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사후, 지도자의 부재

메디나에서 평화를 유지하던 핵심 축 무함마드가 632년 세상을 떠났다. 무함마드가 남긴 것은 거대한 제국도, 영토도, 화려한 왕실도 아니었다. 유일신 알라를 믿는 신앙으로 묶인 공동체, 움마였다.
움마 공동체는 국가도 아니고, 안정된 정치 체제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함마드는 자신의 뒤를 이을 정치적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하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사라지는 순간, 공동체 역시 함께 사라질 수 있는 상태였다.
실제로 흔들렸다. 무함마드 사후, 일부 부족은 메디나와 맺었던 약속을 철회했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냈던 보조금 형식의 기부금인 자카트(zakāt, 종교적 의무세)를 내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무함마드가 죽었으니 자신들의 의무도 끝난 것으로 여겼다. 실제로 움마 공동체는 다시 흩어질 위기에 놓인다. 무함마드의 죽음은 단순한 지도자의 죽음이 아니었다. 공동체 자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사건이었다.
공동체가 해체되면 그동안 쌓아온 평화의 공존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는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기로 한다. ‘칼리프(khalīfa)’. 아랍어로 ‘뒤를 잇는 자’ 혹은 ‘대리자’를 뜻한다. 다만, 여기서 대리자는 신의 계시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무함마드가 남긴 공동체를 대신 맡아 다스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아부 바르크, 초대 칼리프

첫 번째 칼리프는 아부 바크르. 573년경 메카에서 태어나 634년에 사망한 인물로, 632년부터 약 3년여간 움마 공동체를 이끌었다. 무함마드의 가까운 동료였고, 공동체 안에서 신뢰받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선출은 왕위 계승처럼 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동체 내부의 논의와 동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왜 사람들은 이 선택에 동의했을까? 아부 바크르는 새로운 계시를 주장한 인물이 아니라 무함마드가 남긴 공동체를 이어받아 유지하고 정리하는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알-시디크(al-Ṣiddīq)’라는 별칭은 ‘진실을 믿는 자’ 또는 ‘진실을 증언하는 자’라는 뜻으로, 무함마드의 메시지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 그의 태도를 반영한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데 공동체가 동의한 것이다.
누군가는 질서를 세워야 했다. 평화를 유지하며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야 했다. 예언자는 사라졌지만, 칼리프가 세워짐으로 공동체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즉, 이슬람의 지도자 칼리프는 역사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권력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라, 공동체가 붕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현재 수많은 이슬람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억만장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모습과는 확실히 대조적이다.
리다 전쟁(Ridda Wars)
칼리프가 선출되었다고 공동체가 안정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일부 부족들은 무함마드가 아닌 다른 지도자는 인정할 수 없다며 정치, 종교적 관계를 끊고 독자적인 길을 선언한다. 현시대 사이비 교주들처럼 새로운 예언자임을 자처하며 공동체를 이탈하는 이도 있었다. 무함마드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부족들에게 그의 죽음은 곧 약속의 종료로 받아들여졌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메디나의 움마 공동체는 다시 부족 단위로 흩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칼리프로 선출된 아부 바크르는 이 상황에 단호히 대처한다.
19세기에 그려진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 모스크 그림
먼저, 공동체의 이탈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카트 납부 거부는 공동체 질서를 거부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그리고 공동체를 다시 하나로 묶기 위해 군사적 대응을 결정한다. 리다 전쟁(Ridda Wars)이다.
리다는 아랍어에서 온 말로, 문자 그대로 보면 “원래 있던 상태에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종교 문맥에서 보면 의미가 다르게 해석된다. 한 번 받아들였던 신앙에서 다시 돌아서는 것 혹은 공동체에 들어왔던 사람이 다시 빠져나가 이전의 관계를 철회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리다 전쟁을 우리말로 옮길 때 흔히 ‘배교 전쟁’이라고 번역하지만, 사실 리다는 초기 이슬람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신앙의 이탈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이탈, 공동체 질서로부터의 이탈을 내포한다.
리다 전쟁은 공동체를 떠나려는 세력을 붙잡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종교적 신념이 다른 이를 벌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동쪽, 남쪽, 북쪽으로 병력을 나누어 파견했고, 각 지역에서 이탈한 부족들과 자칭 예언자 세력들을 차례로 상대했다.
이 가운데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새로운 종교적 권위를 주장한 인물, 대표적으로 무사일리마가 있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라 주장하며 상당한 추종 세력을 모았다. 단순히 반란 지도자를 넘어 종교적 권위까지 주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메디나 공동체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그를 '알-카드다브(al-Kadhdhab)', 거짓말쟁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그의 주장을 부정하는 후대의 평가를 반영한 것이다.

메디나 공동체는 무사일리마를 중심으로 결집한 세력과 대규모 전투를 벌인다. 공동체 존속을 건 치열한 싸움이었다. 특히, 야마마 전투는 무사일리마 공동체의 안방에서 치러지는 전투였기에 움마 공동체에게는 매우 불리했다. 하지만, 메디나 사람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이들의 전투 의지는 불타올랐고, 무사일리마 측의 최우 방어선인 야마마 정원의 벽을 허물면서 메디나가 승리한다. 무사일리마는 전장에서 사망하며 야마마 공동체는 붕괴한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초기 공동체 핵심 인력을 상당수 잃게 된다.
이탈은 진압되었고, 아라비아 반도는 다시 움마 공동체가 추구했던 질서 아래 하나로 묶였다. 이 과정을 통해 공동체의 성격이 변한다. 무함마드의 움마가 신앙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였다면, 리다 전쟁 이후의 움마는 질서를 스스로 유지하고 강제할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전히 신앙은 공동체의 중심에 있었지만, 신앙은 규범으로도 작동한다. 규범은 질서가 되었으며, 질서는 무력으로 유지되었다.
박해받으며 명맥을 유지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으며 정치의 중심 자리로 나아갔던 것처럼, 무함마드의 계시와 이를 따르는 신앙은 리다 전쟁을 통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정치를 통해 권력을 쥐게 된 종교는 제국 건설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시작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라비아반도가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적 공간에 안정적으로 묶였다. 이전까지 아라비아는 부족 연합 이상의 단위로 통합된 적이 거의 없었다. 메디나는 전쟁에서 승리하며 앞으로 공동체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 확인했다. 내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공동체는 더 이상 안으로만 머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시선은 자연스레 밖으로 향한다.
공동체가 현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식량과 자원이 필요했다. 당시 아라비아반도는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부족은 무역을 통해 생존을 이어가야 했다. 전쟁에서 승리했어도 이러한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큰 규모의 공동체가 된 메디나는 새로운 공간과 자원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두 제국이 이들의 눈에 들어온다. 오랜 싸움 끝에 지쳐 있던 국가들.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계속>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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