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OTT에서 희한한 기획을 했더군요. 개그맨, 정치인, 방송인, 정치평론가 등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리얼리티 뉴스 게임쇼〉라는 이름을 붙인 프로그램입니다. 제목에는 정치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기획인 것은 다가오는 지방선거와 무관하지 않겠죠. 저의 유튜브 알고리즘도 '정치'라는 키워드가 꽤 높은 지분을 차지하다 보니 이 프로그램의 예고편을 보게 됐습니다. 그 바람에 근황이 별로 궁금하지 않은 한 석사학위자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석사학위자
(나무위키, 링크)
선거철과 같이 대중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되는 시기에는 정치평론가들도 함께 주목받습니다. 각 진영의 의견을 더 명료하게 대변하거나, 선거 판세와 결과를 더 정확하게 읽어내는 사람이 인기를 얻기도 합니다. 물론 동전의 앞뒷면처럼 그 인기 이면에는 상대 진영의 모진 비난이 있죠. 어느 쪽이든 헛다리를 짚은 사람들은 인기도 비난도 받지 못하고 잊힙니다.
그러다 선거철이 지나면 당장 읽어야 하는 판세도 없고, 사람들의 관심도 분산됩니다. 마치 서바이벌 예능에서 주목받던 사람들이, 그 예능이 끝난 후 특수하게 연출된 환경이 사라지면서 각자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본모습에 따라 두터운 신뢰를 얻는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죠. 한때 많은 관심과 신뢰를 받다가도 어느덧 스스로 나락에 빠진 정치평론가들을 우리는 꽤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다 보면 정치평론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해집니다. 믿을만한 평론가인가, 아니면 나락에 빠질 법한 본모습을 지닌 사람인가. 믿을만한 평론가가 필요한 이유는 결국 어떤 정치인이 믿을만한지 판단하기 위해서이므로,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 사람을 판단해야 하는 장난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 나은 정치인을 판단하기 위해 더 나은 정치평론가를 판단해야 하는 이 미묘한 상황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마음 챙김을 곁들인.

정치평론가, 누가 제일 잘 나갔지?
(시사인, 링크)
병아리 감별사와 정치평론가
병아리 감별사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영화 〈미나리〉에 등장했던, 실존하는 직업입니다. 알에서 부화한 지 하루 정도 지난 병아리의 성별을 감별하는 직업이죠. 안 그래도 자그마한 병아리는 성별에 따른 외모의 차이가 거의 없어서, 좁쌀보다도 작게 형성된 생식기 주변을 손으로 살짝 만져 그 감촉의 차이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숙련된 전문가들은 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촉만으로, 1초도 안 되는 찰나에 99% 이상의 정확도로 감별합니다. 기술의 발달로 달걀에서 성별을 구분하는 장비가 사용되고 있지만, 숙련된 병아리 감별사의 정확도가 매우 높다 보니 아직 기계 장비를 도입하지 않은 곳에서는 여전히 높은 임금의 전문인력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더 주어져 병아리가 닭에 가까운 외형으로 성장하면 누구나 대부분 정확하게 성별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벼슬의 모양이나 몸의 모습도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양계 사업주에게는 하루라도 더 빠르게 성별을 구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높은 임금의 병아리 감별사가 필요한 것이죠. 다시 말해, 성별의 구분 그 자체보다 속도가 중요한 겁니다.

49년째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는 하경미(67) 씨
(세계일보, 링크)
이는 우리가 정치평론가의 해석과 분석을 참고하고자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모든 유권자가 충분히 시간을 들여 정치인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각자 판단할 수 있겠죠. 하지만 수많은 정치인에 대해 일일이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는 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모호한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 모호함에서 빠르게 벗어나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평론가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죠.
이런 정치평론가들의 판단이 숙련된 병아리 감별사처럼 99% 이상 정확하고, 그런 정치평론가들의 성향을 판단하는 우리의 감별 능력도 99% 이상이라면 얼마나 편리할까요.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프로페셔널 병아리 감별사보다 우리네 정치평론가들의 숙련도가 그저 떨어지는 걸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직관과 논리의 관계
저는 병아리 감별사라는 직업에 대해, 이 연재에서 소개한 바 있는 데이비드 이글먼의 책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데이비드 이글먼은 이렇게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정확히 구분하는 능력에 대해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일상에서 ‘무의식’이라는 말은 ‘나도 모르게’,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같은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죠. 이를 막기 위해 용어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명하게 구분해 내는 것을 ‘직관’이라 하고, 언어적인 사고에 기반한 것에는 ‘논리’라는 말을 쓰기로 해보죠.
책에는 병아리 감별사 외에도 직관의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는 사례가 언급되는데, 그중 재미있는 것이 ‘아이오와 도박 과제(Iowa Gambling Task) 실험’입니다. 실험 참가자들은 몇 개의 카드덱을 받고, 카드를 뒤집어 최대한 높은 점수를 따라는 목표를 부여받습니다. 어떤 덱은 더 위험한 카드들로 구성돼 있고, 어떤 덱은 더 안전합니다. 참가자들은 카드덱 사이의 차이를 모른 채, 긴장도를 측정하는 센서를 달고 카드를 뒤집기 시작합니다.

