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 재산을 인정해 준 대한민국 법원
대한민국 1심 재판부에서 내린 재판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서울중앙지법
“친일파 땅이라고 해서 법률상 근거도 없이 재산권을 빼앗은 것은 법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원고에게 토지를 되돌려 줘야 합니다.”
항소심에서도 원심이 유지되었고, 대법원은
“원심 판결에 법리를 잘못 적용했거나 사실 판단을 오인한 것이 없다.”
라는 말로 국민의 마지막 희망마저 기각시켰다.
이완용의 후손이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또다시 사리사욕을 채우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역시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살아 있다니까! 하하하~ 우리 일류 변호사님들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나가보시고!”
“흠, 보자. 되찾은 땅이 평당 450만 원 정도라고? 그럼 한 30억쯤 되겠군. 혹시라도 또 뺏길지 모르니까 최대한 서둘러야겠군. 난 할아버지 말씀대로 미국 옆 캐나다에서 편안히 살아야겠어. 한국은 골치가 아파. 우리 집안은 그저 법에 따라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우리를 미워하나 몰라.”

앞줄 가운데가 이완용,
뒷줄 가운데가 아들 이항구
출처-<이완용 평전>
친일 재산 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이완용은 일제 강점기 전국에 걸쳐 676만 평에 이르는 부동산을 사들였는데, 이는 여의도 면적의 5배가 넘는다. 그러나 시류에 빠르게 편승하는 이완용과 그의 피를 물려받은 후손들은 해방이 될 것을 감지하고 대부분의 토지를 팔아치우고 현금화했다. 해방된 후 대한민국 정부가 국유화시킨 땅의 면적은 그가 소유했던 전체 부동산의 0.05%였다.
그런데, 그마저도 후손들이 소송에서 이겨 찾아간 것이다. 다시 일제가 강제 점령한 상황에서가 아니다. 독립된 대한민국 땅에서 대한민국 법원이 내린 판결로 일어난 일이다.
1993년 기사
출처-<한국경제>
이완용 후손의 조상 땅 찾기 성공은 이 땅에 암약하던 친일 귀족 후손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와우! 이게 된다고? 하하하~ 이야! 진짜 어메이징 코리아다. 그 서류 좀 가져와 봐. 우리도 움직여야지.”
2002년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진회 총재와 중추원 고문을 지낸 남작 송병준의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대한제국의 군대를 장제 해산시킨
정미칠적 중 한 사람인
송병준
"거기 미군 부대 부지 말이야! 거기가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 땅이었어! 여태 몰랐냐고?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 어! 그래? 그쪽 로펌 애들이 일을 잘한다고? 자네가 알아서 진행해 주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990년 이전에 친일파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이완용의 후손이 승소한 이후 무려 23건에 이르게 된다.
"일단 말이야. 민심이 불리할 땐 바짝 엎드려 있으라고. 그리고 좀 잠잠해지고, 법의 약점이 보이면 철판 깔고 들이대는 거야. 부자가 되려면 그래야 해. 연민, 동정, 양심 그런 거랑 교환하는 게 자본주의야."
문인 황현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비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에는 친일 귀족들이 분노한 대중을 피해 어떻게 엎드렸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매천야록
출처-<문화재청>
매천야록 속 친일 귀족의 모습
1905년, 을사늑약이 세상에 알려지자,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일부 친일파들의 집이 불타기까지 했다.
"매국노들을 때려죽이자. 나라를 지켜야 할 대신 놈들이 나라를 팔아먹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완용과 이근택(을사오적) 등은 서둘러 남산 인근의 어딘가로 모이기 시작했다. 친일 귀족들은 왜 진고개로 향한 것일까?
"어서 마차를 노다 헤이지로, 아니 송병준 백작 집으로 몰아라. 거기는 안전할 것이다."
잠시 후,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백성들을 피해 각자의 집을 떠난 친일 귀족들의 마차가 송병준의 집 앞에 당도했다.
"어서들 오시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잠잠해질 때까지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편히 쉬다 가세요."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것인데. 이 동네로 이사를 오든지 해야지."

(왼쪽부터)
이완용, 송병준, 이근택
출처-<오마이뉴스>
오늘날의 충무로와 명동 일대인 진고개는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친일 귀족들에게는 경성 내 어느 곳보다 안전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강제로 을사늑약까지 체결한 일본은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폈다.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조선 땅에 우리 일본인들이 살아야 한다데스! 제국을 위한다는 신념으로 배에 오르기 바란다데스. 또한 조선에 가면 일본보다 훨씬 쉽게 돈을 벌 수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데스."

일제강점기 당시 진고개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진고개 인근에는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 등이 들어서며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1900년 6천 명 정도에 불과하던 일본인 수는 1942년도에는 70만 명에 이르게 된다.
"남산 정상에는 조선신궁이, 명동에는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으니 조선 땅에서 이곳보다 더 우리 일본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곳이 어디 있겠스무니까!"

