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C-54 조종사들에게 전한다. 지금 즉시 독일로 날아오도록!
- 커티스 르메이
1948년 6월 24일 소련은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송전선을 차단했다. 다음날은 도로, 철도, 수로를 차단했고, 상수도까지 끊어버렸다. 소련의 행동이 말하는 것은 단순했다.
“서베를린을 우리가 먹겠다.”

사진 - The Guardian (링크)
당시 베를린은 소련과 서방(미, 영, 프)이 나눠서 통치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스탈린은 전쟁이 아닌 온건한(?!) 방식으로 베를린을 압박한 거다.
“220만이나 되는 서베를린 사람을 굶겨 죽일 게 아니라면, 방 빼라.”
였다. 이때 미국의 반응은 커티스 르메이의 명령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상대하는 국가를 ‘구석기 시대’로 돌려보내는 걸 좋아했던(?!) 커티스 르메이가 이번에는 서베를린의 천사(?!)가 됐다. 당시 미국은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수송기를 다 끌고 와서는 220만 서베를린 시민들을 먹여 살릴 식량과 석탄을 공수했다.

Curtis LeMay - 2차대전 당시 도쿄 불바다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진 - 미 공군 (링크)
이 당시 미국은 ‘천조국’의 위엄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불과 90일 만에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활주로를 서베를린에 만드는데, 이게 바로 테겔 공항이다. 그리곤 하루 평균 1천 소티('(전투기의) 출격'을 뜻하는 영어 sortie에서 유래되었으며 전투기 1대가 1회 출격하는 것을 1소티로 취급한다) 이상의 비행을 하게 된다. 당시 서베를린의 220만 시민들을 먹여 살릴려면 1일 평균 4,500톤 이상의 물자가 필요했는데, 미국은 1일 평균 5,800톤의 물자를 실어 날랐다.
물론, 사태 초기 때에는 1천 톤을 넘기지 못했지만 활주로를 만들고 수송기를 다 끌고 온 다음에는 미친 듯한 물량쇼를 보여줬다. 결국 소련은 1년 가까이 사태를 끌고 가다 봉쇄조치를 풀어버리게 된다. 냉전 초반 미국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이 공수작전은 냉전 내내 미국이 어째서 서방세계의 지도자인지를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작전 초기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대기중인 미군 C-47 수송기
사진 - The Guardian (링크)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1963년 서베를린으로 날아간 존 F 케네디가 50만명이(100만명이란 말도 있었다) 훌쩍 넘게 모인 서베를린 시민 앞에서 한 연설이다. 케네디의 연설 중 최고로 꼽히는 연설이며, 냉전을 가르는 역사적인 연설이다. 이 당시 서베를린은 베를린 장벽 구축 후 위기의식이 고조되던 때였다. 언제든 소련이 침공할 거 같은 분위기 속에서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가 미국에 SOS를 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슴다. 좀 도와주십쇼.”
불과 8개월 전에 쿠바 핵 위기 사태로 인류의 운명을 걸고 한 바탕 전쟁 아닌 전쟁을 치렀던 게 그 시절이었다. 이 엄혹한 상황에서 케네디는 서베를린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역사에 남는 명 연설을 남겼다.

사진 - 베를린시 (링크)
“2000년 전 가장 큰 자랑 거리는 Civis Romanus sum(나는 로마시민입니다)이었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이다)입니다.”
루돌프 빌데 광장에 모인 서베를린 시민들은 케네디의 이 연설을 듣고 전율했다.
“미국이 우릴 버리지 않을 것이다.”
란 믿음을 가지게 됐다.

냉전시절 미국이 전 세계 패권을 움켜쥘 수 있었던 3가지 무기가 있었다. 바로 달러, 군사력, 소프트파워였다. 달러는 기축통화로서의 힘을 보여줬다. 물론, 달러가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건 ‘석유’로 해결했다. 전 세계 석유는 달러로 거래됐다. 미국은 중동의 왕국에게 달려가 그들의 권력을 지켜주는 조건으로 석유의 달러 거래를 요구했다. 1974년의 일이었다.