아이오와 도박 과제
(위키피디아, 링크)
평균적으로 80번째 카드를 뒤집을 때 즈음, 참가자들은 어떤 덱이 위험하고 어떤 덱이 안전한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긴장도 센서의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80번째 카드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이미 위험한 카드덱을 선택할 때 확연한 긴장도가 측정됐습니다. 논리가 자리 잡기 훨씬 전에 직관이 이미 형성된 것이죠.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논리가 형성된 시점은 평균 80번째 카드인 반면, 직관이 형성된 시점은 겨우 10번째 카드일 때였습니다.
이렇게 직관이 논리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논리적인 접근으로 병아리를 감별하는 기계 장비 만들어냈지만 이는 오래전부터 병아리 감별사가 직관을 길러낸 방식에 비해 딱히 정확도가 더 높지 않습니다. 비논리적인 것은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여기기 쉽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죠. 감, 본능, 촉 같은 것은 생각보다 놀라운 결과로 이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인들을 판단할 때에도 분명 직관이 활용됩니다. 제가 지난 20여 년간 지지했던 정치인들을 돌이켜보면, 대부분 정책 공약이나 언행을 통해 논리적으로 판단하기 훨씬 전부터 호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직관이 논리보다 먼저 형성된 것이죠. 물론 직관에 의한 판단이 논리에 의해 뒤집히는 경우처럼, 직관이 놓친 부분을 논리로 채워나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오와 도박 과제 실험에서 드러나듯 그 순서상 직관은 논리보다 먼저 형성됩니다.
정치평론가들의 판단도 마찬가지로 직관이 먼저 형성되고 그에 따른 논리적 판단이 이어질 겁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해석을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하죠. 아마도 이러한 과정이 병아리 감별사와 정치평론가의 가장 큰 차이일 것입니다. 병아리 감별사는 직관을 통해 성별을 정확히 구분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정치평론가는 판단에 대해 설명해야 하고 따라서 직관과 논리 모두가 사용됩니다.
논리가 사용된다는 것은 언어를 쓰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좌뇌가 개입합니다. 맞습니다. 허언증과 자의식 과잉, 바로 ‘걔’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어느 순간 좌뇌가 마이크를 잡고 이 모든 판단을 스스로 해냈으며 그것은 자명한 진리라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렇게 좌뇌의 지배를 받게 되면 직관은 무시당하고 논리만 남게 되겠죠.
저는 이 점이, 한때 주목받다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정치평론가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관과 논리의 두 축에서
논리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어졌고, 우리도 논리와 비논리를 비교적 익숙하게 판단합니다. 반면 직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죠. 단적으로 ‘논리학’이라는 학문은 존재하지만, 직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표 학문이 없습니다. 3단논법 같은 기본적인 논리구조는 상식으로 통용되지만, 직관에 대해서는 개인차가 아주 큽니다. 자신의 감과 촉을 논리보다 더 우선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논리적 판단이 직관에 비해 훨씬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관과 논리는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이, 둘 다 아주 중요한 인간의 능력일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직관적인 마음은 신성한 선물이고, 이성적인 마음은 충실한 하인이다. 우리는 하인을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정작 신성한 선물은 잊어버린 사회를 창조해 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Brunch, 링크)
데이비드 이글먼이나 크리스 나이바우어 같은 뇌 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직관은 인간의 복합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비언어적 능력입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본능과 차이가 있습니다. 갓난아기가 젖을 빠는 것은 아무 경험 없이 본능으로 행동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 아이가 크는 과정에서 가족의 분위기나 문화에 따라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재롱을 부리거나 떼를 쓰는 건 환경과 경험에 따라 차이가 발생합니다. 이는 본능이라기보다 언어와 논리를 익히기 전에 형성되는 직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막으로 둘러싸여 평생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본 적 없는 사람과 온 세상이 얼음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은 같은 현상에 대해 전혀 다른 직관을 형성하게 되겠죠. 직관은 한 사람의 삶을 반영합니다. 어떤 정치인이나 정치적 현상에 대해 각자가 서로 다른 직관을 형성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정치평론가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죠.
각자의 삶의 궤적이 현시대와 늘 일치할 수는 없으므로, 직관의 오류는 어느 정도 불가피합니다. 삶의 궤적을 반영하는 만큼 일순간 의식적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직관의 오류가 발생했다고 해서 직관 자체를 뜯어고치려는 것은 무리입니다. 논리를 통해 보완할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합리적이죠. 우리가 기대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직관의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논리가 적절히 보완해 주어 잇따르는 오류의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 논리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좌뇌의 소동이 벌어지고 본인이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좌뇌의 허언증과 자의식에 점령당한 결과는 처참할 겁니다.

