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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풀리면서 비로소 봄이 오고 있습니다. 까마득해 보였던 지방선거도 이제 그리 머지 않은 일이 됐습니다. 서서히 올라가는 기온처럼, 선거의 기운도 아직 ‘선거열기’라고 하기엔 이르지만 적어도 ‘온기’ 정도는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를 대하는 우리도, 마치 겨우내 장롱 안에 묵어있던 운동복을 꺼낸다든가, 녹이 제법 낀 자전거를 손보는 마음과 같이 슬슬 채비를 합니다.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우리는 일면 설레이는 마음을 갖습니다.

 

우리는 왜 정치에 관심을 가질까요. 수많은 이유와 사연이 있겠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정치라는 행위는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우주에 나 혼자만 있다면 사회도 정치도 없겠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여러 문제가 생기죠.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려 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수 있는 문제를 미리 인식하면서 이를 막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어떤 사안을 목격하고 그것에 <문제>라는 라벨을 붙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분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힘을 합쳐 그것을 해결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정치인 것이죠. 그러므로 정치에 관심을 갖는 우리 모두는 분별이 꼭 필요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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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인천일보 (링크)

 

선거철에는 이 분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적극적인 시민들은 자기 지역 이외에도 나라 전체의 후보들의 면면을 보고 내가 지지하는 쪽에 승산이 있을지 예상해 봅니다. 그렇게까지 적극적이 아니더라도, 자기 지역 후보가 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인물들이 꼭 평소 알던 인물이 아닌 경우도 많다 보니, 나는 어떤 사람을 더 지지하는가, 어떤 사람이 더 후보로서 적당한 인물인가, 그렇게 정해진 후보는 과연 본선거에서 승리할 것인가 등등 수많은 판단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분별인 것이죠.

 

특히나 이런 선거철, 우리는 더더욱 ‘분별은 또한 망상이다’라는, 이 연재의 화두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난 2편에서 우리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작은 틈을 발견했습니다. 그 중요함과 필요함과는 별개로, 분별은 인간의 좌뇌가 수행하는 기능이라는 점입니다.

 

분별이 만들어낸 생각 속에서만 바라보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지만, 한발 뒤에서 바라보면 좌뇌라는 신체기관은 전혀 자명하지 않은 것을 자명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저 신체기관의 오류라는 점에서, 존재-비존재의 대립 같은 무거운 철학적 주제로 빠져들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는 내용이 지난 2편의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이 흐름에 이어 신체기관으로서의 <좌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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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조선일보 | 카이스트 (링크)

 

 

좌뇌에겐 마이크가 주어져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자네, 좌뇌한테 속았네>라는 책에서 저자인 크리스 나이바우어는 ‘좌뇌에게 마이크가 주어져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의학계에서는 19세기 말경 인간의 언어 중추가 좌뇌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한 세기 후에 들어서는, 로저 스페리의 유명한 연구내용인 <분리된 뇌(split brain)> 실험을 통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되죠.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부위를 ‘뇌량’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간질 발작 등의 증상에 대한 시술로 뇌량을 절단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는 뇌량에 종양이 있거나 하는 경우 불가피하게 뇌량을 절단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좌뇌와 우뇌가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죠. 이러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것입니다.

 

