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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대표팀이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17년 만에 8강에 진출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야구팬으로서 씬나는 일이긴 한데,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까지 굳이 야구 얘길 할 필요는 못 느꼈을 것이다.

 

이건 단순히 오랜만에 1라운드를 통과한 한국대표팀의 쾌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마도 내 평생 다시는 보지 못할 ‘진기한 경기’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과 호주, 대만의 운명을 갈랐던 WBC 1라운드 C조 한국과 호주의 경기. 이건 우주의 기운이 한국 야구팬들의 도파민 분출 한계치를 시험하기 위해 짜고 친 대사건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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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링크)

 

 

배경: 늘 그래왔던 탈락 시나리오

 

WBC 1라운드에서 한국은 일본, 호주, 대만, 체코와 함께 C조에 속했다. 이 가운데 1, 2위 팀이 8강에 진출하는 방식. 한때 ‘베스트 라인업으로 붙어보면 비벼볼 만한 수준’이었던 일본과의 전력 차는 이제 열 번 만나 한 번 이기기도 어려운 현실이 됐다. 자타공인 우승 후보 일본이 1위를 차지하고 약체 체코를 바닥에 깔면 한국, 호주, 대만 세 팀이 2위 자리를 놓고 다툴 것이라 전문가 일반인 할 거 없이 다들 예상했다. 그래서 세 팀 모두 ‘3승 1패’로 2위 진출을 현실적 목표로 잡았다.

 

한국은 첫 상대 체코를 무난하게 잡았다. 심심찮게 일본을 이기기도 하던 시절의 초 에이스급 투수도 없고 그나마 기대하던 선발투수들도 부상으로 빠져 투수진은 역대급으로 허약했지만 ‘빠따’만큼은 기대하기에 충분한 선수 구성이었다. 두 번째 경기에서 일본을 만난 한국대표팀은 ‘일본전은 버리고 나머지 경기에 전력을 다하는 게 낫다’라는 일부 의견에 발끈하는 듯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졌잘싸’했다.

 

문제는 그 여파 때문인지 다음날 대만과의 경기는 연장 끝에 또 졌다는 것. 1승 2패. 그나마 다행인 건, 한국을 이긴 대만 또한 앞선 두 경기에서 호주와 일본에게 패하며 2패를 적립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럼 이제 방법은 하나다. 한국과 대만을 이긴 일본이 공평(?)하게 호주를 이기고,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이 호주를 이겨 한국, 호주, 대만이 나란히 2승 2패를 한 뒤에 지지고 볶아 어찌어찌 8강에 가는 길뿐.

 

 

셋업: 일본-호주 전

 

그렇게 한국 야구팬들이 두 손 모아 일본을 응원하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막강한 공격력으로 호주를 즈려밟아 줄 거라 기대했건만, 5회가 끝날 때까지 스코어는 0대0. 일본의 4회 공격 땐 투아웃 만루 기회에서 타석에 등장한 천하의 오타니를 두고 2루 주자가 견제사당하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더니 급기야 6회 초 먼저 점수를 내며 1대0으로 앞서는 호주. 약에 쓸려면 없다는 그 개똥이 일본인가 보다 했다.

 

‘니들이 그러면 그렇지’를 주문처럼 읊조리고 있는 와중에 일본은 7회와 8회에 각각 2점씩 뽑아내며 ‘마당을 같이 쓰는 동반자’의 면모를 회복하...는 듯싶었으나 9회 말 마지막 수비에서 호주에게 홈런 두 방을 허용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경기 스코어 4:3 일본 승리. 돌이켜보면 이긴 일본이나 진 호주보다 한국 야구팬이 더 쫄깃했던 그 승부는 하루 뒤 펼쳐질 도파민 대분출 쇼의 셋업에 불과했다.