마음 챙기고 정치 3: 당신이 믿는 논리는 어디서 나왔나
(딴지일보, 링크)
정리하자면, 직관과 논리의 두 축을 어떻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특히 직관에 오류가 있을 때 어떻게 보완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정치평론가를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앞서 살펴본 직관과 논리의 특징을 바탕으로 몇 개 유형을 나눠보며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정치평론가 감별 유형
1. 아무 구분도 못 하는 〈무지(無知)〉형
직관과 논리의 특징, 직관의 오류 가능성, 좌뇌의 소동 등, 이 모든 것을 아예 모르거나 신경 쓰지 않는 유형입니다. 좌뇌의 소동에 점령당하기 쉽고, 그 결과 자신의 모든 판단이 지극히 논리적이며 너무나 자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확신에 차게 됩니다.
직관의 오류가 발생한 상황에서 그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허언증과 자의식이 가득한 이상한 논리를 펴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아주 상징적인 한 장면을 통해 이러한 무지(無知)형 정치평론가의 특징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니까요.”

(슬로우뉴스, 링크)
2. 직관을 놓지 못하는 〈못 잊어〉형
이 유형의 정치평론가는 자기말만 맞다고 우기는 면에 있어서 <무지>형과 유사성이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직관에 대해서 일관적입니다.
이 유형은 본인의 직관에 일편단심이어서 논리를 통해 보완하려하지 않습니다. 직관의 오류가 발생한 상황에서 토론한다면, 〈못 잊어〉형의 평론가는 자신의 직관이 왜 타당한지에 대한 논리를 구축하기보다는 그래도 이런 관점이 필요하지 않냐는 하소연을 이어갑니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그러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런 정치평론가가 필요한지는 모를 일입니다.
3. 절대적 선악에 기대는 〈순환논리〉형
이 유형은 직관의 오류를 받아들이고 논리로 보완하려 하지만, 그 노력을 게을리한 나머지 절대적인 선과 악의 구도를 활용합니다. 상식적인 선에서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은 유용할 수 있습니다만, 그 구분이 자의적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죠. 간단한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A는 무조건 틀렸다. 그런데 저 정치인은 A를 옹호한다. 그러므로 저 정치인은 무조건 틀렸다.”
“A는 아주 나쁜 행동이다. 그런데 저 정치인은 A 같은 행동을 했다. 그러므로 저 정치인은 아주 나쁘다.”

이러한 주장을 펴려면 A가 왜 틀렸는지, 왜 나쁜 행동인지에 대한 설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평론가들은 이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원래 그런 거니까”,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갑니다. 이렇게 자의적으로 전제를 만들고 논리를 잇는 것이 순환논리입니다.
형식적으로 순환논리이더라도 때로는 그 내용에 수긍이 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환논리라는 논리적 오류를 사용했다는 것은, 또 다른 논리적 오류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저런 순환논리가 받아들여진다면요.
“내가 틀렸다면, A가 옳다는 거야? 당신은 A를 지지하는 거야?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
“저 정치인을 받아들이면, A가 인정받게 되고, 그러면 그 세력이 달라붙어서, 이번 선거도 다 망하는 거야. (미끄러운 비탈길의 오류)”
이와 같은 오류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겠죠.
4. 현상을 분석하는 〈메타인지〉형
제 생각에 가장 바람직한 정치평론가 유형입니다. 자신의 직관에 믿음이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직관도 그 사람의 삶이 담겨있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이 유형은 섣부르게 절대적인 선악을 나누지 않고, 다양한 삶의 궤적을 존중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직관이 형성된 배경을 설명할 수 있고, 그렇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직관의 오류가 발생하면 이를 인정하고 논리를 통해 보완하는 과정을 따르는데, 그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분석합니다.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직관이나 논리를 정당화하려 드는 반면, 이 유형의 사람들은 눈앞에 벌어진 현상의 배경과 앞으로 끼칠 영향을 파악하여 설명합니다. 본인 자신이나 본인이 속한 집단에 대해서도 객관적 분석 대상으로 놓고 분석하죠.
이 유형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은 대중들에게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다”와 “이런 현상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라는 표현을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무지〉형이나 〈순환논리〉형의 사람들이 “이런 행동은 잘못됐다”, “이런 현상은 이래서 생겼다”라고 단정하는 것과 대조되는 표현 방식이죠.
직관과 논리가 조화를 이루면서 좌뇌의 과한 자의식이 끼어들 여지를 예방하는 이런 접근은, 비록 때때로 판단이 틀리더라도 지속적으로 평론을 찾게 만드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현재까지도 많은 대중의 신뢰를 받으면서 오랜 시간 그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정치평론가들은 — 몇 명 되지 않지만 — 이 유형에 해당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직관과 논리의 축으로 살펴본 정치평론가 유형별 특징이 다가오는 선거에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데 보탬이 되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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