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남편을 앗아간 국가 폭력 사건
“국가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수많은 답변이 있지만, 막스 베버가 내린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인간 공동체’란 개념이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군대, 경찰, 감옥 등 국가란 결국 어마어마한 물리력을 독점하고 있고 사법 체계를 통해 이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재 권력은 공공의 안녕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할 이 물리력, 즉 공권력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정치세력에 반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사용합니다. 이때 국가가 가진 물리력은 가장 잔인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이 됩니다. 이것이 ‘국가 폭력’입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박정희
이 관점에서 이승만으로부터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곧 국가 폭력의 역사였고 그것에 의한 희생의 역사였으며, 그 희생을 딛고 일어서는 저항의 역사였습니다. 이 저항의 역사가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가장 긴 시간 집권했던 박정희 정권은 숱한 국가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었습니다.
1972년, 박정희는 자신의 1인 독재 체제를 영구화하기 위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헌법 일부 정지 등의 내용을 담은 반헌법적 비상조치를 내리니, 이것이 바로 ‘유신 쿠데타’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근거하여 1호부터 9호까지 이른바 ‘긴급조치’들을 남발합니다.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열린
유신 헌법 공포식
출처-<연합뉴스>
이 긴급조치들은 자신과 유신에 대한 비판을 모두 유언비어로 상정하여 위반 시 영장 없이 체포 및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는 조치였으며, 명백히 반헌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4년,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을 터뜨립니다. 박정희의 유신쿠데타에 대한 사회 각계각층의 반발과 저항이 거세지자, 또다시 ‘용공 조작 사건’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수많은 검사 판사 중 ‘법과 정의’의 편에 선 이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진 고문으로 만들어 낸 이 엉성한 조작은 속전속결로 대법원까지 올라가 끝내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으며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 날 8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판 모습
출처-<의문사위>
강순희 여사가 유시민 작가를 찾은 이유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이 열립니다. 그리고 희생자 모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출처-<의문사위>
결국 당시의 사법부는 정권의 하수인이었으며, 이 사건은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를 유지하기 위해 반인권적·반인륜적 고문에 의해 조작된 국가 폭력임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유시민 : 그러셨구나. 노무현 대통령 떠올리면 어떤 생각 드세요? 돌아가신지 16년이 넘었는데.
강순희 : 우리 사건 재심할 수 있게 해 주셨잖아요. 그 은혜를 못 잊죠. 그분을 못 잊죠. 재심을 해서 무죄 선고를 받았을 때가 노무현 대통령 계실 때였어요.

강순희 여사와 유시민 작가
출처-<도서출판 은빛>
어느 날, 이 조작 사건으로 남편 ‘우홍선’을 사형대로 보내고 긴 세월을 홀로 ‘살아내신’ 미망인, 아흔세 살의 강순희 여사가 유시민 작가를 찾았습니다.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고,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하는 ‘마지막 일’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을 유시민 작가가 해줬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강순희 여사가 굳이 유시민 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재심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아 고맙고, 노무현 대통령 하면 곧 유시민 작가가 떠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강순희’를 만난 것이 운명인지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에 관심이 많고 정의감이 높은 분이었다. 그가 대통령이었던 때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나는 노무현의 정치적 동지였으며 국회의원과 장관으로 일하면서 그를 도왔다.」
「그런 나를 강순희가 찾아냈다. 운명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노무현 대통령이 맺어준 인연임에는 분명하다. 나는 그 인연을 받아들였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역사를 알리는 일, 강순희 여사는 이 마지막 일을 유시민 작가가 맡아 준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고, 유시민 작가는 강순희 여사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강순희 여사가 말하고, 유시민 작가가 듣고 기록한 책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는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출처-<도서출판 은빛>
우홍선 선생과 함께 한 행복했던 결혼 생활
소녀 강순희는 세 살 때부터 ‘하얼빈’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광복 2년 전 고향인 ‘박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평양으로 이사해 ‘평양1고녀’에 입학합니다. ‘하얼빈의 어린이’에서 ‘평양의 여고생’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일각에 돌입한 인민군 부대
출처-<50년대 북한 발행서>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중국군이 개입하자 동생을 업고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은 강순희 여사의 개인사는 곧 우리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강순희 : 역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게 다 역사예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피난민 강순희 일가족의 삶은 우리가 충분히 예상하듯 참으로 모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고생 강순희는 그것을 씩씩하게 이겨냈습니다.
대전에서 빨갱이 하나가 살다 도망쳤다는 빈집에 들어가 미군 구호품을 팔고 옷을 수선하며 살았습니다. 공부가 하고 싶어 ‘충남고녀’에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했지만, 옷 장사로 먹고 살기 위해 학교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강순희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부산으로 내려온 강순희는 ‘한국은행’에 입사하여 은행원이 됩니다. 그리고 직장 동료와 ‘로렌스 올리비에’가 나오는 영화 ‘황혼’을 보러 가기로 한 날, 군복 입은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를 같이 보려 한 직장 동료의 애인이 전쟁 중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훗날 강순희의 남편이 되는 ‘우홍선’이었습니다.
강순희 : 학교니 집안이니 하는 것도 안 봤어요. 아예 물어보질 않았어. 그냥 같이 있었으면 좋았고, 얘기하면 재미있었지. 그러니까 만났고, 마음에 드니까 결혼한 거야. 계산이 없었어요, 진짜.
강순희는 아는 게 많았고, 노래를 잘했던 우홍선의 편지 프러포즈를 받아들여 스물셋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맞춰 놓은 결혼식 반지를 돈이 없어 못 찾고 가짜 반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 전, 한국은행 서울 본점으로 옮긴 강순희는 동대문 쪽 문간방 하나를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출처-<도서출판 은빛>
1950년에 학도병으로 입대해 병참 장교로 대구에서 근무 중인 우홍선과의 결혼 생활은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당시 여느 경상도 남자들과는 달랐습니다.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었고, 아내를 존중했습니다.
유시민 : 살면서 제일 좋았던 하루, 또는 제일 좋았던 시간을 떠올릴 수 있으신가요?

