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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개인 사정으로 1년 반만에 연재를 재개합니다.

그간 있었던 무수한 일들은 글 속에서 차차 풀겠습니다. 

기다려 주신 모든 분들께

사죄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9·11

 

여름도 가고 슬슬 가을이 다가오며 아침 공기가 서늘해져 가던 때였다. 그날은 비가 오려는 건지 하늘이 잔뜩 흐린 날이었다. ‘오늘은 욕을 얼마나 먹을까’라고 생각하며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차에 오르는데 강 씨가 약간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뉴스 봤나? 미국에 난리 났다.”

 

퇴근하면 밥 먹고 자고, 일어나면 티브이 볼 시간 따위 없이 졸린 눈으로 집을 나서던 나에게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미국에요? 무슨 난리요?”

“어떤 미친놈들이 미국 어디 빌딩에 비행기 몰고 가서 때리 박아 뿟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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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코리아, 링크)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라디오에서 새어 나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대충 요약해 보자면 알카에다라는 테러 단체가 미국 민항기를 공중 납치하여 쌍둥이 빌딩이라는 곳과 미 국방성에 자살 테러를 했다는 거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다른 나라를 때리고 다녔으면 다녔지, 그렇게 두들겨 맞을 거라는 생각은 나는 물론이고 미국인,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건물이 붕괴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고, 화재로 인한 열기와 유독가스 때문에 고층에 있다가 뛰어내려 숨진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아수라장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도 물류센터에 도착해 우리 앞으로 배정된 화물들을 맞닥뜨리곤 그런 슬픈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미국은 테러를 막지 못했지만 나는 강 씨의 폭언 및 욕설 테러를 막아야 했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인간은 대부분 멀리 있는 남의 큰 고통보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작은 고통에 더 크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매일 치열하게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은 슬픈 감성에 젖을 겨를이 없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하루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이어가는 중에 지금까지는 연습 게임이었다고 비웃기라도 하듯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각종 선물 세트가 매일 아침 산처럼 쌓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절망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그저 물건을 옮기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이 힘든 것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힘들게 하는 것은 더 큰 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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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링크)

 

추석 물량으로 강 씨의 히스테리 지수가 더욱 높아졌고 나는 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테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살아갔다. 마음의 화가 켜켜이 쌓여 화병이 날 지경이었지만 매일 아침 샤워를 하고 새벽 찬 공이를 마시며 늦지 않기 위해 가파른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목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욕먹는 값으로 월급을 받는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명절을 버텨내는 동안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일을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을 쉽게 그만두지 못했던 이유는 돈도 있었지만 그 당시 직업을 바꿔 탱크로리를 몰기 시작한 아버지와 화물 종사자끼리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어색한 부자 관계를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작은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나도록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출근 준비를 하다 마주쳐도 무슨 일을 하는지, 일은 할 만한지조차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무관심은 평생 그랬듯 일관성이 있었다.

 

어떤 걸로 꼬투리 잡혀 욕을 먹을까 불안에 떨면서도, 결국 밥알 안 먹어도 될 만큼 실컷 욕을 먹으며 오전 한 차 분량을 마무리했다. 식사 후 캔 커피를 마시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어떤 마음으로 사셨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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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대대적인 전투를 벌일 때보다, 언제 어디서 저격당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정글을 헤치며 은밀히 정찰하셨던 그 순간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이 이랬을까?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늘 “밥 무라”와 “예”가 전부였다. 경상도 태생 부자의 대화는 이게 한계가 아닐까 싶었다. 다른 가정의 대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 리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내 상황에서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야 이 시발아. 뭘 멍때리고 있노? 가자.”

 

피곤한 오후 일과가 시작되고 있었다.

 

 

선을 넘은 트럭

 

어느 순간 딱 500만 원만 벌고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왜 500인지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저 500 정도 들고 객지로 가면 대충 방을 구하고 뭐라도 일을 시작해서 원만하게 독립할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어린 마음에는 그럴듯했다.

 

하지만 인생은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점심을 거르고 오후 분량까지 일해서 조금 일찍 마친 날이었다. 그날은 강 씨와 평소 친하던 기사 길 씨, 그의 조수(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 ‘안경’이라고 하겠다.), 나까지 함께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해물칼국수를 먹으며 강 씨가 길 씨에게 물었다.

 

“일도 시마이했는데 한잔할까?”

 

조수 두 명의 표정을 살피던 길 씨는 씨익 웃었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잠자코 있었는데 강 씨가 막걸리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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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드픽, 링크)

 

“이모 여기 생탁 하나요.”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강 씨에게 물었다.

 

“술 먹고 운전하실라고요?”

 

강 씨는 ‘뭔 개소리여?’라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야! 막걸리 한 병 나눠 먹는데 이게 술이가? 그리고 화물차들은 음주 운전 안 잡는다.”

 

주거니 받거니 익숙한 걸 보니 그들은 종종 이딴 짓을 하는 모양이었다. 보통 차도 아니고 큰 화물차를 몰면서 반주로 술을 마시겠다는 인간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미 욕을 달고 사는 걸 보며 사람이 아니라 생각해야 했지만…)

 

술 좋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버지도 음주 운전은 하지 않으셨기에 눈앞의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강 씨는 내 앞에 놓인 막걸릿잔에 술을 따르려다 내 표정을 보고 물었다.

