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평안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업무상 메일의 끝인사로 나름 즐겨 써왔던 문장이다. 그것은 진심이었고, 그 바람은 나를 향하기도 했다. 일상의 평안은 소중하다. 나와 내 가족의 무사 평안은 오늘 하루 내가 가장 바라는 일이다.
일상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지금 이 시간에 감사할 줄 아는 하루. 그런 하루의 행복을 마치 벽돌처럼 한 장 한 장 쌓아나가다 보면, 언젠가 세월이 지나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행복이라는 이름의 집이 지어진 것을 볼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말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고 다녔었다.
하여, 반대로 말하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나의 소중한 일상의 무사 평안이 깨어지는 것이다.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다 되는 일도 아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겪고서 도저히 행복의 벽돌을 단 하루도 만들 수 없게 되면, 그러면 내 인생 행복의 집도 영원히 안녕인가. 그보다, 행복하지 않은 인생은 목적 달성에 실패한 건가.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교보문고, 링크)
1933년에 태어난 아흔세 살 강순희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출판하기를 결심하고 유시민 작가에게 직접 연락했다. ‘이것의 조선의 역사다. 한국의 역사다. 우리의 역사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일제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그는 하얼빈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북에서 공부하다가 전쟁으로 피난 내려와 부산에서 살았다. 부산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해 서울에서 아이를 낳고 살다가 인혁당 사건으로 남편을 잃었다.
식민지 조선에 태어났기에 학교에서 일본어를 써야 했다. 사업 수완이 좋은 아버지 덕에 땅이 제법 있었지만, 해방 후 38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 군정과 공산당의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겼다. 한국 전쟁으로 부모, 형제와 함께 대전을 거쳐 부산까지 피난을 내려오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인생의 가장 좋았던 하루를 남편과 첫 데이트를 한 날 보냈지만,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은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남편을 사법 살인했다. 체포에서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고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에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국제법학자회의(ICJ)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삶은 대체로 고통스럽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악보가게, 링크)
이소라의 7집 앨범에 수록된 <Track 9>의 노랫말처럼 사람은 때와 장소를 고르지 못하고 그저 태어난다. 강순희 할머니는 1933년에, 하필이면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운명을 만났다.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해서 단지 그때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만으로 삶이 고통으로 점철되기도 한다. 2026년 2월 28일, 이란 남부 미나브의 여자 초등학교가 미군의 공격으로 추정되는 폭격을 당해 학생 168명이 사망했다. 잔해만 남아 있는 학교 앞에서 오열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전 세계가 목격했다. 이런 일들이 인류의 역사에 빈틈이 없이 빼곡하게 지구상의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망한 미나브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장례식
(경향신문, 링크)
습관처럼 당신의 평안을 기원하고 나와 내 가족의 무사를 바라는 일이, 하루의 행복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행복의 집을 짓겠다는 내 인생의 목적이 속절없이 민망해지고 만다. 그것은 세상의 불공평함으로 인해 평안이 아닌 하루의 생존을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을 마주한 부끄러움이고 역사 앞에선 개인의 무력함에서 오는 안타까움이다.
불공평함이 그뿐인가. 강순희 할머니의 남편 우홍선을 사법 살인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신직수는 1차 인혁당 사건 때 검찰총장을 지냈고 2차 인혁당 사건 때는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사실상 사건 조작을 진두지휘했지만 책임은커녕 공직 재직 시절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수차례 훈장까지 받으며 무탈하게 천수를 누렸다. 인혁당 사형 확정판결을 내린 당시 대법원의 수장 민복기는 그 자신이 친일 인명사전 수록자이자 아버지는 경술국적 8인 중 하나인 민병석이고 박정희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을 역임하며 박정희 독재정권에 판결로 부역했지만 역시나 떵떵거리며 잘 살다가 93세에 세상을 떠났다. 2000년에는 서울대 법대 동창회가 선정한 ‘제8회 자랑스러운 서울 법대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969년 우홍선·강순희 부부가 1남 3녀의 자녀들과
결혼 13주년 기념으로 찍은 가족사진.
(4·9통일평화재단 제공)
국가 권력에 의해 가족이 죄도 없이 목숨을 빼앗긴 것도 억울해 미칠 노릇인데 공범으로 가담한 자들의 ‘무사 평안’한 말년을 지켜보는 심정은 또 어떠하겠는가.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소설 『파친코』는 일제 식민지에서 태어난 운명으로 어쩔 수 없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야 했던 재일조선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소설을 시작하는 강렬한 첫 문장이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주인공 선자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환경 속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그래도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헤치고 살아낸다.
우리 앞에 살아 있는 강순희 할머니 또한 그랬다. 남편의 억울한 옥살이와 사형 선고에 맞서 직접 발로 뛰며 증거를 찾고, 빨갱이 가족이라며 손가락질당해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남편 옥바라지할 때도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옷 잘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다.

2012년 인혁당 희생자 추모 전시회에서 남편 초상화 앞에 선 강순희 여사
(연합뉴스, 링크)
비록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세상을 원망하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몇 달을 누워지냈지만 다시 일어났다. 남편 산소에 갈 때면 그리움과 박정희에 대한 미움에 북받쳐 ‘박정희 살인마! 천벌을 받아라!’를 꼭 세 번씩 외쳤다고 한다.
강순희 할머니는 회고록에서 수차례 ‘나는 부모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라고 ‘남편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라고 말한다. 그의 당당함과 건강한 자존감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 남편을 잃고 나서는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살았다.
대한민국 군부독재의 역사는 그를 저렸지만 그래도 그는 상관없이 사랑으로 살았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막 같이 죽고 싶었지. 그런 생각이 든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 그렇지만 아이들 위해 살아야겠다 싶어서 고비를 넘겼어요.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극복하며 사는 게 인생입니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극복하며 사는 게 인생입니다. 오늘 밤에 죽어도 괜찮아요. 나한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내 힘껏 노력하고 살았으니까. 행복이란 게 사람마다 달라요. 남들 눈에는 행복해 보여도 그 사람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행복했다’, ‘불행했다’ 말하지 않은 겁니다. 주어진 운명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며 살았다는 걸로 나는 만족해요.”
사는 데 무슨 목적 같은 게 있을까. 굳이 목적을 두자면 사는 그 자체에 있을 따름이다. 그는 각자의 잣대와 기준에 따라 갈리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극복하며 살았다. 고통과 비탄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살았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난 후 그에게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하루가 있었는지, 얼마나 있었는지는 이제 궁금하지 않다. 불행한 날이 더 많았는지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며 살았다는 걸로 만족하면 그뿐이다. 유시민 작가와 인터뷰에서 강순희 할머니는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는 후회와 한스러움을 얘기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면, 좌절을 피할 수 없다. 좌절을 피하지 못하는 나의 무기력함과 나를 좌절시킨 세상에 대한 원망도 피하기 어렵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장애물이 닥쳐도, 원망 같은 거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라고 말하는 강순희 할머니의 말이 그렇고 그런 뻔한 좋은 말로 다가오지 않은 것은, 그가 살아낸 세월이 있어서다.

(스레드, 링크)
오늘의 강순희를 나는 철학자로 여긴다. 인생과 세상사에 대한 세부 정보를 거듭거듭 잃으면서도 삶의 큰 원칙은 더 확고하게 다져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철학자 말고 어떤 단어를 쓰겠는가.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유시민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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