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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죽인 조카 단종을 포함하여 세조의 아들, 조카, 손자가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자 적장자인 의경세자가 죽었을 때까지만 해도 무릎 꿇지 않았던 세조는 자신의 손자(인성대군의 아들)가 죽자, 그 시신을 끌어안은 채 금수처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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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천릉을 시도하다

 

왕이 외면하려던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번뇌 끝에 답을 얻었다. 왕은 신하들에게 천릉을 논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응은 왕의 생각과 달랐다.

 

"주상전하, 천릉이라니요? 선왕(세종대왕)의 능소가 파괴된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런 무리한 일을 명하시옵니까? 법도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백성의 원성이 더 높아질 것이옵니다.“

 

"절사손장자! 그대들도 그날 지관이 한 말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 세자와 세손을 잃었다." 

 

이미 알고 있지만 개의치 않다고 말하는 공신들에게 왕이 물었다. 

 

"능소가 파괴되지 않더라도 흉지로 판명이 되면 천릉을 하는 것 또한 법도이다."

 

"전하! 선왕의 능은 전하를 보위에 오르게 하신 천하의 명당이옵니다."

 

꺼내서는 안 될 말이 공신의 목구멍에서 기어 나와 왕의 귀에 닿았다. 왕의 동조자이자 (단종의) 살해 공범인 공신들이 왕에게 되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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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

 

'나리! 그 자리가 나리 혼자 힘으로 얻은 것이요? 그 자리는 나리의 형(문종)과 그 아들(단종)을 죽게 한 우리의 명당이요. 나리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명당! 나리의 아들과 손자는 대업을 이루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소.' 

 

왕은 자가당착에 빠졌다. 천릉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자기부정이 될 것이며, 하지 않으면 후손을 더 잃을 것이다. 

 

“이 나라는 결국 정도전이 꿈꾸던 나라가 되는 것인가....” 

 

왕은 스스로 자초한 기괴한 상황에 말을 잃었다.  

 

".... ....“

 

"전하. 지금은 민심을 헤아려야 하오니, 천릉은 추후에 다시 논하심이 합당한 줄 아뢰오.“

 

천릉은 이후로 거듭 논의 되었으나 왕이 죽기 전까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위 14년, 죽음을 앞둔 왕은 대신들을 물리고 세자만을 남겼다. 가질 수 없었던 권력을 품었으나, 아비의 묘도 옮기지 못한 허상을 손에 꼭 쥔 노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고, 숨만 거칠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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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게서 생명의 징후가 보이는 곳은 오직 피부의 고름뿐이었다. 왕은 사력을 다해 세자에게 말하려 했으나 끝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자는 그저 그 뜻을 미루어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왕이 계유정난을 후회했는지 아니면 더 모질지 못했다고 후회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왕의 얼굴은 죽어서도 몹시 일그러져 있었는데, 마음이 편치 않아서인지 피부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인지 또한 알 수 없다. 

 

왕의 죽음을 확인한 세자는 흉하게 상한 왕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왕이 될 수 없었던 자가 왕이 되었고, 그 왕이 죽음으로써 자신이 왕이 되었다. 

 

 

세조의 죽음

 

모든 새 왕의 첫 임무는 선왕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옛 왕의 시신은 장례 절차를 위해 궁에서 오 개월간 머무는데 이는 동빙고의 얼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왕의 장례는 삼년상을 기본으로 육십여 가지에 이르는 절차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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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출처-<매일경제>​​

 

백성들은 덕 있는 왕이 승하하면 울었고, 그렇지 못한 군주가 죽으면 더 구슬프게 울었다. 왕릉을 조성하는데 많은 백성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승정원에 산릉(태종의 능)의 역사로 인한 폐해에 대해 이르다. 일만 오천 명을 사역시켜 죽은 사람이 백 명이나 된다.’ 

 

세조는 풍수지리와 민심을 고려하여 자신의 묘역 조성을 간소화할 것을 명했다. 석실과 석관의 사용을 금하고, 병풍석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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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능(광릉)

출처-<연합뉴스>

 

 

천릉을 다시 시도한 새 왕

 

새 왕(예종)은 즉위 후, 자신의 아버지(세조) 능을 조성하는 것과 더불어 할아버지(세종) 능을 옮기려 했다. 아버지가 결국 하지 못했던 세종 능에 대한 천릉을 그 아들이 다시 실행에 옮기려 했다.  

 

이는 죽은 왕의 염원이자, 왕가를 지키기 위한 가장의 본능이며, 신하들에게 자신이 왕임을 알리는 첫 날갯짓이었다. 죽은 자의 무덤을 옮기는 천릉이 산 자의 정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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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바마마의 새 능을 알아보시오!

