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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임신 4개월 차였던 아내가 슬슬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졌다. 아기가 커져서 그런지 입맛이 돈다며, 밥숟갈을 크게 떴다. 일찌감치 캣타워 꼭대기에 자리 잡은 반려묘 ‘백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2026년 1월이었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 거실에 훈훈한 공기가 돌았다. 한국 나이로 딱 마흔 살이 된 참이었다. 7월 초 출산 예정이라던 의사 말이 스쳤다. 그럼에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아니, 미루고 싶지 않았다. 불혹의 사춘기는, 그렇듯 느닷없었다. 당근으로 아기용품 저렴하게 구매했다며 자랑하는 아내 손을 꼭 잡았다. 

 

“나 할 말 있는데……. 회사 그만둘까?”

 

 

노가다판에서 누린 부와 명예

 

이보다 평온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2025년 5월이었으니까, 결혼식 올린 지 꼭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신혼여행으로 어딜 갈 것인지가 그즈음 유일한 고민거리였다. 한마디로 복에 겨웠다. 여전히 낮에는 집 짓고, 밤에는 글을 지었다. 현장에서는 제법 잔뼈가 굵어졌다. 계단공(계단 거푸집 제작하는 고급 기술자로 일반 목수보다 1~2만 원 더 받는다)으로 그럭저럭 한몫을 해냈다.

 

30대 대부분을 보낸 노가다판에서 부와 명예(?)를 양껏 누렸다. 글만 써서 먹고살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괜찮게 벌었다. 어떤 면에서는 좀 과할 정도였다. 가끔 통장에 찍힌 숫자가 믿기지 않아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을 속으로 몇 번씩 헤아려 보곤 했다. 물론, 내 몸뚱이 하나 굴려 벌 수 있는 한계는 있었다. 어쨌거나 타고나길 사치라는 걸 모른다. 과소비라고 해봤자 읽지도 못할 책 부지런히 사 모으는 정도다. 그러니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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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내컷, 글 쓰는 노가다꾼
(출처: MBC, 
링크)

 

나는 종종 노가다판 와서 비로소 삶을 배웠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내가 노가다판에서 꽤 긴 세월 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그러니까 돈이 아니라 태도였다. 정의니, 도덕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만 따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난 짐짓 어른인 척 엄숙한 표정으로 세상을 논했다. 책에서 읽은 것만이 진리라고 믿었다. 그 시절 전부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노가다판에서 만난 형님들은 달랐다. 이러니저러니 떠들지 않았다. 단지 몸으로 증명했다. 거창한 철학 대신, 하루 세 끼 묵묵히 책임지는 것으로 세상과 마주했다. 그게 형님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태도였다. 그 바닥에서 난 논어보다 숭고하고, 햄릿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곤 했다. 매일매일 내가 삶을 주체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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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뷰]노가다 칸타빌레 송주홍을 만나다 : 펜 대신 망치를 잡는 인간에 대하여

(딴지일보, 링크)

 

그렇게 내 몸으로 부딪치며 보고 듣고 겪은 것들에 관해 하나씩 끼적였다. 어느새 작가가 됐다. 기자 관둘 때 내 이름으로 책 한 권 못 내본 게 그렇게나 아쉬웠다. 노가다판에서 두 권이나 냈다. 말하자면 두 번째 원동력이었다. ‘글 쓰는 노가다꾼’이라는 타이틀이 썩 마음에 들었다. 일기 쓰듯, 형님들과 망치질하는 일상을 기록했을 뿐인데 세상에나 “작가님~~!!”이라니.

 

대단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간헐적으로 원고 청탁과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원고료 받아 가며 글 쓰고, 그렇게 쓴 글과 책에 관해 대중에게 떠들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무명한 작가에겐 큰 축복이었다. 그래도 이 사회가 날 ‘프로’ 작가로 인정해 준다는 자부심은, 컴퓨터 앞에서 때때로 좌절하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노가다꾼, 넥타이 매다

 

고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노가다판에서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았다. 일상이 되어버렸다. 노가다 관련 두 번째 책을 낸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현장 경험으로 글 쓰고, 글감 찾아 현장 누빌 때 비로소 ‘글 쓰는 노가다꾼’이었다. 노가다 경험으로 더는 책을 내지 않겠노라 스스로 결심하고부터 목수와 작가의 삶이 분리됐다. 어느 순간 목수라는 직업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고 말았다. ‘평생 망치질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서른아홉이었고, 곧 불혹이었다.