 

“니는 안 묵을 거가?”

 

앞자리에 있던 길 씨의 조수인 안경이 어딜 버릇없이 술을 안 받냐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마 이거 쪼메 묵는 거 술도 아니다. 행님 주시는데 안 받고 머 하노.”

 

술을 조금 먹으면 술이 아니라니, 똥이 조금이면 똥이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화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아니요. 저는 됐습니다.”

 

내 말을 듣고서 강 씨는 술맛 버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싫으면 치아라! 쯧. 유도리 없는 새끼.”

 

그 ‘유도리’라는 것이 얼마나 충만해야 벌건 대낮에 술을 먹고 운전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때부터 나는 이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이 모인 곳을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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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링크)

 

 

연말과 함께하는 퇴사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추운 날씨 속에서도 땀을 줄줄 흘리며 짐을 옮겼던 탓에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 날이었다.

 

오후에 양산의 큰 물류 창고 배송만 마치면 그날 일과가 끝이었다.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내 키보다 30센티 높은 선반에 참치 통조림 상자를 올리는 순간, 목덜미 쪽에서 ‘뚝’하는 소리가 나더니 목이 뻣뻣해졌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려 해도 아프고 잘 돌아가지 않았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내가 말없이 고장 난 로봇처럼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강 씨가 물었다.

 

“마 와 그라노? 어디 아프나?”

“아까 창고에서 상자 올리다가 뚝 하더니 목이 안 돌아가네요”

 

그 말에 강 씨는 운전하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외쳤다.

 

“그만둘라면은 한 사람 소개시켜 주고 가야 한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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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 링크)

 

사람보다 돈이 중요한 자본주의적 사고 때문이었을까?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이라면 다친 사람에게 위로나 걱정을 건네는 게 먼저일 텐데 내가 그만두면 당장 일손이 부족해질 것을 걱정하는 강 씨에게 나는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애초에 쌓였던 정도 없었지만).

 

처음엔 딱히 소개해 줄 사람도 떠오르지 않았고 기분만 상했지만, 목표 금액까지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계속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잘려도 일을 나가시던 아버지가 떠올라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서였을까. 며칠 뒤 강 씨가 게거품을 물며 욕을 해대는 순간, (속으로 ‘조까’라고 하며)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해버렸다. 강 씨는 꼬장이란 꼬장은 다 부리면서도 일을 그만둔 며칠 뒤 연산동의 한 싸구려 고기 뷔페에서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조금 더 챙겨 넣었다.”

 

집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58만 원이 들어있었다. 한 달에서 한 주를 못 채우고 그만둔 것인데 월급이 70이었으니까 58만 원이면… 5만 원 정도 더 넣은 셈이다. 강 씨로서는 나에게 욕을 퍼부으며 일했던 그동안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 값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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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일을 그만두면서 이제 어디 가서 욕먹으며 일해도 아무렇지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경험은 나중에 군대에 가서도 아무리 불합리한 상황에서 욕을 먹어도 내상을 입지 않게 해주었다. 욕설 면역이랄까.

 

매일같이 나를 억압하던 이가 사라지자 불안할 정도로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벌어먹고 살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보니 이 일을 하면서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그저 나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일찍 일하러 나가셨고, 밤에는 술에 취해 주무셨다. 나는 아버지보다 한 시간 뒤쯤 일어나 일하러 나갔고,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곯아떨어졌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시간을, 나는 나의 시간을 따로 살아갔다. 

 

몇 개월 동안 일하며 온갖 폭언과 욕설을 견뎌냈지만, 부모님께 조언을 구하거나 털어놓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릴 적에도 고민이 생기면 그나마 말 붙이기 쉬운 어머니께 이야기를 꺼내곤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내가 문제라는 지적과 더 강해지라는 말뿐이었다. 가족에게 위로나 도움을 기대하는 마음은 버린 지 오래였다.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고, 혼란과 부당함이 넘쳐나도 하소연할 곳 없이 그저 견뎌야 했던 70~80년대에 청춘을 보낸 부모님이었다. 그런 부모님이 2000년대를 살아가는 나의 현실에 공감하거나, 응원이나 현명한 답을 건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해해야 하지만, 섭섭한 마음과 한없이 외롭게 느껴지는 나의 인생도 어쩔 수 없었다.

 

얼마 후 나에게 트럭 기사 조수 자리를 소개해 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이상한 기분에 친구에게 물었다.

 

“야, 근데 니 강 씨한테 내 소개해 준 거 말인데 니 그만둘라고 하니까 한 명 소개해 주고 가라고 해서 그런 거가?”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다.”

“야 이 새끼야 친구를 팔아묵노!!!”

“미안. 하하하!”

 

일을 그만둘 때 앞으로 돈 벌 걱정을 했던 것과는 달리 정신적·체력적으로 방전이 된 나는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쓰며 겨울을 보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것처럼 그토록 간절하게 독립하겠다는 마음도 지갑이 여유로워지자, 어느새 희미해지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2002년이 왔다. 그해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많은 일들이 있는 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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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김폭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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