출처-<KBS1>

 

예종은 할아버지의 새 무덤을 찾기 위해 지관 안효례에게 명하여 한양 인근 백 리를 두루 살피게 했다. 안효례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무려 여섯 왕의 재위 동안 지관으로 일한 조선 최고의 지관 중 한 명이다. 세조의 능 선정에도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기에, 세종의 천릉에도 안효례가 나선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백 리는 조선의 법도였다. 백 리를 넘어가면 왕이 당일에 환궁하기가 어려우므로 정사를 돌보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양 백 리 내에서 쓰이지 않은 명당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왕릉 최고의 명당이라는 태조의 건원릉, 태종의 헌릉, 세조의 영릉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관은 한양 백 리 너머까지 살펴야 했다. 그리고 그때, 운명처럼 큰 비를 만나게 되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지관이 들어간 곳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재실이었다. 비가 그치고 밖으로 나온 지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찾았구나.”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누군가의 무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당이었다. 천릉을 위해서는 세조 때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낸 이계전과 이인손의 묘를 이장해야 했다. 왕은 두 집안에 보상을 내리며 어르고, 왕가의 존엄을 내세워 달랬다. 신숙주 등이 천릉할 여주 땅은 백 리가 넘는다고 돌려 묻자, 왕은 물길로는 백 리 안쪽이라고 곧게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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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초상화

 

한편,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게 된 이인손의 집안에서는 지관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하였다.

 

“산소에 봉분은 물론이고 어떤 비석도 절대로 세우면 안 됩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치 묘지가 아닌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유족들 누구도 지관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건방진 자로구나. 지관이 땅만 보면 될 것이지. 집안의 체통이 있거늘! 어찌 묘를 그리 허술하게 쓴단 말인가.”

 

이제야 지난날의 고집을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왕이 자신의 조성, 그것도 보통 조상이 아닌 세종대왕의 능을 옮길 장소로 택했다는데 어쩌겠는가. 다른 명당을 찾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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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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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전경

출처-<문화재청>

 

마침내 세종대왕릉은 여주로 옮겨져 영릉으로 조성되었다. 두 명의 왕이 바라던 천릉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천릉은 새 왕의 처음이자 마지막 업무가 되었다. 새 왕은 즉위한 지 13개월 만에 승하했다. 

 

한 시대와 하나의 능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수장된 줄 여겼던 돌무덤에 관한 이야기가 수면으로 부상했다. 어린 왕(단종)이 사사된 지 240여 년이 흘렀다. 조선의 왕은 어느덧 11대가 흘러 조선 19대 왕 숙종이 군림하고 있었다. 

 

 

다시 왕이 된 소년

 

숙종은 그 어린 왕의 무덤을 왕릉으로 추존하였다. 엄흥도가 만든 돌무덤 자리에 장릉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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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장릉

출처-<문화재청>

 

다시금 왕이 된 소년과 왕릉이 된 그의 묘에 제를 올리는 날, 제문을 읽기 위해 한 사내가 도착했다. 축문을 읽는 이의 입매는 박팽년을 닮았다.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의 후손이 어찌 살아남아 그 들이 지키려던 왕의 무덤 앞에 나타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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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그려진 박팽년 표준 영정

 

박팽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남자라면 갓난아기도 죽음을 면치 못하던 날,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이 씨는 임신 중이었다. 이씨 부인에게는 출산 전까지 형벌이 유예되었다. 부인은 출산을 위해 친정이 있는 대구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아이를 낳고 나면 어미는 대구의 관기로 보내질 것이며,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죽음이 약조되었다. 

 

어린 시절 이씨 부인과 함께 자란 종이 같은 달에 딸을 낳았다. 이들은 자녀를 뒤바꿨다. 노비의 딸은 이씨 부인의 딸이 되었고, 박팽년의 손자는 노비의 아들이 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다 성종 대에 이르러 신원이 복원되었다. 그렇게 사육신의 후손이 축문을 읽게 되는 복된 날이 온 것이다. 사육신은 왕에게 충절을 지켰고, 박팽년의 후손은 나머지 사육신의 제사도 함께 지내며 신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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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에 있는 배식단

 

장릉에는 조선의 왕릉 중 유일하게 배식단이 있다. 단종을 위해 충절을 바친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제단이다. 이 제단에 모셔진 위패의 수가 260여 기에 이른다. 권력을 잃은 어린 왕의 곁을 죽음으로 지키던 이들이 시간이 흘러 이곳에 다 함께 모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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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에 위치한 엄흥도 정려각

출처-<오마이뉴스>

 

영조 대에 와서는 영조의 명에 의해 장릉에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 정려각도 세워졌다. 죽은 이를 위해 자신의 안전한 삶을 등진 엄흥도의 충절은 269년이 흘러서야 처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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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의 후손에게

군역과 잡역을 면제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담긴 문서 (영조 2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이후 300년이 흐른 2026년, 그와 단종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며 그가 행했던 의리와 인류애는 다시 한번 후손들의 가슴 속에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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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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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신간을 출간했다. 

 

한국 역사에서 기묘하거나

비주류 이야기를 묶어 낸 책이라고!

 

역사를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으로

이해해 보고 싶은 독자께 권한다.

 

당신의 예감이 맞다. 

 

슈퍼팩토리공장장이 말했다.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십쇼...!"

 

기묘한 한국사 - 예스24

 

 

 

 

오십이라는 나이에 

전업 작가가 되겠다며

회사를 때려치고 나온 

슈퍼팩토리공장장.

 

이후 각종 글을 쓰며 발버둥 치던 그가,

드디어 방송까지 진출했다.

유튜브 및 IPTV인 Btv에서 방송되는

<역사썰명회>라는 방송이다.

 

중간중간 재연(?!)도 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는 

댓글이라도 남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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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임권산

마빡 디자인 : 임권산

기사 : 슈퍼팩토리공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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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nzi.mast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