실제 실험의 내용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요약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분리된 뇌를 지닌 환자의 눈 사이에 칸막이를 설치해서 오른쪽 눈에는 사과만 보이게 하고, 왼쪽 눈에는 가위만 보이게 하는 것이죠. 두 눈은 서로 반대쪽 뇌에 연결되므로 좌뇌 입장에서는 사과만 보이고 우뇌는 가위만 보입니다. 이 때 무엇이 보이냐고 물으면 사과만 대답하고 가위는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할 수 있는 좌뇌는 가위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만약 오른쪽 눈을 가리고 다시 물어본다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언어 관련 기능이 오로지 좌뇌에만 몰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예시에서 대답을 하게 하지 않고, 지금 보이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한다면 우뇌에 연결된 왼쪽 손으로는 우뇌가 왼쪽 눈을 통해 본 가위를 그려낸다고 합니다. 즉,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우뇌도 할 수 있는 것이죠. 다만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좌뇌만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좌뇌에게 마이크가 주어져 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뇌는 마이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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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좌뇌가 분별이라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분별은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인데, 그 <이름>이라는 것이 바로 언어를 바탕으로 하니까요. 특히 정치와 같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분별이 필요한 경우에는 분별에 있어 언어의 사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진보적인 성향이지만 공산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아서 어느정도 자유경쟁 시장의 기능은 보장해야한다고 생각해’ 같은 말은 수많은 분별 과정을 거친 결과이면서, 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수많은 분별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면에서 말을 해내는 기능도, 분별을 하는 기능도 좌뇌가 담당한다는 점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여기서 제가 중요하게 짚고 싶은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나 정치적 사안에 있어서, 언어의 사용이 너무나도 중요한 나머지 우리는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에 전적으로 큰 비중을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정치와 거리가 아주 먼 무언가와 비교해 볼까요. 제가 좋아하는 뜨개질을 예로 들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뜨개질은 말로 설명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실타래에서 실을 조금 풀어서 왼손 엄지와 검지에 걸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실을 잡은 채로, 오른손에 바늘을 들어 왼손 엄지검지 사이의 실을 당겨와 왼손 엄지쪽 실 아래로 바늘을 넣어 들어올리고…’ 라는 식의 언어적 설명만을 보고 대바늘 뜨개질 첫코 잡는 법을 해내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영상을 보거나 옆에서 하는 것을 천천히 보면서 따라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익혀냈다고 해도 그것을 다시 말로 하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 저도 위 예시 문장을 쓰는데 꽤 애를 먹었구요. 그렇다면 적어도, 정치라는 건 뜨개질에 비해서는 언어라는 도구의 비중이 높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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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행위들과 비교해 본다면 정치적 행위는 분명 언어의 비중이 가장 높은 상위 그룹에 속할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주로 하는 일들은 토론을 하거나, 회의를 하거나, 연설을 하거나, 말로 가득 채워진 문서를 만들거나, 그것을 읽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그들의 말을 듣거나, 글로 표현된 정책 또는 법안을 읽고 판단하거나, 시민들 사이에서 토론을 하거나, 어떤 대상을 비판하는 말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어의 비중이 높다면, 우리는 정치라는 주제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에도 구체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뜨개질에 대해 생각할 때 머릿속에서는 어떤 개념들이나 단어들이 논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형태나 움직임이 떠오를 겁니다.

 

뜨개질을 안 해 보신 분들을 위해 다른 예를 들자면, 피아노 연주에 대해 생각할 때는 소리나 느낌을 떠올릴 것이고, 요리에 대해 생각할 때는 모습이나 맛이 떠오르겠죠. 이런 생각들은 언어가 아닌 다른 감각을 기반으로 하므로 비언어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치 같은 주제에 대해 생각할 때는 개념과 단어들이 논리적으로 연결될 겁니다. 편의상 이런 형태의 생각을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좌뇌가 담당합니다. 그리고 분별이라는 기능도 좌뇌의 기능이죠. 그러므로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도 좌뇌의 역할이 아주 클 것입니다. 그렇다면 뜨개질, 피아노, 요리 같은 주제에 비해 정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는 좌뇌의 비중이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가 많이 개입되는 주제들은 정치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겠죠. 예를 들어 경제나 재무등 숫자와 관련된 주제, 철학이나 문학처럼 말을 통해 표현해야 하는 주제 같은 것들은 언어의 비중이 크고, 그래서 좌뇌의 역할이 클 겁니다.