금 증서, 1933년까지 미국에서 종이 화폐로 사용됐다 (위키피디아)
1944년 미국은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했다. 달러를 전 세계의 기축통화로 만들었던 거다. 즉, 이때까지는 35달러를 들고 가면, 금 1온스로 바꿔줬다. 달러가 태환화폐가 된 거였다. 그러다 미국이 베트남전이란 수렁 속에 빠져들면서, 달러를 쓰던 세계가 의심을 하게 된다.
“미국 저놈들 베트남전 때문에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어. 저것들 저거 미친듯이 달러 찍어내는데, 쟤들 보유한 금이 얼마나 될까? 내가 딱 계산해 보니까... 저것들 가지고 있는 금보다 더 많이 달러를 찍어내고 있어!”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고, 실제로 프랑스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달러를 모두 금으로 바꾸려고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금태환을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선택하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되니까 미국의 달러 패권이 흔들리게 됐다는 거다. 이때 미국이 내놓은 비책이 바로 원유 대금 결제 통화(Petrodollar System)였다. 미국이 사우디 왕가를 찾아가 쇼부를 쳤던 건데,
“너네 불안하지? 못된 빨갱이도 무섭고, 시아파니 뭐니 시끄럽잖아? 언제 혁명이 터질지도 모르고... 우리가 지켜줄게! 미군이 너네들 지켜 줄 테니까... 대신에 모든 석유 거래는 달러로만 하게 하자 어때?”
이렇게 해서 미국의 달러 패권을 어느정도 유지하게 됐고, 달러는 기축통화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이 공짜로 이걸 먹는 건 아니었다.


출처 - Aron Groups (링크)
미국 국방예산 중 가장 많은 예산을 잡아먹는 게 해군과 해병대들이다. 이들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게 석유와 화물 운송루트를 확보하는 거다.
기사를 통해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인류 역사상 바다가 이토록 안전해진 시절은 없었다. 소말리아나 말레카 쪽에 해적들이 어느 정도 남아 있긴 하지만, 어지간한 바다에서 상선들이 해적 걱정 없이 바다를 운항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이건 모두 미 해군의 힘 덕분이다.
미국은 달러 패권 덕분에 엄청난 군사비를 투자할 수 있었고, 이렇게 육성한 군대의 힘으로 달러 패권을 지켜왔다. 후세인이 2000년 11월 유로화로 석유를 결제하겠다고 말했다가 비참한 말로를 겪은 걸 보면, 달러 결제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거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이라크를 완전히 점령한 후 이라크의 원유 결제 시스템은 다시 달러로 바뀌었다. 미국에게 달러 패권은 굉장히 민감한 주제이고, 실제로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낌새만 보이면 미국은 가차 없이 이를 응징해 왔다.
이란이 미국에게 두들겨 맞다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선 위안화로 거래되는 원유를 실은 선박만 통과하는 방법을 고민하겠다고 말한 맥락이 여기에 있다. 미국은 달러 패권을 지켜야 하는데, 여기에 슬금슬금 반기를 드는 이들이 등장한 거다.
달러의 패권이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꽤 됐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1세기 시작부터였다고 보는 게 맞다. 911테러가 벌어지고 나서부터 미국 달러에 대해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 거다. 이게 미국이 테러 단체에 의해 한방 맞아서 불안하다가 아니라, 이후 미국의 대응을 보며 불안해 지기 시작한 거다.

출처 - 동아일보 (링크)
바로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 : International Emergency Economic Powers Act)이 그것이다. 이 법이 만들어진 건 꽤 오래 됐다. 1977년의 일이었으니, 달러가 한참 위세를 부릴 때였는데 이 법은 간단히 말해서 미국 대통령이 보기에 위험한 상황이 터지면,
“야, 저색희들 저거 금융제재 해 버려!”
라고 할 수 있는 법이다. 금융제재를 해 버리면, 상대 국가나 단체는 미국 내 자산이 동결 돼 버리고, 금융거래가 차단돼 버린다. 세계 결제 시스템은 SWIFT 체제하에 있다. 각기 다른 은행들은 고유한 코드를 받고 이를 가지고 해외 송금을 한다. 이때 사용되는 통화는... 역시 압도적으로 달러가 많다. 그 다음이 유로, 파운드, 위안화 순이다.
문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거래량이 많은 통화가 달러인데, 미국이 이 달러를 무기화 해서 제재 대상국을 완전히 골로 보내버린다는 거다. SWIFT에서 쫓겨난 나라는 타국과의 자금 거래가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무역 자체가 안 되는 거다.