 

그럼에도 대안이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사회 나와 글쟁이로 7년, 노가다판에서 7년 보냈다. 누구처럼 외길만 판 인생이 아니었다. 경력도 애매하고 나이도 어중간했다. 경력직으로 가자니 10년도 안 되는 회사 경력이 초라했다. 신입으로 가자니 마흔 가까운 나이가 민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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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내컷, 글 쓰는 노가다꾼
(출처: MBC, 
링크)

 

그렇다고 뚜렷하게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게 있어야 경력이든 신입이든 ‘돌 깡패’처럼 비벼볼 터였다. 그즈음 난 ‘도대체 뭘 좋아하는 사람이었더라?’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나마 책 읽고 글 쓰는 게 가장 좋긴 한데, 이번엔 자신이 없었다. 소설도 아니고 꼴랑 에세이 두 권 출간한 내가 전업 작가를? 글 써서 한 달에 버는 돈 이래 봐야 용돈 수준인 글쟁이가 전업으로 글 쓴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질까? 그래, 다 좋은데 내가 뭘 쓸 수 있지? 책상 앞에 종일 앉아 있는다고 글이 써질까? 그렇게 상상하는 글쓰기를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찾아가며 주저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전제 앞에 아무런 용기도 낼 수 없었다. 그러니 당장 먹고살자면 망치를 두드려야 했다. 그런 나날이었다. 문제 삼지 않자면 이보다 평온할 수 없지만, 문제 삼자면 그 고민이 끝도 없던 나날. 그런 일상에 바람이 분 건 스카우트 제안이었다. 2025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대표가 사업 얘길 꺼낸 건 그보다 몇 달 전이었다. 대표는 AI와 가상 세계를 플랫폼 안에 구축하고, 이를 한국과 중국의 연결 통로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흥미로웠으나, 뜬구름 잡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다. 몇 달 만에 연락한 대표가 만나자고 했다. 불러준 주소로 가보니 어엿한 회사였다. 진짜로 IT 스타트업을 차린 거다. 기획자, 개발자 몇몇과 창업해 이미 가상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대표는 준비 다 해 놨으니 마음껏 놀아달라고 제안했다.

 

잔잔하던 호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아직은 마흔이 아니라 서른아홉이니까. 1년만 늦었어도 감히 용기 내지 못했겠으나, 어쨌든 아직은 30대니까 도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맞춤한 시기였고, 대표는 적정한 임금을 약속했다. 출근 첫날, 대표가 ‘마케팅본부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건넸다. (IT 스타트업에서 마케팅본부장으로 좌충우돌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못 참을 정도로 궁금한 독자는 국민일보에 송주홍 작가가 연재한 칼럼 참고하시길) 그렇게 8개월이라는 시간이 총알처럼 지났다.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 2026년 1월이었다.

 

“나 할 말 있는데……. 회사 그만둘까?”

 

신나게 밥숟갈 뜨던 아내가 숟가락을 내려놨다.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며, 뜻대로 하라고 내 어깨를 토닥였다.

 

“오빠,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

 

그래, 까짓거. 불혹도, 불혹이 된 가장도 방황할 수 있다. 2026년 2월 2일, 백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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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뷰]노가다 칸타빌레 송주홍을 만나다 : 펜 대신 망치를 잡는 인간에 대하여

(딴지일보, 링크)

 

 

퇴사의 변: 나의 민낯과 마주한 여정

 

살며 어떻게든 지키고픈 원칙 같은 게 있다. 그 맨 앞에 놓아두는 게 욕심부리지 말자는 거다. 눈앞의 욕망을 좇아 무언가를 억지로 하다 보면 기어코 탈이 난다. 그래서 복권도 안 사고 로또도 안 한다. 주식이나 부동산은 더더욱 멀다. 물론, 그 세계에도 피나는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내 의지 바깥의 요행을 곁눈질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안 한다.