 

언어의 비중이 높은 주제에 대해서는 좌뇌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따로 짚어 강조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좌뇌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른손 잡이에게는 오른손의 역할이 크지만 그렇다고 오른손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듯이 좌뇌의 역할이 크더라도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강조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좌뇌가 수행하는 역할을 마치 <나의 생각 전체>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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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NSA (링크)

 

여러 사람이 팀을 이뤄 협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이크는 한 사람만 들고 있다고 해 볼까요. 마이크를 든 그 사람이 팀 전체가 아닌 개인적 의견을 섞어서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때 듣는 이들이 그 상황을 모른다면, 즉 한 사람만 마이크를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팀 전체가 말을 하고 있다고 여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 혼자서 마이크를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의 말을 들을 때 개인적 의견이 섞여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게 되겠죠. 팀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마이크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은 듣는 이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입니다.

 

여기서 하필 그 마이크를 독점한 한 사람이 허언증을 갖고 있다면 어떨까요? 팀에서 논의된 바 없는 내용들을 아무렇지 않게 지어내는 수다쟁이에다가, 마치 자신이 팀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마이크를 들고 있다는 자의식 과잉이기까지 하다면 어떨까요? 이런 경우 마이크가 그 한 명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건 더더욱 중요해집니다. 그가 말하는 모든 내용을 다 믿어서는 안된다는 의심을 가져야만 하니까요.

 

눈치 채셨겠지만, 좌뇌는 실제로 그러합니다.

 

 

좌뇌는 허언증과 자의식 과잉이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좌뇌의 분별이 만드는 오류에 대해서 이미 알아본 바 있습니다.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그 순간만큼은 언제나 확신을 갖게 만들어 그것이 착각이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좌뇌의 언어 구사 능력이 결합되면 엉뚱한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앞서 살펴본 <분리된 뇌>를 가진 환자에 대한 다른 연구들에서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으로 서로 다른 것을 본 상태에서 더 복합적인 실험을 시도합니다. 실제 실험내용을 바탕으로 좀 더 직관적인 예시로 각색하자면 이렇습니다. 양 눈 앞에 각각 <빵>과 <도마>를 보여줬다고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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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왼쪽 눈 앞에 보여진 <빵>은 우뇌에서만 인식되고 좌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좌뇌는 <도마>를 보았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무엇을 봤는지 물어보는 대신, 책상 위에 있는 여러 물건들 중 눈앞에 보인 것과 관련된 물건을 골라 왼손으로 잡아보라고 합니다. 왼손을 움직이는 건 우뇌가 관장하므로 우뇌는 <빵>과 관련된 물건을 잡게 됩니다. 그래서 환자의 왼손은 빵을 만드는 재료인 <밀가루>를 잡습니다. 이 사실은 오른쪽 눈에도 보이는 바람에 좌뇌도 이를 인지하게 됩니다. 이 때 환자에게 왜 <밀가루>를 잡았는지 이유를 물어봅니다. 이유를 대답하는 건 좌뇌만 할 수 있습니다. 마이크는 좌뇌가 독점하고 있으니까요.

 

왼쪽 오른쪽이 왔다갔다해서 조금 헷갈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좌뇌를 그냥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상황입니다. 나는 <도마>를 봤고, 관련있는 물건을 잡아보라고 했는데 내가 <밀가루>를 잡고 있습니다. 책상 위에는 식칼도 있고 야채도 있었는데 왠지 <밀가루>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사람은 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때 왜 <밀가루>를 잡았는지 물어본다면,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은 아마도 “그러게요, 제가 왜 밀가루를 잡았을까요…” 정도겠죠. 실제 실험에서 환자는 “도마를 세척할 때 밀가루로 닦으면 깨끗이 닦일거 같아서요.”라든가, “밀가루 반죽으로 칼국수를 만들려면 도마 위에서 자르니까요.” 같은 대답을 합니다. 약간 어색할 순 있지만 어쨌든 말이 되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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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을 했든 분명한 사실은 그 대답과 실제로 손에 밀가루가 들려있는 이유는 아무런 상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도마>와 손에 들려져 있는 <밀가루>가 자신의 선택이라고 여긴 채 이유를 사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죠. 거짓말과는 다릅니다. 이 사람은 ‘내가 왜 밀가루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어내자’라고 생각한게 아니라, 실제로 도마를 보고 밀가루를 잡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예를 알아볼까요. 현시대 뇌과학계의 유명인사인 데이비드 이글먼의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Incognito)>에서는 좌뇌 우뇌의 구도가 아닌, 의식과 무의식의 구도로 접근하여 유사한 맥락의 실험들을 소개합니다.

