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없는 질서를 받아들인 유럽의 상황
유럽이 변하고 있다.
유럽은 한동안 미국 없는 질서를 겁냈다. 그런데 이제 그 미래를 피하는 대신, 그 상황이 와도 버틸 수 있게 미리 손을 대기 시작했다.
미국이 벌써 유럽에서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뜻은 더 단순하다. 유럽이 이제 미국의 자동 개입을 자연현상처럼 믿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나토(NATO) 탈퇴를 “절대적으로 고려 중”이라고 말하고, 미국 국방장관이 집단방위 공약을 시원하게 재확인하지 않으며, 백악관이 유럽 주둔 미군 감축까지 검토하는 장면이 이어지자, 유럽은 관계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마음이 떠났다는 신호를 읽는 순간, 감정은 생각보다 빨리 식는다. 감정이 식은 자리는 계산이 차지한다. 그렇다고 유럽이 “미국을 몰아내자”고 하는 건 아니다. 미국이 주저하거나 물러서더라도 거기에 매달리지 않게 만드는 보험을 만들려 한다.
다시 말해, 별도의 유럽군을 새로 만드는 데 당장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 더 많은 지휘와 비용, 생산과 책임을 떠안아 나토를 유럽식으로 버티게 만드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한 마디로 나토 해체가 아니라, 미국 신뢰 저하에 대비한 백업 설계다.

이번 변화가 예전과 다른 이유는 말만 앞세운 결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방비를 늘리고, 공동조달 틀을 만들고, 생산 기반을 키우고, 지휘 구조를 손보는 일이 동시에 굴러가기 시작했다. 불안을 성명으로 말하는 단계가 아니라, 예산과 제도로 바꾸는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나토의 유럽화
핀란드 대통령 알렉산데르 스투브는 “더 유럽적인 나토”를 말했고, 나토 사무총장 마르크 뤼터는 “더 유럽이 주도하는 나토”를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나토도 2월에 유럽 동맹국들이 지휘 구조의 고위 직위를 더 맡는 재배치를 공식적으로 거론했다.
특히 눈여겨볼 나라는 독일이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전략적 자율성을 말해왔지만, 독일은 대체로 미국이 이끄는 틀 안에 머무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메르츠 총리가 “유럽 안의 더 강한 나토”를 말하고, 유럽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 시작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유럽 안보 논의가 선언에서 설계로 넘어가는 데 독일의 태도 변화가 결정적이었던 이유다.

유럽이 이번에도 말만 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결국 돈을 보면 드러난다. 이런 종류의 결의는 언제나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진심은 성명서보다 예산서에서 먼저 보이고, 불안은 회의장보다 공장에서 먼저 실체를 갖는다.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로 그 단계다. 그냥 “미국이 예전 같지 않다”는 푸념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숫자로 바꾸고 있다. 나토는 2025년에 모든 동맹국이 기존 2퍼센트 목표를 채웠다고 밝혔다.
유럽 동맹국과 캐나다의 방위비는 전년보다 20퍼센트 늘어 5,740억 달러에 이르렀다. 한때는 방위비 증액이 정치적 선언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실제 지출이 동맹의 분위기를 밀고 가는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속도다. 2025년 헤이그 정상회의에서는 2035년까지 국내총생산의 5퍼센트를 국방과 안보 관련 지출에 넣겠다는 목표까지 나왔다. 이건 “언젠가 대비하자”는 수준이 아니다.

러시아의 압박, 우크라이나 전쟁의 소모, 미국의 거래적 태도가 한꺼번에 겹치자, 유럽은 평소라면 10년 걸릴 결정을 훨씬 빠른 시간표로 당겨 잡기 시작했다.
유럽연합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판을 깔고 있다. 유럽연합은 ‘Readiness 2030’ 백서와 재무장 계획을 내놓았고, SAFE라는 공동조달 장치를 통해 최대 1,500억 유로 규모의 대출 틀까지 마련했다.

돈의 사이즈가 커진 것 외에도 이제 유럽은 안보 불안을 각국 국방부의 고민으로 흩어놓지 않는다. 국방을 유럽 공동의 재정과 공동 조달, 공동 생산능력이라는 틀 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 각자 겁먹던 유럽이, 함께 주문하고 함께 만들고 함께 버티는 유럽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무기를 더 사자”가 아니다. “빨리 만들 수 있느냐”다.
포탄, 자주포, 방공, 군수지원, 부품 공급망처럼 당장 전장을 버티게 하는 분야에서는 몇 년 뒤의 구호보다 오늘의 생산라인이 더 중요하다.
유럽이 산업정책을 방위정책과 묶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군사력은 결심만으로 생기지 않고, 납기와 물량, 정비 체계가 갖춰져야 비로소 전력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지휘 구조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유럽 동맹국들이 나토 안에서 더 많은 고위 직책과 역할을 맡는 재배치가 거론되는 것은 상징이 아니다. 돈은 냈는데 결정은 남이 하는 구조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고, 반대로 책임을 더 질수록 지휘의 몫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예산, 생산, 지휘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묶이기 시작했다는 점, 그것이 이번 변화의 진짜 무게다.
새 질서의 필연적 과제 : 방산
전술했듯, 이제 정치인의 발언만으로는 군사력 확대의 임팩트가 충분하지 못하다.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 행동 중에서도 핵심은
“누가 더 빨리 만들고, 더 빨리 채워 넣을 수 있는가?”
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준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전장에서 먼저 드러난 것은 용기의 부족이 아니라 물량의 부족이었고, 선언의 부족이 아니라 보충 속도의 부족이었다.


