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유시민 작가의 ABC론을 비판하기에 앞서 유시민 작가에 대한 나의 개인적 생각을 밝힙니다. 나는 유시민 작가를 우리 사회의 부표와 같은 존재라고 여깁니다. 지난 윤석열 내란과 같은 폭풍 속에서 앞을 보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물 위에 떠 있는지 가라앉고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힘들 때 그는 거친 파도 위에 떠 있는 부표였습니다. 우리는 그를 보며 아, 우리가 수면 위에서 숨을 쉬고 있구나, 코에 물이 들이쳐 숨 쉬는 게 어려운 것뿐 견딜 만하구나 하며 불안한 안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국민 신경 안정제라고 부릅니다.
일면식도 없는 유시민 작가를 동지라 여깁니다. 방법론이 다르고 지향하는 목표의 위치는 조금 다르지만 시선은 늘 같은 곳을 향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나가야 하는 곳, 세계가 나가야 하는 곳을 거의 같은 방향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속도가 달라 어깨를 맞대고 함께 나가지는 못해도 나는 유시민 작가를 같은 편으로 생각합니다.
이 글은 같은 편인 유시민 작가의 ABC론을 비판하는 글입니다. 같은 편을 비판하는 글을 쓰는 이유는 천박하기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힘든 함량 미달의 비평가들과 정치인들이 유시민 작가에게 퍼붓는 힐난과 비판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것인지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와 함께 품격 있고 들을 만한 비판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민주시민의 건강하고 지적인 숙의도 도모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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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 비평가와 정치인을 언급한 김에 어떤 사이비 지식인이 유시민 작가의 ABC론을 비판하며 언급한 정말 무식한 집합론1 주장부터 논박해야겠습니다. 대중 사이에 퍼져 있는 집합론의 흔한 오해이기도 합니다.
그 사이비 지식인은 벤 다이어그램은 초등학교 과정에서 나오는 아주 기초적인 도식인데 유시민 작가가 그런 기초적이고 간단한 도식으로 복잡다단한 정치 현안을 분석하려 한다며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습니다. 자신을 철학자라고 소개한 적도 있는데… 입으로 배설하는 똥, 헛소리의 향연입니다.
벤 다이어그램은 집합론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든 도식입니다. 초등학교 과정부터 등장해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계속 반복됩니다. 집합론이 수학의 기본이자 논리적 사고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쉬워서 초등학교 과정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중요해서 초등학교 때는 직관적인 도식으로 시작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 과정에 이르기까지 깊이와 복잡함을 더해 가며 반복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합리적 토론과 숙의를 지향하는 우리 민주시민들은 이런 사이비 지식인처럼 벤 다이어그램의 단순한 형태에 매몰되어 집합론이 수학이나 논리 철학에서 차지하는 핵심적 위치를 간과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집합론과 인식론의 지평에서 바라본 ABC론의 불완전성
§ 1. 들어가는 말
수학을 자연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논리학과 같은 철학 분야에서 범용적으로 사용하는 메타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상 언어의 거추장한 허식을 걷어내고 논리와 시스템의 골조만 남겨 놓았기 때문에 인식 과정에서 흔히 빠지는 가치의 편향을 최소화하고 현상의 이면에 있는 구조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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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치의 편향이 기본 속성인 인간 사회를 분석하는 도구로 수학을 잘 쓰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 분야 간 개념을 통역하고, 추상화하고, 사용되는 개념과 범주를 공들여 중복되지 않게 정제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라는 개념이 한국에서도 소개된 후,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학문적 교류가 활발해졌지만 생물학 정도를 제외하면 그 진척이 걸음마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처럼 집합론이나 위상학의 명징한 추상 능력을 사회 과학에서 분석의 틀로 사용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점은 수학적 엄밀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해관계와 주장이 뒤섞인 인간 사회의 단면을 잘 포착할 수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집합론을 차용해서 ABC론을 고안했습니다. 직관적 이해를 위해 벤 다이어그램을 사용했지만 본질은 집합론입니다. ABC론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은 단지 유시민 작가의 영향력 때문만이 아니라 ABC론이 가진 구조적 불완전성이 시청자로 하여금 여러 갈래의 해석을 하도록 만든 탓도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런 가설을 논증하고자 유시민 작가의 주장을 집합론 안에서 분석하고 비평할 것입니다. ABC론이 집합론적 논증이 되기 위해 필요 요건을 갖추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집합론과 함께 인식론의 지평에서도 유시민 작가의 ABC론이 가진 이론적 불완전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 2. 예고 없이 변화하는 논리적 우주
ABC론의 첫 번째 약점은 집합론을 논증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전제 조건, ‘논리적 우주(Universe of Discourse)’를 애매하게 설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집합론에서 ‘전체 집합(Universal Set)이라 불리는 논리적 우주를 설정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논리적 우주를 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앞으로 다룰 집합에 속하는 원소(element)의 정체를 밝히는 일입니다. 집합론에서는 논리적 우주라는 바탕을 먼저 선언해야 자신의 논증 과정과 결과가 유효하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집합론을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임의의 실수2로 이루어진 집합이 있다고 하자’, ‘임의의 자연수3로 이루어진 집합이 있다고 하자’ 등의 명제 같은 것이 어렴풋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때 ‘실수’와 ‘자연수’가 논리적 우주가 됩니다. 앞으로 나는 실수 범위 안에서 이 문제를 다루겠다, 아니다 나는 자연수 안에서 다루겠다고 논증의 범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 범위를 정하지 않으면 논증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논리적 우주를 자연수로 설정했다면 자연수에서는 작은 수를 큰 수로 빼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빼기는 자연수에서 연산 기능이 매우 제한됩니다. 집합론에서는 빼기 연산은 자연수에 대해 ‘닫혀 있지 않다’고 표현합니다.