지난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 서방국가들이 배제조치를 취했다
출처 - 연합뉴스 (링크)
이란의 경우나 북한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게 나라꼴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북한이 아무리 개혁개방을 하고 싶어도, 국제무역을 하려고 해도 자금 거래 자체를 할 수 없도록 막아버리니... 나라가 살아갈 방도가 없다는 거다.
자, 문제는 911 테러 이후 눈이 돌아간 미국이 애국법(USA PATRIOT Act)을 통과시켜버렸다. 그 이전에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은 나름 절차를 밟고, 완전히 납득이 갈 만한... 그러니까 911 이전에 미국이 제재를 때리고 SWIFT에서 쫓아낸 나라가 이란과 북한이었다. 이란의 경우는 1979년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쳐들어가서 대사관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버린 상황에서 내린 거다. 세계인들이 보기에도
“아, 저건 실드 못 치겠다. 미국이 빡칠 만해...”
충분히 납득이 갈 만했다. 북한의 경우?
“저것들이 나라야? 왕조국가지... 얼씨구 핵도 만드네? 미국이 빡칠 만 하네.”
여기까지는 나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고, 미국 이외의 국가들도 나름 수긍하고 인정했다. 그러나 911 이후 애국법이 나오면서부터 이야기가 돌변했다. 애국법이 통과되면서 이야기 이상하게 돌아갔는데,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의 자산동결 조항이 개정된 거다. 그 이전에 완전히 결과가 나와야 자산동결을 했는데 이제는 조사 중인 상황에서 혐의만 있으면 일단 동결할 수 있게 됐다.

애국법(USA PATRIOT Act)에 싸인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사진 - 브리태니커 (링크)
“미국이 눈 돌아갈만한 상황인 건 알겠는데... 이거 이대로 가다가 미국 눈에 거슬리면 우리 완전히 물먹이고, 돈 떼일 수도 있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슬슬 불안감 속, 달러에서 한 발씩 발을 빼려다가 2008년 리먼사태가 터지면서,
“야 우리 달러만 믿고 있다가 X 될수도 있겠다! 분산투자!! 포트폴리오 다시 짜자!”
이렇게 된 거였다. 문제는 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이 상식적인(!!) 미국 대통령이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나름 인정... 아니 이해를 얻었다.
“에이, 이란이나 북한은... 그래, 인정해 주자. 미국이 그럴 만 하니까 그런 거겠지.”
라고 수긍할 수 있었는데, 비상식적인(!!) 인간이 대통령이 되면서 이야기가 복잡해졌다. 바로 트럼프다. 트럼프 행정부 1기 시절에 미국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 권한을 활용해 11건의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고, 그 결과 3,700개 이상의 단체들을 제재했다. 대표적인 게 멕시코의 불법이민 때문에 미국의 국가안보에 크나큰 위협이 발생했다면서 멕시코산 수입품에 관세를 때려버린 거다.

사진 - World Economic Forum (링크)
틱톡을 때렸을 때도 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들고 나왔던 게 트럼프였다. 이렇게 온 천지사방에 발길질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의 달러 패권 덕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미국은 달러의 힘을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 경제는 달러로 돌아가! 그런데, 우리말 안 들으면 너네 우리 시스템에서 장사 못해. 무슨 말인지 알지?”
이런 상황에서 세계 각국은 저마다 외환 보유의 다변화를 고민하게 된 거다. 물론, 아직까지는 달러의 위상이 다른 통화들을 압도하고 있지만, 불만이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원래 칼이란 건 칼집에 들어가 있을 때 가장 무서운 건데, 미국이 이 칼을 칼집에서 뽑아 난도질을 하면서 그 가치가 점점 떨어지게 됐다.
트럼프가 미친 듯이 이곳 저곳에 제재를 때리고, 자산을 동결시켜버리는 걸 보면서 다른 국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 손에 쥔 달러가 어느 순간 휴지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을 거다.
미국 패권의 한 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속>

편집: 꾸물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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