 

스물아홉 살까지 지역 잡지사에서 일했다. 영세한 회사였다. 그렇지만 ‘사람, 공간, 그리고 기록’이라는 철학을 차분히 붙드는 곳이었다.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다루되, 그 화려함을 좇지 않았다. 그보다는 사라져가는 마을 풍경이라든가, 시장에서 나물 파는 이의 삶을 가만히 기록했다. 그런 것에 가치 두는 잡지사였다. 내가 그곳에서 편집장과 선배들에게 기사 쓰는 기술보다 앞서 배운 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기자 일 시작한 덕에 조금은 건강한 글쟁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부해본다.

 

그랬던 내가 다가올 서른을 핑계 삼아 서울로 올라갔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제법 큰 잡지사 취재 팀장 자리였다. 그때는 치기 어렸다. 큰물에서 놀아보고 싶었다. 처음 석 달은 내가 뭐라도 된 양 어깨가 으쓱했다. 종종 유명인을 인터뷰했다.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자랑했다. 마음이 비어가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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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깬 글 쓰는 노가다꾼 작가 송주홍

(대전 MBC, 링크)

 

1년쯤 지나 깨달았다. 내가 유명인의 붕 뜬 껍데기만 쫓고 있었다는 걸. 내가 진짜로 사랑했던 건, 시골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의 단단한 걸음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했던 서울 생활을 접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마음먹었다. 섭리대로 살아가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렇게 쏟은 노력과 땀만큼만 바라자고.

 

결과적으로 IT 스타트업은 도전이 아니라 욕심이었다. 처음엔 도전이라고 애써 포장했다. 방향 설정하고, 기획하고, 그걸 문서로 정리하는 것. 큰 틀에서 보자면 그간 내가 해왔던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부적으로는 업무의 많은 영역이 낯선 세계였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다. 낯선 세계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바쁜 틈틈이 공부했다.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쏟아지는 정보를 흡수했다. 그런 모든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를 속였다.

 

고백하자면 욕심이었다. 대표가 날 스카우트할 때 회사의 청사진과 함께 많은 성과급을 약속했다. 그 유혹이 달콤했다. 플랫폼 만드는 스타트업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수많은 플랫폼이 생겨난다. 우리가 실제로 이용하는 플랫폼은 10개를 넘지 않는다. 어려운 도전이지만, 제대로 터지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시장이다. 그런 회사에서 요직을 맡았다.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회사가 성장하면 나도 좀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어머니가 자주 가족 신년운세를 본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내 팔자에 관해 “마흔부터 큰돈 만질 팔자”라고 했었다. 그게 이번 기회는 아닐까. 몰래 그런 욕심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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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정동분 2 : 젖을 뺏길 줄은 생각도 못했지

(딴지일보, 링크)

 

회사 다니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내 그릇을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단지 이만큼인데,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내가 감당해야 하는 역할은 더더욱 커졌다. 책임 있는 자리였다. 책임을 다하는 게 응당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텼고 꾸역꾸역 해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숨부터 나왔다. 과식한 사람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역량과 책임 사이에서 부대꼈다. 욕심에 눈이 멀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가 더 성장하고, 내 역할이 더 커지기 전에 물러나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대표와 정리했다.

 

8개월의 여정이 실패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앞으로도 나는 나의 민낯과 때때로 마주하며 살아가게 될 거다. 그런 순간마다 그게 나의 민낯이라는 걸 자각하면 될 일이다. 욕심보다는 그런 용기가 앞서길 바랄 뿐이다.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

 

퇴사하던 날, 대표가 이제 뭐 할 거냐고 물었다. 일단 좀 쉬고 싶다고 말했다. 진짜였다.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사회생활 시작한 뒤로 쉬어보질 못했다. 보름간 늘어지게 잠만 잤다.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지는 차차 고민해 보자는 게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읽고 쓰는 일에 좀 더 몰두해 보고 싶다는 생각 정도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직장 생활하던 아내가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흔쾌히 지지했다. 교수 될 때까지 뒷바라지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대신, 당신이 교수 되는 그 순간, 난 가장으로서의 모든 책임과 권한을 내려놓고 오직 글만 쓸 거야!!”