 

한 실험에서 여러 남성들에게 여성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더 매력적이라고 느낀 여성의 사진을 선택하게 합니다. 남성들이 보는 사진 중에는 여성의 동공을 조금 더 크게 편집한 사진들과 무편집본의 사진이 섞여있습니다. 이 때 동공을 더 크게 편집한 사진을 선택하는 비율이 현저히 높게 나타났습니다. 분명 실험 결과는 그렇게 나왔지만, 남성들에게 왜 그 사진의 여성이 더 매력적이었냐고 질문했을 때 “동공이 더 커서요”라고 대답한 남성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헤어스타일이든, 다른 외모의 특징이든, 무언가 다른 이유를 대답합니다. 이들은 동공의 크기가 자신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끝내 모릅니다.

 

이 예시들을 통해 좌뇌가 천연덕스럽게 없는 사실에 대해 말을 만들어내는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이라 믿어버리죠. 이런 특징은 허언증과 비슷합니다. 이에 더해 좌뇌가 말을 만들어내는 패턴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좌뇌는 스스로 판단한 것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판단했다는 방향으로 말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했지만 내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회피적 방향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특징은 마치 자의식 과잉인 사람이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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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 Pixabay

 

이 내용들과 지난 글에서 알아본 내용을 종합하여 좌뇌의 특징을 정리해보죠.

 

 분별: 좌뇌는 어떤 대상에 이름표를 붙이는 분별기능을 담당합니다.

✔ 오류와 확신: 좌뇌가 분별을 할 때는 때때로 오류를 일으키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주 자명한 사실이라고 확신합니다.

✔ 마이크 독점: 좌뇌는 언어를 구사하며, 이 역할은 좌뇌에만 독점되어 있습니다.

✔ 허언증: 좌뇌는 때때로 없는 사실을 지어내여 말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라고 믿습니다.

✔ 자의식 과잉: 좌뇌는 스스로 판단한 게 아닌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판단했다고 믿습니다.

 

이런 특징들을 통해 좌뇌가 어떤 캐릭터인지를 떠올릴 수 있으실 겁니다. 학창시절이든, 사회생활을 하면서든, 여러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상황을 겪기 마련이죠. 그 중에는 유독 적극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구분하려 하고, 그 구분이 틀릴 때에도 맞다고 우기고, 혼자서 말하려 나서고, 그 과정에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자신이 리더로서 결정하는 지위라 여기는 캐릭터를 한 번쯤은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런 캐릭터는 다소 피곤하고 재수없기도 하지만,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한편으로는 유용한 면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없다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의사결정이 늦어지기도 하고 실행력이 부족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실용적 면모를 고려한다면, 진화적 관점에서 아마도 좌뇌에게 이런 특징들을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됐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흥미로운 내용인 건 알겠는데, 좌뇌의 이런 특징이 마음챙김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거지?’

 

그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언어는 모든 걸 표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생각’에 대해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도 있고 그 밖의 다른 형태의 생각도 있다는 사실을 함께 알아봤습니다. 생각의 주제에 따라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의 비중이 클 때도 있고 작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순간 내가 지금 언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비언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구분하진 않습니다. 대체로 그냥 <나의 생각>이라고 여깁니다.

 

굳이 좌뇌가 개입한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며 살아가진 않습니다. 그런데 좌뇌는 허언증과 자의식 과잉이 있죠. 그 모든 생각을 자기 혼자 해냈다고 우기는 성향을 지닙니다. 그 바람에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이어집니다. 우리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바탕에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가 자리잡는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죠.

