘전략적 동반자’라는 말만 남기고, 몇 년 뒤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이제 감동적인 장면은 잠시 걷어내고, 냉철하게 따져보자.
“이번 한-브라질 정상회담은 외교 이벤트였나? 진짜로 한국이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이었나?”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이었다. 미국, 중국, 유럽 외에 새로운 경제 네트워크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다. 이제 막 출발선에 발을 올려놓은 상태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 국내 시장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그런데 미국, 중국, 유럽에 수출이 흔들리면 바로 성장률이 꺾인다. 이건 이념이 아니라 구조다. 문제는 그 세 시장이 동시에 성숙 단계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인구 증가율은 낮고, 보호무역은 강화되고, 기술 규제는 점점 정치화된다. 우리가 잘 팔던 시장이 더 이상 마음 놓고 팔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글로벌 사우스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아직 성장 여력이 남아 있는 국가들, 인구가 늘고 산업화가 진행 중이며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글로벌 사우스 지도
출처-<대한상공회의소>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나온다.
“글로벌 사우스로 간다고 해서 자동으로 돈이 되는가?”
아니다. 그냥 가면 안 된다. 글로벌 사우스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조건이기 때문이다. 리스크가 높고, 정치가 복잡/불안하고, 제도는 느리다. 단순 수출 전략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비용만 늘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재명 대통령은 브라질을 선택했나?”
공급망 때문이다.
한국 산업의 약점은 자원이다. 니켈, 희토류, 철광석, 농산물, 에너지, 대부분을 수입한다. 공급이 막히면, 산업 전체가 흔들린다. 글로벌 사우스는 그 취약성을 보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미국, 중국, 유럽과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도전이다.
지금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 시장 사이에 서 있다. 기술, 통상, 안보 규범이 동시에 충돌하는 구조다. 어느 한쪽의 정책이 바뀌면 비용이 즉각 발생한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통신장비까지 모든 산업이 그 압력 안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지가 둘뿐이라면 협상력은 줄어든다. 출구가 하나뿐인 방에서는 조건을 스스로 정하기 어렵다. 글로벌 사우스는 그 출구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다.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거대한 제3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것, 시장만이 아니라 자원과 협력 채널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공급망을 다변화하면 제재에 덜 흔들리고, 시장 접점을 넓히면 규범 압박에 숨 쉴 공간이 생긴다. 그래서 글로벌 사우스 전략은 성장 전략이면서 동시에 생존 전략이다. 이게 첫 번째 손에 잡히는 가치다.
질문은 더 이어진다.
“글로벌 사우스가 중요하다면, 그중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가?”
글로벌 사우스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아프리카, 남미, 남아시아, 중동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범주다. 모두 성장 잠재력이 있다고 해서 모두 관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진출 국가”가 아니라, 권역으로 연결되는 입구다.
여기서 브라질이 등장한다.
브라질은 남미 최대 경제 국가다. 인구 2억이 넘고, 자원도 많고, 농업도 강하다. 더 중요한 것은 브라질이 남미공동시장, 메르코수르(MERCOSUR)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남미공동시장 ‘메르코수르’
출처-<산업통상자원부>
브라질을 통하면 남미 권역 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 브라질 하나가 아니라 전체 시장 시스템으로 연결되는 입구라는 뜻이다.
그러나 브라질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전술했듯 정치가 불안하고, 행정이 느리다. 환율이 출렁이고, 보호주의 전통도 강하다. 그래서 브라질은 기회이면서 동시에 시험대다.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는 여기서 나온다. 단순히 우호를 확인한 자리가 아니다. 행동계획을 만들고, ‘정례’ 협의체를 만들고, 규제 협력 채널을 열었다.
이게 왜 중요하냐. 외교는 말이 아니라 루틴이기 때문이다. 매년 열리는 회의, 정해진 절차, 워킹그룹, 이런 것들이 쌓여야 전략이 된다.
과거에도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했다는 표현은 여러 번 등장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굴러가게 하는 운영 구조는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 정책은 있었지만, 스스로 굴러가는 루틴은 만들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냉전 해체라는 시대 흐름 속에서 외교적 돌파를 이뤘지만, 이후 장기적인 산업 구조 재편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아세안과의 관계를 전략적 수준으로 끌어올렸지만, 공급망 의존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두 정책 모두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도였지만, 시장을 넓히는 데 초점을 두었지, 산업의 안전판을 재설계하는 전략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이번 접근은 범위가 넓다. 공급망, 규제 협력, 보건, 금융 대화, 치안 협력까지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단순한 시장 확대를 넘어 산업과 제도 환경을 함께 다루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이전 접근과는 결이 다르다.
한-브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

이번 정상회담이 보여준 잠재적 가치는 분명하다.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 시장 확대가 아니라 공급망과 경제 안보를 엮어 보려는 시도다.
하지만 아직 숫자로 성과가 증명되진 않았다. 투자 계약이 체결된 것도 아니고, 광물 공동 프로젝트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아니며, 통상 협상이 본격 재개된 것도 아니다. 설계도는 나왔지만, 건물은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
이 상태로 멈추면 또 하나의 선언 외교로 남는다. ‘전략적 동반자’라는 말만 기록에 남고, 몇 년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제 실질적 발을 내디뎌야 한다. 올해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무엇보다 올해 안에 눈에 보이는 결과가 하나는 나와야 한다. 크지 않아도 된다. 파일럿이라도 좋다. 계약으로 전환되는 사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설계도가 종이에 머물지 않는다.