 

 

실점률 대결이 만든 괴랄한 경우의 수

 

한국의 구기종목 대표팀에게 경우의 수는 ‘몸에 좋지 않고 가급적 피해야 하지만 늘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 나를 흥분시키는 존재’와 같다. WBC 1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호주 전을 앞두고 주어진 8강 진출 경우의 수, 그런데 조건이 참으로 지랄맞다. ‘승패가 같을 땐 실점률로 순위을 정한다’라는 방식 때문이다. ‘득점과 실점의 차’로 순위를 갈랐다면 ‘몇 점 차 이상 승리’ 이런 게 조건이었을 텐데 한국이 호주를 이긴다는 가정하에 한국, 대만, 호주 가운데 이닝당 실점률이 가장 낮은 팀이 2위가 된다는 거다. 세 팀이 서로 맞붙은 경기 한정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이 8강에 진출하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조건은 이거다. 

 

호주에 3점 이상 실점하지 않을 것.

5점 차 이상으로 이길 것.

 

5:0, 6:1, 7:2까지는 된다. 그런데 8:3은 안된다. 4:0이나 6:2도 안 된다. 심지어 12:2 7회 콜드게임 승도 안 된다. 2점 이하 실점이긴 하지만 7회에서 경기가 끝나면 이닝당 실점률에서 대만에 밀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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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랄하다. 특정 스코어 조합 몇 가지를 목표로 정해놓고 경기를 만들어간다는 건, 들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양 팀이 짜고 쳐도 성공하기 쉽지 않다.  이보다 훨씬 쉬운 경우의 수도 허무하게 놓치기 일쑤였던데다 ‘역대급 (취약한) 투수력’의 현 대표팀에게는 2실점 이하 조건부터 난관이었다.

 

 

시작부터 돌발상황: 수수께끼의 할아버지 긴급 출동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며 시작된 경기. 그런데 선발투수 손주영이 2회 말 투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진 강판당했다. 그나마 없는 투수 살림에서 컨디션이 괜찮아 보였던 손주영이 최대한 길게 던져주길 바랐건만 불펜 투수 몸 풀 겨를도 없이 닥친 돌발 상황. 그저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경기에서도 선발투수가 부상으로 초반에 갑자기 내려오면 플랜 자체가 꼬이게 마련이다. 하물며 실점을 최소화해야 하는 경기에서 이런 상황은... 사진으로 표현하면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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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잣됨을 느끼고 있을 때 홀연히 마운드에 등장한 건 1984년생 42세의 노경은이었다. 검은 머리를 압도하는 존재감을 뽐내는 흰머리의, 흡사 선수가 부족해 코치가 대신 던지는 게 아닌가 싶은 풍모다. 마흔 넘어 해마다 자신의 시즌 커리어 하이 기록을 깨고 있는 신비로운 육체의 소유자는 모두가 멘붕에 빠져 있을 때 ‘내 팔이 제일 빨리 풀려’하며 올라가 2이닝을 순삭해 버렸다. 이번 대회 1라운드 3경기 3.1이닝 무실점. ‘리얼 (평균자책점)0포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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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링크)

 

‘이 나이에 드디어 전성기를 맞았다는 수수께끼의 할아버지다’

‘포장마차에서 볼 법한 할아버지’

 

노경은에 대한 일본 네티즌의 반응이다.

 

 

0-0→2-0→4-0→5-0→5-1→6-1→6-2→7-2 : 싱거운데 너무 자극적인 스코어

 

老, 아니 노경은의 호투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한국은 1라운드 내내 빠따질을 잘하면 차은우처럼 잘생겨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문보경의 선제 2점 홈런과 적시타로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 5회에 드디어, 8강 진출 스코어 5:0을 달성한다. 그런데 바로 5회 말 실점으로 5:1 탈락 스코어. 그러고는 6회 추가 득점으로 6:1 진출 스코어. 그러다 경기 후반 8회말 실점으로 6:2 탈락 스코어. 마지막 공격에서 가까스로 득점하며 7:2 다시 진출 스코어.