일제는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남산의 명당에
일왕의 시조신을 모신
조선신궁을 세웠다.
위 사진은 1930년대
조선신궁을 찍은 항공 사진이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친일 귀족들은 암살 정보가 입수되거나 3.1만세운동 등 거센 저항이 있을 때마다 남산 아래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데스. 그간 별고 없으셨스무니까? 이번에도 또 가짜 암살 신고겠지 않겠스무니까?"
"그럼 다행이지요데스. 그나저나 이 짓도 못해 먹겠데스. 칙쇼! 귀족인 내가 내 나라에서 언제까지 불안에 떨어야 한단 말이요데스."
"에이~ 무슨 말씀을, 저는 참을 만합니다데스. 이 정도도 예상 안 하시고 나서셨스무니까? 그동안 받으신 돈만 해도. 제법...."
"어허!"
제정된 친일재산환수법, 그러나...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마침내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이완용 후손의 재판 결과에 분노했던 국민들의 기대 또한 컸다.

당시 한나라당은 특별법을 반대했다.

특별법을 근거로
2006년에 출범한
친일 반민족 재산조사위원회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러니까 이 특별법을 근거로 친일파 놈들이 일제 강점기 동안 모은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킨다는 거지?"
"그렇지! 여기 이 말이 딱 맞구먼. 친일파 후손의 재산권 보장이라는 법적 안정성을 압도하는, 중대한 공익을 추구하는 입법적 대응이다. 당연하지! 법이 민심을 반영 못 하면 특별법이라도 만들어야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친일 청산을 해야지."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일차 대상지 233필지 중 무려 192필지를 보유했던 친일 귀족 이해승의 땅에 대해 환수 결정을 내렸다.
이해승
"출발이 좋습니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그리고 환수 결정된 땅 면적이..."
조선 귀족이 탄생하는 날, 윤덕영의 뒤에서 포즈를 잡고 있던 약관의 이해승이 있었다. 그는 1942년 조선귀족회장 자격으로 일본 육·해군에 현재 가치 20억 원에 이르는 후원금을 내며 경성일보의 1면을 장식했다.
조선귀족회관
출처-<위키피디아>
친일 귀족으로서 (전쟁으로 인해) 위기에 몰린 일본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그는 전국에 356만 평에 이르는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독립한 대한민국, 이완용 후손이 승소한 것에 용기를 얻은 다른 친일 귀족의 후손들은 국가를 상대로 친일 자산을 되찾기 위한 각종 소송을 걸었고, 그중엔 이해승의 손자도 있었다.
이해승의 손자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회장님! 저희 로펌에서 법리로 싸워 이기도록 하겠습니다."
이해승 측 변호사는 법정에서 기이한 주장을 펼친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특별법에서는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에 대해서 재산을 환수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승은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왕실의 종친 자격으로 부득이하게, 수동적으로! 은사금과 귀족 작위를 일본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
변호사는 특별법의 미묘한 틈새를 파고들었다.
"뭐.... 뭐라고! 저런 궤변이 어디 있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걱정 말게. 저게 말이 되나. 변호사도 참 애쓴다. 애써"
"그래도 이거 뭔가 불안한데."
국민들의 기우는 걱정으로 그치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이해승 후손의 손을 들어주었고, 2심 재판부는 '이해승의 당시 나이 겨우 20세 남짓했다. 그가 한일합병에 기여하였음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라고 했으며, 심지어 대법원은 별도 심리 없이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
출처-<대한민국 법원>
“원심을 확정한다. 땅! 땅! 땅!”
친일파들의 재산을 국가가 환수하는 일은 광복 수십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친일 재산 환수 위원회가 이해승의 후손들로부터 되찾은 땅은 고작 4제곱미터(1.21평)였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친일파 후손으로부터 환수하지 못한 친일 재산의 규모는 약 1,500억 원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반면,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은 가장이 없거나 가장의 경제적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생의 출발점에 서지도 못한 채 버려졌다.
독립유공자 복지회관에서 건물 청소를 하던 유장부 씨는 노환으로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고모의 이야기는 가족 친지들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집안에는 유관순 고모뿐만 아니라 여덟 분이나 건국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국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아도 해방된 조국에서 먹고살아야 하는 일은 해결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광복 80년 만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100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의 초석에는 개인의 안위보다 나라의 대의를 선택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3·1운동 및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105주년을 맞이해
기념 촬영한 독립운동가 후손들
출처-<세계일보>
그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대답을 할 준비가 되었을까.
"국민 여러분! 장하십니다. 장해요. 우리가 독립운동한 보람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한 나라를 여러분이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염치없지만, 우리 후손들도 좀 부탁합니다. 우리가 부모 노릇을 제대로 못 해서....."
아직도 활개 치는 친일 귀족의 망령과 그에 동조하는 법원의 판결, 여전히 고통받는 독립운동가 후손의 모습이 광복 후 수십 년이 지난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3.1절을 맞아 과거 독립운동가의 업적 및 희생, 그에 대한 감사를 되새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에 머물지 않고, 그와 관련된 지금의 현실이 어떤지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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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신간을 출간했다.
한국 역사에서 기묘하거나 비주류 이야기를 묶어 낸 책이라고!
역사를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으로 이해해 보고 싶은 독자께 권한다.
당신의 예감이 맞다.
슈퍼팩토리공장장이 말했다.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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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이라는 나이에 전업 작가가 되겠다며 회사를 때려치고 나온 슈퍼팩토리공장장.
이후 각종 글을 쓰며 발버둥 치던 그가, 드디어 방송까지 진출했다. 유튜브 및 IPTV인 Btv에서 방송되는 <역사썰명회>라는 방송이다.
중간중간 재연(?!)도 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는 댓글이라도 남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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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임권산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슈퍼팩토리공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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