 

마음챙김에 대한 책 중 미국 아마존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조세프 응우옌의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 말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멈추고 직관에 따르기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멈추기란 어렵습니다. 명상을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명상을 하려고 앉아있으면 끝없이 머릿속을 휘젓는 생각들을 멈추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명상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마치 라디오 전원버튼을 누르듯 생각을 차단해버리자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명상 수행을 오래 해 온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생각을 없앨수는 없다, 다만 그 생각에 빠져들지 말고 그저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그들은 얘기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관(觀)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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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앞서 살펴본 좌뇌의 특징을 고려할 때, 조세프 응우옌이 말하는 <생각>, 많은 사람들이 그저 바라보라고 하는 그 <생각>이 바로 좌뇌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각은 아주 복합적이고, 뇌의 여러 영역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활동입니다. 그 중 좌뇌는 그저 손바닥만한 자리를 차지하는 신체기관으로써 일부의 역할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 역할의 비중이 때로는 크고 때로는 작습니다. 그 역할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뇌의 다른 영역이 수행하는 역할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가뜩이나 나서기 좋아하는 좌뇌의 특징으로 인해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가 생각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고보니 착각 자체도 좌뇌의 특징 중 하나였네요. 우린 그렇게 ‘좌뇌에게 속아온 것’ 입니다.

 

여러 책을 통해 얻어낸 저의 이러한 작은 깨달음은 제가 명상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어주었습니다. 저도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 생각을 멈춘다든가 생각 자체를 바라본다든가 하는 것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막막하게 느껴졌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 나의 생각에 <언어>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입니다. 머릿속에 단어나 문장이 돌아다닌다면 그건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이고 좌뇌가 마이크를 잡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걸 알아차리는 건 그걸 멈추려드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걸 알아차렸다는 사실 자체가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는 나의 생각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 불과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도 집안일을 하거나 운전을 합니다. 때때로 라디오 소리가 시끄럽거나 내용이 너무 재미있는 바람에 다른 일을 멈추게 되는 경우도 있죠. 어쨌든 꼭 라디오를 끄지 않더라도, 이내 다시 하던 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내 머릿속의 여러 생각 중 <언어>가 발견되는 순간, 그것이 라디오와 같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이미 벗어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각을 멈추고 그 생각 자체를 바라본 것입니다.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고>를 알아차림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난 그 순간이 바로 뇌의 다양한 영역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나의 생각 전체>에서 좌뇌의 언어적 분별 기능을 뺀 나머지 광활한 사고가 작동한 순간입니다.

 

너무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 혹여 그렇더라도, 저는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의 마음 속에 아주 작게나마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공감하는 마음이 생겨났기를 바랍니다. 그 바람을 가지고, 다시 정치로 돌아가며 이번 편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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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한겨레 (링크)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는 중요하면서도 어렵습니다. 모두가 각자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그 배경에는 모두가 제법 타당한 이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와 정반대 성향의 정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면 너무나도 불편합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답이 안 나오는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조금 시간을 들여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정치적 가치와 그의 정치적 가치는 공존할 수 없는 대척점에 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느낌은 괴롭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분명 잘못되지 않았지만, 그도 그 나름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득할 여지가 없다는 점을 발견할 때, 이것이 단 두 명 사이의 갈등이어도 풀어낼 수 없을진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가치를 추구하고 있음을 떠올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고뇌를 해결할 수 있을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막막함이 느껴지는 바로 그 때, 그 생각이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한번 떠올려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바로 그 순간 좌뇌가 마이크를 들고 있음을, 좌뇌가 이 모든 생각을 스스로 판단해 낸 것이고 그 판단을 한 이유를 지어내어 신나게 소리높여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같은 순간에 상대방도, 그의 좌뇌가 마이크를 들고 말하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구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고뇌에서 한발짝 벗어나 있습니다. 한발짝 벗어나 그 고뇌를 바라보는 나의 자리까지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직전 순간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떤 지점에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 지점에서 이어갈 수 있는 대화는 어떤 것인지, 다음 글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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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꾸물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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