‘2-3=-1’이 되어 음의 정수인 ‘-1’을 얻게 됩니다. ‘-1’은 정수라서 자연수에 포함되지 않고 자연수를 다루는 논증에서는 무의미한 숫자가 됩니다. 꼭 작은 수를 큰 수로 빼야 한다면 논리적 우주를 자연수에서 정수4로 확장해야 합니다. 만약에 자신이 자연수를 다룰지, 정수를 다룰지 결정하지 않고 논증을 시작했다면 이 논증의 유효성은 0에 수렴합니다.
유시민 작가도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ABC론 벤 다이어그램을 들기 전에 ‘대통령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ABC론의 논리적 우주라고 분명하게 전제했습니다. 문제는 유시민 작가가 대화의 과정에서 명확한 예고 없이 논리적 우주를 바꾸어 가며 논의를 이어간데 있습니다.
논리적 우주가 대통령과 일하는 사람이었다가 일반 민주 당원으로, 대한민국 일반 국민이었다가 정치 비평가로 토크쇼에 참여한 패널들과 주고받는 대화 과정에서 계속 옮겨 다녔습니다. 논리적 우주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자와 패널들이 대화에 참여하며 논증은 계속 확대•재생산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수학 언어를 현실을 분석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면 무엇보다 수학의 엄밀성을 보존해야 합니다. 해당 매불쇼는 이런 수학적 엄밀성을 유지하기 힘든 대화의 장이었습니다. 정치와 사회 현안을 다루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고 재미있게 다루는 것이 매불쇼의 참맛이지만, ABC론의 집합론적 엄밀성을 지키기에는 마땅한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유시민 작가 외에 이 문제, 논리적 우주가 예고 없이 변경되는 문제를 콕 찝어 다시 확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청자의 혼란과 다양한 해석은 이런 이유에도 기인합니다.
§ 3. 의도치 않게 지켜진 수학의 조건들
20세기 초, 힐베르트는 수학은 완전성(completeness), 무모순성(consistency), 결정성(decidability), 3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전제는 집합론에서 집합을 결정하는 속성이나 범주를 설정할 때도 엄격하게 적용됩니다.
특정 집합에 변수를 표기하는 기호 ‘A, B, C’ 혹은 ‘가, 나, 다’로 이름을 붙이면 굳이 힐베르트의 3가지 조건을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집합론의 공리 체계가 이미 힐베르트의 3조건을 만족하고 A, B, C 같은 기호는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벤 다이어그램도 특별한 오해의 소지 없이 아래 [그림1]처럼 간단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림 1]
위의 벤 다이어그램은 ‘전체 집합 U에는 특정한 속성을 가진 집합 A와 B가 있다. 두 집합에 속한 원소 중에는 양쪽 속성을 모두 가진 원소도 있다’는 것을 아주 깔끔하게 설명합니다. 이 벤 다이어그램이 집합론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그리는 도표이기도 합니다.
반면 매불쇼에서 유시민 작가가 보여준 ABC론 벤 다이어그램은 이런 모양이었습니다.