 

이렇게 너스레도 떨어줬다. 부담 갖지 말고, 마음 편히 공부하라는 나름의 배려였다.

 

호언장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홀딱 백수가 되어버린 거다. 마침, 방학이었던 아내와 뱃속 아이, 반려묘 ‘백구’와 백수 된 나까지 생명체 넷이 함께 뒹굴었다. 하루 세 끼를 꼬박 집에서 해결했다. 쌀통 줄어드는 속도가 무섭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고 쫓기듯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싶진 않았다. 그 또한 탈이 날까 무서웠다. 조금 더 천천히 읽고 쓰면서 버텨보기로 했다. 보름간 뒹굴며 내린 결론이었다. 아기가 태어나는 7월까지만 전업 작가로 살아보고 싶다고, 아내에게 얘기했다. 앞으로 1년 정도는 놀고먹을 수 있으니 충분히 쉬면서 천천히 고민하라는 아내 말에 용기가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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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내컷, 글 쓰는 노가다꾼
(출처: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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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처럼 신난 마음으로 새로운 책을 기획했다. 머리보단 발로 쓰는 글에 익숙한 글쟁이다. 기획에 맞게 취재원을 수소문했다. 벌써 몇 군데 취재도 다녀왔다. 기자 하던 때가 생각나 취재하러 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그래 놓고 밤만 되면 아내 몰래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그렇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작가로서의 이상은 이렇게나 높은데 생활인으로서의 가장은 궁상맞다. 며칠 전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SNS에 이렇게 올렸다. 

 

「(상략)하여, 일자리 대신 일거리를 구해보기로 했습니다.

 

1. 잡지사 기자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과 공간을 기록했습니다. 

2. 대학·공공기관·기업의 사보나 보고서 등을 기획·제작했습니다.

3. 각종 NGO·NPO 단체와 인터뷰집, 구술채록집 작업을 했습니다. 

4. 전문 영역은 아니지만, DSLR 카메라가 한 대 있습니다. 그럭저럭 찍습니다.

 

위의 역량이 필요한 프로젝트 관계자, 언론매체 여러분은 지금 소중한 인재가 헐값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최근 모니터 한 대 추가했습니다. 누가 보면 주식하는 사람 같겠지만, 글쟁이입니다. 머리가 안 굴러가니 연장이라도 늘려보자는 심정이었습니다. 이렇게나 장비 세팅이 빵빵한데, 그냥 지나치시렵니까. 열려있으니 마구 찔러주세요.」

 

그래도 반응이 좀 있겠거니 기대했건만, 딱 한 사람이 찔렀다. 예상하는 것처럼 그게 바로 딴지일보 편집장 죽지않는돌고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구구절절 떠든 이야기는 다만 몇 푼이라도 벌어보려는 백수 가장의 발버둥이었다.

 

정답이 뭔지, 정답이라는 게 있긴 한 건지 모르겠다. 최근, 아내가 과외를 더 늘렸다. 만삭 때까지 바싹 땡겨보겠다는 아내에게, “너무 무리는 하지 마.”라는 말밖에 해주지 못했다. 작가와 가장 사이에서 오늘도 갈팡질팡한다. 불혹의 사춘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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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내컷, 글 쓰는 노가다꾼
(출처: MBC, 
링크)

 

 

추신: 새로 연재할 원고를 딴지 편집부에 보내 놓은 상태다. 원고가 통과될지 알 수 없다. 다만 과거 방송 인터뷰 때도 말했듯, 글쟁이의 프리미어리그인 딴지일보에서 밥값 할 글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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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꼬마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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