그래서 유럽이 지금 따지는 것은 “얼마나 강한 군대를 가질 것인가”보다 “얼마나 빨리 전력으로 바꿀 수 있는가”다.
최근 유럽연합이 내놓은 우선순위도 그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통합형 방공, 현대식 포병, 장거리 타격 체계, 탄약과 미사일, 드론, 군사기동성 같은 항목이 앞에 놓인 것은, 그것들이 전쟁이 길어질수록 가장 먼저 바닥나고 가장 빨리 다시 채워야 하는 품목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유럽은 당연히 역내 산업을 키우고 싶어 한다. SAFE 규정이 계약자와 하청업체의 설립지, 부품 원가의 최소 65퍼센트 기준까지 걸어 잠근 것도 그 때문이다. “유럽 우선”은 구호가 아니라 제도다.
하지만 제도가 있다고 공장이 하루아침에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공장이 있다고 숙련 인력과 공급망이 곧바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유럽이 바라는 방향과 유럽이 당장 감당할 수 있는 속도 사이에는 여전히 간격이 있다.
그래서 가장 현실적인 길은 하나로 모인다.
자국 산업을 지키겠다고 국방 속도를 늦출 수는 없고, 국방 속도를 맞추려면 외부 공급자를 유럽 안으로 끌어들여 유럽식으로 바꿔 써야 한다.
그냥 사 오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 조립, 부품 현지화, 정비 거점, 기술이전, 공동생산을 묶는 방식이다. 외부 조달을 하더라도 그 외부를 점점 더 유럽화하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대목에서 방산은 부차적 산업이 아니다. 새 질서를 떠받치는 시간을 누가 줄여줄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공장을 돌려 납기를 당기고, 생산과 정비를 묶어 공백을 메우고, 긴급 소요를 몇 년이 아니라 몇 달 단위로 바꿔낼 수 있는 쪽이 전략의 일부가 된다.
결국 앞으로 유럽에서 문이 열리는 기업은 무기를 파는 기업이 아니라, 유럽이 잃고 싶지 않은 시간을 줄여주는 기업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 방산의 기회
여기서 한국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유럽이 지금 찾는 것은 ‘한국산 무기’ 자체가 아니다. 유럽 안에서 같이 만들고, 같이 고치고, 같이 돌릴 수 있는 한국 방산이다.
실제 계약들이 이미 그렇게 움직였다.
폴란드는 K2 전차, K9 자주포, FA-50, 천무를 들여오면서 단순 구매로 끝내지 않았다. 기술이전, 교육훈련, 정비, 현지 조립을 함께 묶었고, K2 2차 계약에서는 일부를 폴란드 글리비체 공장에서 만들기로 했다.
루마니아의 K9 계약에도 현지 생산 조항이 들어갔다. 유럽이 한국을 보는 방식이 “급하면 좀 사 오는 나라”에서 “같이 생산 체계를 짤 수 있는 나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북유럽 사례도 비슷하다. 핀란드는 K9을 추가 도입했고, 노르웨이는 천무를 선택했다.

