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나의 움마 공동체가 규모를 키우던 시기, 중동 지역에는 두 개의 거대 제국이 있었다. 비잔틴과 페르시아다.
비잔틴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오랜 세월 서로를 견제하며 일종의 균형 상태를 유지해 왔다. 여기서 균형이란, 평화로운 공존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쪽도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만큼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뜻에 가깝다.
지리적으로도 두 제국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지금의 이라크)을 중앙에 두고 서쪽의 비잔틴(지금의 튀르키에)과 동쪽의 페르시아(지금의 이란)가 마주 선 형태였다. 중간 지대는 자연스럽게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한쪽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 다른 쪽이 반격하여 되찾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충돌이 수 세기에 걸쳐 이어졌다. 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을 비롯하여 중동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해 왔던 관습과 같다. 지금의 국가 체제도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완성되었으니 사실, 지금의 중동 지형은 100년의 역사도 되지 않았다.
비잔틴-페르시아 전쟁
7세기 초, 서로를 제거하지 못한 채 긴장 상태로 공존하던 두 제국. 비잔틴과 사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마우리키우스가 쿠데타로 살해된다. 페르시아 왕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회복한 적이 있었다. 호스로는 그와의 친분을 명분삼아 비잔틴에 전면전을 개시한다. 하지만, 이 전쟁은 복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쿠데타 이후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고, 제국의 통치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호스로 2세는 명분은 황제를 위한 정당한 복수였지만, 실제로는 비잔틴이 약화된 틈을 이용해 제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전쟁의 전개 양상은 이를 뒷받침한다. 페르시아는 완충지대라 여겼던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점령한다. 614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으며 이후 이집트까지 장악하면서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보복전을 넘어 제국의 판도를 바꿔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천 년의 시간을 버텨온 로마 제국답게 이내 반전이 시작되었다. 비잔틴 황제 헤라클레이오스(Heraclius)가 반격에 나서면서 전세가 뒤집힌다.
쿠데타로 인한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절대왕권을 지닌 황제가 재등장할 수 있었을까?
비잔틴 황제 헤라클레이오스
602년, 비잔틴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Maurice)가 군사 쿠데타로 제거된 이후,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 포카스(Phocas)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포카스는 무능했을 뿐 아니라 통치 방식도 폭압적이었다. 제국 내부의 질서는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군사력은 쇠퇴하고 민심은 이탈했다. 이미 페르시아의 보복전이 시작되어 외부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제국은 내부적으로도 버티기 어려운 상태로 접어들었다.
헤라클레이오스 앞에 끌려온 포카스
그때 헤라클레이오스(Heraclius)가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의 총독이었다. 카르타고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수도 튀니지아 인근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당시 지중해 서부의 핵심 거점이자 곡물 생산과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다.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경제적, 군사적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헤라클레이오스는 지방에서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던 세력 가문 출신이었다. 부친이 이끄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으며 610년, 폭군 포카스를 제거한다. 이후 헤라클레이오스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 과정은 당시 비잔틴 제국의 정치 구조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황제의 권위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라, 결국 힘을 가진 자가 차지하는 자리였다. 정상적인 정치 시스템이 무너진 비잔틴 제국에서 권력은 충돌과 경쟁 속에서 유지되었다. 헤라클레이오스는 무너져가던 제국을 재정비하고 반격의 기회를 만들어 낸다.
그는 상황을 무리하게 뒤집으려 하기보다 전략적으로 시간을 확보했다. 초반엔 적극적인 반격을 펼치지 않고 수도 방어에 집중하며 제국의 핵심을 지키는 데 주력한다. 버티기 전략을 통해 급격한 붕괴를 막고 반격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군사 집안 출신답게 전쟁의 흐름을 정확히 읽었다.

페르시아는 전쟁 초기에 빠르게 진격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만큼 전선이 지나치게 확장된 상태였다. 보급선은 길어지고, 점령지 통제도 점점 느슨해졌다. 헤라클레이오스는 바로 이 약점을 파고든다. 반격 시점을 신중히 기다리다 보급로를 차단하여 페르시아군의 본진으로 진격하는 데 성공한다. 이 반격을 계기로 전세를 뒤집고, 20여 년간의 전쟁은 비잔틴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자리에는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었다. 수십 년에 걸친 총력전 끝에 두 제국은 모두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망가졌다. 군대는 크게 약화되었고,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른 탓에 재정도 대부분 고갈되었다. 농업과 상업 기반도 훼손되며 사회 전체가 피폐해졌다. 전쟁은 끝났지만, 제국을 지탱하던 구조가 무너졌다.
전쟁 직후, 비잔틴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가까스로 되찾았지만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여력은 없었다. 페르시아는 더 심각했다. 전쟁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이어지며 중앙 권력이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두 제국 모두 표면적으로는 건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깊이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 확산
여기에 전염병까지 돈다. 6세기 중반, 이집트에서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가 지중해 전체로 퍼졌다.
참고로,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는 '흑사병'으로 알려진 전염병과 같은 종류의 질병이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떠올리는 흑사병은 14세기 유럽을 휩쓴 전염병을 가리킨다.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는 그보다 훨씬 앞선 6세기에 발생한 대유행이었다. 당시 비잔틴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 시기에 이 전염병이 크게 확산했다. 이를 계기로 '유스티니아누스'로 명명되었다. 역사학자들이 사건을 구분하기 위해 시대를 기준으로 붙인 명칭이다.
이 전염병은 수십 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재유행하며 제국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하루에 수천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도시 곳곳에는 시신을 처리하지 못해 쌓아두었으며 장례를 치를 사람마저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은 일상이 되었다.
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일을 못 하니 생산성은 감소하고 담세력도 약해졌다. 영토를 지킬 병력 확보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전염병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제국은 회복할 시간 없이 또다시 타격 입기를 반복했다. 이 시기의 비잔틴과 페르시아는 전쟁에서 지친 상태일 뿐만 아니라 경제, 행정의 분야까지 동시에 약화된 상태에 놓인다.
칼케돈 범종교회의
종교 갈등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비잔틴 제국의 동방 지역인 시리아와 이집트에서는 기독교 교리를 둘러싼 갈등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제국은 칼케돈 공의회(451년)의 교리를 중심으로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미아피시트(Miaphysite) 신앙을 따랐다.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하신 하나님이자 완전하신 인간으로 두 본성이 존재하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정의했다. 미아피시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통합된 본성을 지닌 존재로 믿었다.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제국 교회와 지속적으로 충돌하며, 종교적 억압과 정치적 소외를 경험했다. 이러한 갈등은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드는 주요인이 되었다.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도 상황은 비슷했다. 잦은 전쟁으로 국가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628년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까지 이어지며 중앙 권력은 급격히 힘이 빠진다. 왕이 폐위되고 암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지방 세력은 점점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잔틴과 페르시아 모두 이름만 유지되고 있었을 뿐, 더 이상 존속이 어렵다고 판단될 만큼 내부적으로 균열이 깊었다. 7세기 초 중동은 전쟁과 전염병, 종교 갈등과 정치적 혼란이 겹친 불안정한 사회였다.
메디나의 움마 공동체, 이슬람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이러한 시국에 등장하여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계속>

편집 : 금성무스케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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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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