출처-<도서출판 은빛>
강순희 : 우리 신랑하고 데이트할 때가 제일 좋았지. 범어사 갔을 때.
유시민 : 역시 그날이었구나. 우홍선 중위하고 첫 데이트한 그날이 강순희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었군요.

출처-<도서출판 은빛>
남편을 앗아간, 사람 세상 같지 않은 세상
1961년 5월 16일, 정치군인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습니다. 제대 후 통일운동을 벌였던 우홍선은 그해 6월 경찰에 잡혀갔다 7월 17일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964년, ‘1차’라고 불리는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이 터졌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주도한 용공 조작 사건이었습니다. 우홍선은 피신했고 임신 중이었던 강순희는 ‘저승사자’ 같았던 사람들에게 끌려 정보부에 잡혀갔습니다. 강순희의 어머니도 잡혀갔습니다.
우홍선은 1965년에 붙잡혔습니다. 강순희는 다시 정보부에 불려 갔습니다. 강순희는 정보부에 갈 때마다 선글라스를 끼고 가장 좋은 양장으로 빼입고 갔습니다. 이후 남편 옥바라지를 할 때도 선글라스를 끼고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다녔습니다.
강순희 : 이것들이 사람 무시하니까. 무슨, 못살아서 이북에서 왔다느니, 빨갱이라느니 어쩌니 하면서 얕잡아 보니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당당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거예요.

남편 우흥선은 1966년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다시금 우흥선과 강순희는 소중한 일상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회 현실과 무관한 개인의 삶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각 개인의 삶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로부터 규정당하는 것입니다.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일상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 임기는 4년에 1회 중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영구 집권을 획책했습니다. 6•8 부정선거(1967년)로 국회 개헌 의석수를 확보한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1971년 대선에서 온갖 금권 관권 선거를 벌여 김대중 후보를 간신히 이겼습니다.
점점 거세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그에 비례하는 권력의 위기 앞에서 박정희는 다시 용공 조작을 선택했습니다.
1974년 발생한 2차 인혁당 사건 ‘인혁당 재건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금 소중한 일상을 보내던 남편 우홍선은 갑자기 다시 붙잡혀 갔습니다. 이번에는 면회도 할 수 없었습니다. 중앙정보부가 고문과 조작을 담당하고 군사 법정이 유죄를 선언했습니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들 재판 모습
대법원조차도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우홍선을 포함한 8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사형 선고 대법원 확정 후
오열하는 강순희 여사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순희 : 옥살이나 좀 하고 나올 줄 알았어요. 죽일 줄은 몰랐어, 정말. 죽이기까지 할 줄은 몰랐어.
대법원 확정판결 다음 날 바로 새벽부터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오전 4시 55분 서도원(52세)을 시작으로 30분 간격으로 한 명씩 사형대에 세웠습니다. 우홍선은 4번째였습니다. 8시 30분 하재완(43세)을 끝으로, 죄 없는 8명을 죽인 박정희의 잔인한 반인륜적 국가 폭력은 끝을 맺었습니다. 박정희와 그 중앙정보부, 검사와 판사 등 그 하수인들은 개인의 권력욕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그렇게 차곡차곡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습니다.
강순희 : 남편 죽고 나니까 이놈의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 같지가 않았지. 사건을 조작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결국 죽였잖아요.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닌 거야...... 몇 달을 누워 있었어요. 못 일어나겠더라고.

