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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마(Ummah). 흔히 이슬람 공동체로 번역된다. 하지만 단순히 무슬림의 모임 정도로 이해하면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움마는 신앙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사회 조직 방식이다. 혈연과 부족이 인간의 안전과 정체성을 규정하던 시대에 혈연보다 신앙이, 가문보다 공동체의 규범이 앞선다는 발상은 꽤 급진적이었다. 이러한 급진성은 훗날 이슬람이 놀라운 속도로 팽창하는 기반이 된다.

 

움마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형성되었고, 무엇이 이를 그토록 강력하게 만들었을까?

 

분쟁의 도시 '메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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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하기 전, 야스리브(Yathrib)로 불렸던 메디나는 메카처럼 순례 산업으로 먹고사는 도시가 아니었다. 아라비아 반도는 대부분 사막 지역으로 물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메디나는 사막의 여러 마을 중 오아시스 농경이 가능한 곳 중 하나였고 이들에겐 물과 땅이 곧 생존이고 권력이었다. 오아시스의 우물과 경작지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했다.

 

아우스(Aws)와 카즈라즈(Khazraj). 야스리브에는 크게 두 아랍 부족 집단이 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는 법. 두 부족은 늘 다퉜다. 사막 마을에서 권력은 곧 우물과 경작지, 동맹에서 나온다 했다. 누가 더 넓은 경작지를 가졌는지, 누가 더 안정적으로 물을 통제하는지, 누구와 연합하여 우위를 점하는지가 중요했다. 하지만 경쟁이 반복되면 작은 충돌이 곧 피의 보복으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당시 아라비아 세계는 현대 국가처럼 중앙 권력이 나서 분쟁을 정리해 주지 않았다. 개인의 안전은 사법 제도가 아닌 부족이 보장했다. 범죄가 발생하면 가해자 처벌로 사태가 정리되기보다 피해 집단의 보복으로 이어졌다. 보복하지 않으면 명예가 무너지고 명예가 무너지면 보호망이 약화되며 보호망이 약화되면 공동체는 먹잇감이 되는 수순을 밟는다. 그러니 복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잔혹하지만, 냉정한 생존의 논리였다.

 

이러한 존립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아우스와 카즈라즈의 반복된 충돌은 결국 대규모 전투로 폭발하게 된다. 부아스 전투(Battle of Buath)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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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족의 전투가 대규모로 번진 배경은 분명했다. 오랜 세월 축적된 불신과 경쟁으로 인해 양쪽 모두 이제는 끝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우스 측에는 일부 유대 부족이 지원했고(야스리브에는 유대 부족도 존재했다. 이들도 경제와 동맹 정치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카즈라즈 역시 자신들의 동맹 세력을 끌어들였다. 전투는 창과 칼, 그리고 활을 사용한 근접 전투였다. 당시 아라비아 전쟁은 대규모 군대가 조직적으로 싸우는 형태라기보다 부족 단위의 전사들이 모여 돌격과 난전을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일부 전승에선 양측 지도자와 주요 전사들이 상당수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카즈라즈 측 지도자가 많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확한 사망자 숫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전투 이후 두 부족 모두 지도층이 약화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투의 결과는 아이러니했다. 아우스가 전투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도시는 더 깊은 불신으로 빠졌다. 전후에도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도자들이 사망하면서 분쟁을 중재할 권위가 사라졌다. 도시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집단들만 남게 되었을 뿐. 야스리브는 전쟁에서 승리한 도시이자 전쟁에 지친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메카에서 새로운 종교를 설파하던 한 인물이 메디나로 이주했으니 그가 바로 무함마드다.

 

두 번의 아카바 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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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소수 공동체를 이끌었다. 공동체는 메카의 기존 질서(다신적 공존 구조)와 그 위에서 돌아가는 정치, 경제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박해받았다. 메카는 카바를 중심으로 한 순례의 도시였고, 순례는 종교 활동이면서 동시에 교역과 정보 교환의 장이었기 때문에 야스브리 사람들과 접촉이 가능했다. 이들이 무함마드의 메시지에 매료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즉, 무함마드가 처음부터 메디나를 목표로 삼아 정치적 세력 구축을 설계한 인물로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우상을 거부하고 하나의 신을 믿을 것. 신앙은 일상에서 정의와 책임, 약자 보호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 이 같은 메시지는 메카에선 위협이 되었지만, 부족 간의 분열과 불신에 지친 야스리브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신앙을 기준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두 차례에 걸쳐 아카바(Aqabah) 서약이 이루어진다. 아랍어로 아카바(Aqabah)는 '언덕길'이라는 뜻으로, 메카 외곽 순례 지역 미나(Mina) 근처에 있는 알아카바(al-ʿAqabah)라는 작은 언덕을 가리킨다. 아카바 서약은 이 장소에서 이루어진 서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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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아카바 서약(621년경)엔 야스브리(메디나)의 카즈라즈 부족 사람들 12명이 참여한다. 이들은 메카 순례 중 무함마드를 만나 그의 설교를 듣고 무함마드에게 신앙을 서약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

도둑질하지 않겠다

거짓말하지 않겠다

살인하지 않겠다

 

이는 종교적이며 도덕적 약속에 가깝다. 물과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던 이들에게 종교적 기준은 그동안 갖지 못한 새로운 시각이었으며 이것이 마을의 구심점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다. 야스브리로 돌아간 카즈라즈 부족은 이듬해인 622년경 약 70명 이상의 사람을 데리고 메카를 찾는다. 이때 두 번째 아카바 서약이 이뤄진다.

 

두 번째 서약에서 이들은 야스브리에서 무함마드의 신변을 보호하고 혹시 무함마드가 공격받으면 함께 싸우겠다고 맹세한다. 당시 아라비아 사회에서 누군가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은 정치적, 군사적 계약과 같은 의미였다. 두 번째 아카바 서약을 계기로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이주하게 된다. 더 이상 메카에서 겪는 박해를 견디기 어려웠던 현실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카바 서약 이후 상황은 크게 변한다.

 

신앙이 도시를 떠나 공동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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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에서 박해받던 무함마드는 야스리브에서 초청받는 지도자가 된다. 무함마드는 자기 공동체에 있는 이들에게 야스브리로 이주할 것을 권했고, 이 사건을 우리는 히즈라(Hijra, هجرة)라고 부른다. 히즈라는 '관계를 끊고 이동하다'라는 뜻으로 이슬람 공동체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자 이슬람 공동체의 최초 이주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은 히즈라를 원년으로 삼는다.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때(610년)와 메카에서 공동체가 시작된 순간보다도, 실제로 공동체가 조직되기 시작한 기점을 더 중요하게 본다. 아카바 서약 이후 히즈라는, 메카에서의 종교 운동이 메디나에서의 이슬람 정치 공동체로 전환되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메카에선 박해받는 소수의 고백이었던 이슬람. 야스리브에선 도시 운영의 원리로 작동한다. 그리고 야스리브는 '메디나(مدينة)'로 지명이 변경되는데, 이는 야스리브가 새로운 질서의 실험장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무함마드는 분쟁을 종결할 권위를 부여받은 초청된 중재자였으며, 이슬람 역시 화해와 협력을 도모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전쟁과 분열의 길을 가지 않기 위해 탄생한 종교다. 하지만 과거의 이슬람과 현재 이슬람의 모습에는 모순이 그득하다. 지금의 중동 전쟁, 특히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으로 벌어지는 피의 전쟁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히즈라 정신에 가장 위배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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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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