여기서 유럽이 본 것은 단순한 가격표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납기를 얼마나 앞당길 수 있는가”
“전장에 맞게 얼마나 빨리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가”
“생산을 위해 유럽에 들어온 뒤 책임지고 제조하고, 정비할 수 있는가”
였다. 즉, 단순 억지력으로서 박람회장에서 멋있어 보이는 무기가 아니라, 실제로 빈칸을 메워 줄 공급자를 유럽은 원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의 강점은 꽤 분명하다.
빠른 납기,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 경쟁력, 현지화 의지, 기술이전 가능성, 운용 뒤까지 책임지는 정비 체계를 한 번에 묶어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호감이나 상징이 아니라, 전력 공백을 줄여 줄 수 있느냐가 기준이 된 시장에서는 이런 조합이 생각보다 강하다. 한국 방산의 기회가 헛된 기대만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도적으로도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한국과 유럽연합은 2024년 11월 안보·방위 파트너십을 맺었고, SAFE 규정도 추가 양자·다자 합의를 통해 제3국의 설립지나 원산지 기준을 일부 풀 수 있는 길을 남겨뒀다.
물론 자동문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이 제도 밖의 우연한 손님이 아니라, 조건이 맞으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후보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희망에만 취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유럽의 기본 방향은 어디까지나 역내 우선이고, 한국의 성과도 아직은 폴란드 비중이 큰 현실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다만, 가능성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전략을 ‘얼마나 많이 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게 들어갈 것이냐’를 기준으로 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완제품을 실어 보내는 모델로는 금방 벽에 부딪힐 수 있지만, 유럽 안에서 조립하고 부품을 현지화하고 정비와 업그레이드까지 함께 맡는 구조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결국 한국 방산의 기회는 유럽이 한국을 좋아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유럽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바깥의 공급자를 안쪽 체계로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 점에서 한국은 외부 판매자가 아니라, 유럽이 자기 속도를 늦추지 않기 위해 붙잡아 둘 수 있는 협력자로 떠오르고 있다.
기업별 전망
이제 남는 질문은 하나다.
그렇다면 지금 유럽 방산의 빈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빈 곳을 우리 기업 중에서도 어느 기업이 가장 빨리 메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기업의 이름값보다 먼저 봐야 할 것은 납기, 현지 조립, 부품 조달, 정비망, 그리고 유럽 안으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느냐다.
그 기준으로 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가장 손에 잡히는 자리에 서 있다.
유럽이 당장 급한 것은 멋진 차세대 구상보다 포병, 로켓, 탄약, 유지보수 같은 지상 화력의 빈칸인데,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바로 그 자리에 걸쳐 있다.
핀란드의 K9 추가 도입, 노르웨이의 천무 선택, 루마니아 생산 거점 착공, 폴란드에서의 유도탄 현지생산 구상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유럽이 “급하면 외부에서 사자”가 아니라 “급한데도 안에서 돌릴 수 있게 만들자”로 움직일 때, 한화는 그 요구와 가장 직접 맞닿아 있다.

현대로템은 결이 조금 다르다.
이 회사의 강점은 유럽 전체를 넓게 훑는 데 있다기보다, 폴란드를 축으로 전차와 기갑 전력의 공백을 메우는 데 있다. 동부전선 국가들 입장에서 전차는 아직도 상징이 아니라 숫자의 문제다. 몇 대를 빨리 배치할 수 있는지, 훈련과 정비를 누가 맡을 수 있는지, 현지 공장에서 얼마나 소화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K2 2차 계약과 폴란드 현지 생산 계획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템의 기회는 막연한 “유럽 진출”이 아니라, 폴란드 허브가 실제로 지역 생산 거점으로 굳어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LIG넥스원(LIG디펜스&에어로스페이스)은 숫자로는 아직 덜 커 보여도, 방향성으로는 가볍지 않다.
유럽이 가장 민감하게 보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방공과 대드론이기 때문이다. 발전소, 항만, 철도, 군기지, 도시 상공까지 방어해야 하는 상황에서 짧은 거리와 중간 거리의 공백은 생각보다 치명적이다.

루마니아의 신궁 운용 사례는 작은 신호지만, 유럽이 어떤 종류의 방어망을 더 많이 깔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준다. 다만 이 시장은 유럽 내부 업체들의 결속이 강하고, 소프트웨어 통합과 장기 운용권 문제도 민감하다. 그래서 LIG의 가능성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려면 첫 대형 사례를 현지 통합형으로 뚫어야 한다.
KAI는 이미 폴란드라는 발판을 갖고 있지만, 벽도 가장 높다.
항공은 지상 장비와 달리 주권 산업의 색채가 훨씬 강하다. 유럽은 전투기와 훈련기 분야에서 자국 산업, 공동개발, 장기 업그레이드 권한을 아주 민감하게 본다. 그래서 FA-50 사례는 의미가 작지 않지만, 그것이 곧바로 서유럽 전역으로 번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KAI의 현실적 공간은 공군 전력의 틈새를 메우는 영역, 곧 노후 기종 대체와 훈련, 경량 플랫폼 수요에 더 가깝다. 폴란드 경험을 안정적으로 끝내고 현지 정비와 개량의 깊이를 키울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가장 선택적으로 열리는 시장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이렇게 놓고 보면 그림이 조금 또렷해진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당장 필요한 것에 가장 가깝고, 현대로템은 동부전선의 중량 수요와 맞닿아있으며, LIG넥스원은 앞으로 더 커질 방공 공백을 겨냥할 수 있고, KAI는 항공 틈새시장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질서를 향한 새로운 방산 전략
한동안 유럽은 미국이 어떻게 할지를 먼저 보고 움직이는 대륙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제는 지휘와 예산, 생산과 조달을 스스로 다시 짜고 있다. 전자는 보호를 기다리는 자세였고, 후자는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자세다. 유럽은 지금 그 둘 사이의 선을 넘는 중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순한 수출 기회가 아니다. 미국 없는 질서에서 우리는 세계 어느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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