시장은 실제 숫자를 본다. 광물 가공 합작 투자든, 보건 규제 협력 파일럿이든, 공동 연구 착수든 실제로 움직이는 사례가 나와야 신호가 된다. 기업은 말이 아니라 선례를 보고 움직인다. 한 건이 생기면 다음이 가능해진다. 그전까지는 관망이다.
그다음은 금융이다. 글로벌 사우스는 저위험 시장이 아니다. 민간이 먼저 뛰어들 환경이 아니다. 환율은 출렁이고, 인허가는 길고, 정치 변수는 늘 존재한다. 이런 시장에서 기업이 단독으로 자본을 투입하기는 쉽지 않다.
수출금융, 무역보험, 정책금융이 위험을 나누지 않으면, 구조는 돌아가지 않는다. 정부 주도의 금융이 앞서 움직이지 않으면 전략은 문서에 머문다.
국내 정치도 통과해야 한다. 브라질과의 협력은 결국 시장 접근 문제와 연결된다. 농업, 쇠고기, SPS(위생 검역 기준) 같은 사안은 언제든 여론의 쟁점이 될 수 있다. 과학과 절차로 관리하지 못하면 외교는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다. 전략은 외교부의 문서가 아니라 정치적 합의를 통해 완성된다.
마지막 변수는 시간이다. 브라질은 2026년 대선을 앞두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 우선순위가 달라질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브라질 정치 지형은 여전히 양극화되어 있고, 극우 세력 역시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브라질의 대선은 올 10월에 진행된다.
룰라 현 대통령의 대선 상대로
가장 가능성 높은 후보는
보우소나루의 정치적 후계자로 꼽히는
자유당의 타르시지우 데 프레이타스이다.
현 상파울루 주지사다.
그래서 인물보다 구조가 더 중요하다. 정상 간의 친분이나 정치적 의지가 아니라, 차관급 협의, 공동위원회, 워킹그룹 같은 실무 체계가 정례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협력의 틀이 유지되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전략은 사람 위에 세우면 흔들린다. 루틴 위에 세워야 버틴다. 외교는 결국 인물보다 시스템이 오래 간다.
확장형 파워 국가가 되겠다
결국 질문은 여기로 모인다.
“한국은 확장형 파워 국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기존 시장에 매달린 채 위험을 관리하는 수출국으로 남을 것인가?”
지금까지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 시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왔다. 그러나 미·중 경쟁이 기술, 통상, 안보 규범까지 확장되면서 선택 압박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 선택지를 늘리지 않으면, 협상력은 줄어든다.
글로벌 사우스는 그 선택지를 넓히는 공간이다.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제3의 축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시장을 넓히는 의미로만 그치지 않는다.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공급망을 다변화하면 한쪽의 제재나 규제에 덜 흔들린다. 자원과 시장을 분산시키면 협상에서 여지가 생긴다. 미·중 사이에서 숨 쉴 공간을 확보하려면, 제3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미·중 경쟁이 장기화될수록, 선택지를 늘리는 것은 필수다. 이 선택을 미루면, 성장 경로는 점점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조건에서 브라질은 새로운 도전의 관문이다.
브라질은 간단한 선택지가 아니다. 이 나라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선거는 팽팽하고, 권력은 분산돼 있고, 정책은 항상 협상 속에서 나온다. 중앙 정부와 합의했다고 해서 일이 곧바로 굴러가는 구조가 아니다.
브라질은 기존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도전해도 되는 단순한 신흥시장이 아니다. 그간 우리가 주로 무역하던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국가다. 과거 미국 시장에 도전하던 방식과도 다르고, 중국 시장에 진입하던 방식과도 다르다.
20세기 중반, 한국 기업이 미국 시장에 도전했을 때는 자유주의 시장 질서라는 틀이 있었다. 규칙은 분명했고, 법치는 안정돼 있었으며, 경쟁은 치열했지만 구조는 명확했다.
20세기 후반, 중국 시장에 들어갔을 때는 국가 주도의 산업 전략이 있었다. 결정 권한이 중앙에 집중돼 있었고, 방향은 정부가 제시했다. 리스크는 있었지만, 판단 창구는 비교적 분명했다.
브라질의 최대 도시 상파울루
브라질은 다르다.
미국, 중국보다 사회적·환경적 변수도 크고, 질서 체계도 기존 무역 상대국과 다르다. 미국처럼 투명한 자유주의 질서도 아니고, 중국처럼 집중된 국가 주도 체제도 아니다. 협상은 다층적이고, 결정은 분산돼 있다.
그래서 새로운 유형의 도전이다. 브라질(및 남미 국가들)만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 제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문제다.
이것이 과거의 수출 공식이나 국가 간 합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외교와 산업 전략을 동시에 재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이 도전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축에만 기대는 전략은 점점 비용이 커지고 있다. 기술과 통상이 안보화되는 시대에, 선택지가 둘뿐인 구조는 점점 위험해진다.
이번 정상회담의 진짜 의미는 이 위험을 줄여 경제 안보 및 국제 협상력을 공고히 하려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남미공동시장 ‘메르코수르’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
“특정 국가에 매달리지 않는 확장형 파워 국가가 되겠다!”
라는 선언이랄까.
이제 우리는 그 입구인 브라질에 발을 올려놨다.
추신.
브라질의 정치 상황이 궁금한 독자께는 아래 연재 일독을 권한다. 한국과 많이 닮아 있는 브라질의 내란 사건에 대해 다룬 연재물이다. 두 나라는 깜짝 놀랄 만큼 최근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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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내란 연재물 |

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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