 

분명 호주 전 한 경기만 보면 넉넉하게 리드를 지키다가 끝난 싱거운 게임인데 한국-호주-대만의 8강 진출 경우의 수를 대입하면 이보다 더 똥줄을 탈 수 없는 흐름이 된다. 5:0이 된 시점을 한국의 역전이라고 가정했을 때, 마치 짠 듯이 서로 딱 한 점씩 주고받으며 역전, 재역전, 재재역전, 재재재역전, 재재재재역전까지 이어진 것이다. 애미야, 이 겜은 싱거운데 왜 이렇게 짜냐.

 

경우의 수 위에 수놓은 이 점수들만 봐도 이미 도파민 분출 치사량은 확정적이었던 것인데 아직도 몇 개 더 남았다.

 

 

9회: 이정후의 공격과 수비

 

6:2로 시작한 9회 공격에서 한국은 추가점을 내지 못하면 8강 진출에 실패하는 상황이었다. 원아웃 1루에서 등장한 이정후가 친 땅볼 타구는 투수 옆을 향했다. 타구 속도로 보아 투수가 잡으면 무조건 병살타로 공격 끝, 투수 옆으로 지나가도 2루 베이스 근처에 있던 유격수가 잡아 손쉽게 병살타로 공격이 끝날 상황이었다.

 

그런데 엌ㅋㅋ 타구는 투수 글러브에 들어가지도 투수 옆을 지나가지도 않았다. 투수가 내민 글러브에 쿠션을 치고 방향을 틀었다. 굴절된 타구에 당황한 유격수는 공을 잡고서 어정쩡하게 2루에 던졌지만 엌ㅋㅋ 악송구가 나왔다. 이정후의 확률 높은 병살타는 그렇게 실책이 되어 결국 추가 득점의 발판이 된다.

 

9회 말, 점수를 내주지 않고 끝내면 8강 진출이 가능한 상황. 공교롭게도 이정후가 9회 초 타석에 섰던 똑같은 원아웃 1루에서 호주 타자가 친 잘 맞은 외야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우중간을 향했다. 하필 경기 내내 중견수로 뛰다가 9회에 우익수로 포지션을 이동한 이정후 쪽이었다. 타구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며 가까스로 공을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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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링크)

 

“조명에 공이 잠시 들어갔지만, 행운이 따라서 잡았다”

 

‘야만없(야구에 만약 없다)’이긴 하지만 9회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이정후에게 찾아온 행운이 없었다면 7:2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정도면 우주의 기운이 한국 야구팬들의 도파민 분출 한계치를 시험했다고 하는 거다. 그런데 아직 한 발 더 남았다.

 

 

그런데 후공이었다면?

 

이 경기, 한국이 선공 호주가 후공이었다. 마지막 한 점을 9회 초에 뽑아 7:2를 완성한 경기 결과를 들여다보며 느껴지는 뭔가 쌔한 기운. ‘만약에 한국이 후공이었다면?’ 야구에서 이기고 있는 팀에게 9회 말 마지막 공격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미 9회 초가 끝난 상황에서 승리를 확정 지었기 때문이다. 만약(이 또한 야만없이지만) 한국이 이날 후공이었다면, 8회 말 공격이 6:2로 끝난 상황에서 한국은 8강 탈락이 확정된다. 9회 초 호주 공격을 실점 없이 막으면 그대로 경기 종료다. 

 

시작부터 끝까지 폭락과 떡상을 반복하는 경기 내용도 내용인데, 끝나고 하나씩 짚어보니 이 모든 상황의 요소요소가 소름 돋게 맞아떨어져서 뒤끝마저 찌릿한 이런 경기가 어떻게 평생에 두 번 있을 수 있나.

 

8강 진출에 성공한 한국 대표팀은 미국 마이애미로 날아가 3월 14일 토요일 오전 7시 30분(한국 시각) 도미니카 공화국 또는 베네수엘라와 맞붙는다. 역시나 객관적 전력으로는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뭐 어떤가. 이번 WBC는 이미 역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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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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