8명의 사형 집행 소식을 듣고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오열하는 희생자 가족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강순희 : 남편이 너무 보고 싶고 그립고, 그래서 조금씩 글을 썼어요.
강순희 : 다시 볼 수 없다는 거, 딱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데 어디 가도 볼 수가 없다는 거, 그게 참 기가 막히더라고. <전쟁과 평화> 영화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죽자, 여자가 제일 먼저 한 말이, ‘당신 어디 있느냐’는 거였어요. 나는 그 사람 만나려고 산소에 갔어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꼭 갔지.
독재자의 장기 집권 획책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의 목숨을 빼앗기고도 강순희는 살아야 했습니다. 몇 달을 끙끙 앓으면서 한 쪽 눈이 실명 상태로까지 나빠져도 네 아이들을 보살펴야 했습니다.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진을 찢어서 입에 넣고 꼭꼭 씹어서 버리며 강순희는 살아야 했습니다.

1969년 결혼 13주년을 맞아
강순희, 우홍선 부부가
자녀들과 찍은 가족사진
출처-<도서출판 은빛>
꿀과 로열젤리를 팔며 의상실도 운영했고, 50대가 되어서는 성심여대 장학법인 책임자로 다시 취업을 했습니다. 천주교 프라이스 신부 도움이었습니다. 함세웅 신부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강순희도 문정현 신부가 잡혀갔을 때는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강순희는 열심히 살았고 많은 이들이 연대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출처-<도서출판 은빛>
강순희는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20대에 순수한 사랑으로 결혼해 십여 년간 어려움 속에서도 그 사랑의 힘으로 열심히 살다가 어느 순간 사랑하는 남편을 눈앞에서 빼앗기고 초중고생이던 네 자녀와 남겨졌으나, 또 다른 사랑의 힘으로 자녀들을 키워내며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오신 어머님의 인생.」
-우구(강순희 여사 아들)
‘사랑해요, 지금도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엄마!’ 中-
2007년 1월 23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무죄 판결 이후
법정을 나오며
오열하는 강순희 여사
출처-<연합뉴스>
강순희 여사는 법정을 나오며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남편이 죄 없음이 밝혀져서, 그렇기에 더더욱 억울해서 울음이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하얼빈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평양에서 여고생 시절을 보내다 6.25 전쟁으로 월남하여 남편을 빼앗기고 네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93년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강순희 여사는 말합니다.
사는 동안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힘들 때도 많았고 특히 남편이 사형당했을 때는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 만큼 절망도 느꼈으나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기에 아무 여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밤에 죽는다 해도 괜찮다고 강순희 여사는 말합니다.
강순희 : 아무 여한이 없어요. 오늘 밤에 죽는다 해도 괜찮아.
자기한테 주어진 것을 극복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잖아요. 나한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내 힘껏 노력하고 살았어요. 최선을 다했어요.
남편 죽었을 때는 막 같이 죽고 싶었지. 그렇지만 아이들 위해 살아야겠다 싶어서 고비를 넘겼어요.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아흔세 살까지 산다면 강순희처럼

강순희 여사와 유시민 작가
출처-<도서출판 은빛>
유시민 작가는 노무현 대통령이 맺어준 인연으로 이 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강순희’라는 한 사람의 93년 간의 인생 기록이었습니다. 그 삶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과 군사쿠데타와 민주화 투쟁과 남편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한국 현대사가 곧 강순희 여사의 삶이었고 그 삶은 우리의 역사였습니다.
강순희 : 자기한테 주어진, 자기 앞에 펼쳐진 운명을 열심히 살아가는 거, 그게 인생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서 극복하며 사는 거,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장애물이 닥쳐도, 원망 같은 거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그런 게 쌓여 인생이 된다.
한국 현대사가 고난의 세월이었던 것처럼 강순희 여사의 삶도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강순희 여사는 그 고통 앞에 굴복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박정희가 지배했던 국가 권력에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긴 후, 남편 산소를 가던 길에서 본 푸른 하늘에 남편 넋을 떠올리며,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의 과정에서 울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습니다. 남겨진 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출처-<도서출판 은빛>
유시민 작가는 이러한 강순희 여사의 삶에 대한 기록을 보고, 강순희 여사의 구술을 직접 들으며 여러 차례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운명 앞에서 씩씩하게 살아온 강순희 여사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며, 강순희 여사의 인생에 바치는 유시민 작가의 헌사로 독후감을 맺을까 합니다.
「 나도 아흔세 살까지 산다면 ‘아흔세 살의 강순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추신1.

책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는 강순희 여사의 일생에 대해 유시민 작가의 재능 기부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지난번 라이브 유튜브 방송으로도 진행된 출판 기념회에 참석한 김형태 변호사(인혁당 재심 사건 변호인)는 이 책의 수입이 재단(4•9통일평화재단)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내용 및 전개가 좋고, 책으로 인한 수입도 좋은 곳에 쓰이니 많은 분이 이 책을 읽어보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추신2.
지난 3월 29일 이재명 대통령은 제주에서 열린 제주 4·3 희생자 유족과의 오찬에서 다시는 국가 폭력으로 국민이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가해자들은 나치 전범 처벌과 같이 영구적으로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2024년 12월,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 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최상목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되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말대로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재입법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인빅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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