[그림 2]
이 벤 다이어그램은 [그림 1] 벤 다이어그램과 차이가 있습니다. 혼돈을 피하기 위해 유시민 작가의 벤 다이어그램에서 집합 ‘A’와 ‘B’의 속성으로 제시했던 단어 두 개, ‘가치’와 ‘이익’을 지우고 다시 그리겠습니다.

[그림 3]
[그림 1]에서 ‘C’를 표기하지 않았지만 [그림 3]에서는 집합 A와 B가 겹쳐진 부분을 ‘C’로 표기했습니다. 이렇게 ‘C’를 표기하게 되면 [그림1]과 [그림3]이 본질적으로 다른 그림이 됩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이름을 붙이게 되면 집합론적 위상을 달리 해석할 가능성이 매우 커집니다.
유시민 작가의 벤 다이어그램처럼 집합 A와 B가 겹치는 부분에 ‘C’라고 명명하게 되면 ‘C’는 수학적으로 집합의 지위를 얻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원래 원이었던 집합 A는 원래의 정체성을 잃고 ‘A’라는 집합에서 ‘C’를 뺀 차집합이 됩니다. 집합 B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A’와 ‘B’가 애초에 의도한 집합이 아니며 그 교집합은 전혀 새로운 별도의 독립적 집합이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한국어 번역인 교집합이 정확한 번역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영어로는 Intersection이라고 말하는 이 용어는 집합들 사이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용어이지 별도의 집합을 규정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합집합이라고 번역하는 Union도 마찬가지입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과정에서 "집합 A와 집합 B의 교집합을 구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오면 답은 집합을 표시하는 중괄호인 { }를 사용해서 아래처럼 표기합니다.
A ∩ B = {x, y, z}
이렇게 표기한다고 ‘A ∩ B’가 새로운 집합이 생겨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집합 A와 B에 동시에 속하는 원소를 찾아내는 논리 연산의 결과, 즉 집합 A와 집합 B의 관계성을 보여줄 뿐입니다.

만약 A와 B의 교집합에 C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면 이 논증은 2개가 아닌 3개의 집합으로 구성되는 새로운 논리적 국면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1) 집합 C: ‘A ∩ B’가 만든 새로운 집합
(2) 집합 A′: A에서 C를 제외한 차집합
(3) 집합 B′: B에서 C를 제외한 차집합
집합 3개로 구성된 새로운 구도가 형성되는 것은 집합론을 작동하는 약속, 공리(Axiom)5 때문입니다. 단순히 집합 A와 B의 관계성을 나타내던 교집합이 C라는 이름을 갖게 된 순간 그 구역은 실체를 가진 집합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마치 김춘수의 꽃처럼 말입니다.
새로운 구도를 만드는 3개 집합은 서로 공유하는 원소가 없는 서로소입니다. 각 집합이 서로소가 되었다는 것은 힐베르트의 3조건 중 무모순성을 만족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새로 생긴 집합 C 때문에 집합 A에 속하면서 동시에 집합 B에도 속하는 상황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힐베르트의 완전성도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유시민 작가가 처음 벤 다이어그램을 들면서 선언했던 논리적 우주(전체 집합)는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전체 집합의 속성이 매우 구체적이고 범위가 제한적이어서 유시민 작가는 집합 A와 집합 B의 합집합을 전체집합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U = A ∪ B
집합 A와 집합 B의 합집합은 차집합 A′, B′와 집합 C의 합집합과 같습니다.
U = A ∪ B = A′ ∪ B′ ∪ C
서로소인 집합 3개가 전체집합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으므로 힐베르트의 완전성도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유시민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ABC론은 힐베르트의 조건 중에 무모순성과 완전성을 만족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론적 정합성을 획득한 상태가 된 것인데, 안타깝게도 유시민 작가가 집합 A와 집합 B에 속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배타성을 가진 사람들을 설명하려 했던 원래 의도는 반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유시민 작가의 주장은 기존의 집합론이나 벤 다이어그램으로는 도식화하기 어렵습니다. 속성의 정도도 표시할 수 있는 퍼지 이론과 같은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야 그 전모를 명확하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계속>
주.
1) 집합론: 추상적 대상들의 모임인 집합을 연구하는 수학 이론
2) 실수: 수직선 위에 찍을 수 있는 모든 수
3) 자연수: 1부터 시작하는 양의 정수(1, 2, 3, 4, ...)
4) 정수: 소수점이나 분수가 없는 수(...-2, -1, 0, 1, 2, ...)
5) 공리: 수학 등 이론 체계에서 증명 없이 참으로 받아드리는 가장 기초적인 근거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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