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체포 방해 2심 선고와 김건희 주가 조작 및 금품수수 2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둘 다 1심에 비해 형량이 늘었고, 둘 다 상고했습니다. 윤석열의 경우야 내란 우두머리 재판과 일반이적(대한민국의 군사상 이익을 해하거나, 적국에 군사상 이익을 공여하는 행위) 재판이 더 중한 혐의에 대한 재판이므로 그렇다 치지만, 김건희는 2심에서 늘어난 형량이 4년에 불과했습니다. 나란히 상고를 하는 그 뻔뻔함에 화가 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종종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할 수 없다'는 표현은 사전적으로 2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다는 의미, 또 하나는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이죠. 이 경우에는 능력이 없다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이겠죠. 비슷한 느낌의 표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또는 '용서해선 안된다' 같은 말들이 있겠습니다. 저는 이 표현들 중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다른 표현에 비해 이 표현을 사용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용서하지 않겠다'가 다른 표현에 비해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장 많이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언제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유로, 이러한 판단과 결정을 외부의 영향 없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힘인 것이죠.
용서를 내 의지대로 다루는 것은 권력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많은 전제를 담고 있죠. 용서를 하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어떤 죄를 짓거나 잘못한 일을 했어야하며,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가 용서를 하는 주체였어야 합니다. 막상 따져보면 꽤나 복잡한 전제입니다. 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않으면 용서라는 말을 쓰기에 어색해집니다. 잘못이 없는 사람을 용서한다든가,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다른 사람이 용서하는 건 이상하니까요. 도식화하여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주체를 1인칭인 나라고 상정한다면, 누군가 나한테 죄를 지었고, 내가 그를 용서하거나 또는 용서하지 않거나 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의 순서를 따지자면 남이 나에게 죄를 저지른 것이 선행되고, 그 후에 내가 용서를 하거나 말거나를 결정하여 행동하게 될 겁니다.
이번엔 내가 대상이라고 상정해보죠. 먼저 내가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본 남이 나를 용서하거나 말거나 하게 됩니다.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건 사전적으로는 '꾸짖거나 벌하는 것'이겠고, 현실적으로는 꼭 그런 처벌의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노여운 마음을 계속 품는 것을 포함할 수 있겠죠. 내 입장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건, 당연하게도 불편한 일입니다. 꾸짖음도, 벌도 힘들지만, 누군가 나에게 노여운 마음을 계속 품는 것은 힘든 일이죠. 죄를 지었으니 그에 맞는 힘들고 불편함을 감내해야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상정해볼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주체도 나고, 대상도 나인 경우입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상황. 내가 나에게 무언가 잘못을 했고,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어떻게 보면 모순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 경험은 오히려 남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켄 윌버의 <무경계>라는 책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 책의 도입부에서 저자는 집요하게 '자아의 경계'에 대해 질문합니다. 내 몸이 나라면, 다리를 절단해야하는 사고를 당했을 때 절단한 그 다리도 나인가. 그게 아니라면, 극단적으로 쇄골 부근에서 절단을 한다면 심장이 있는 몸통이 나인가, 뇌가 있는 머리가 나인가. 이 질문은 신체적인 차원을 넘어서 계속 이어집니다. 내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을 한 건 나인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분명 언젠가 기억에서 지워질 텐데 그러면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 중 어느 쪽이 나인가.
이런 접근 방식은 불교의 무아 관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나 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딱히 그 경계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죠. 마치 스펙트럼 속 빨간색 처럼 말입니다. 켄 윌버는 이 스펙트럼을 단계별로 나누고 우주 범위까지 확대합니다. 그 내용을 아래 그림으로 도식화하여 설명하는데, 사실 우주까지 확장하는 것은 조금 무리인 면이 있으니, 이번 편에서는 페르소나와 자아 수준까지만 다루겠습니다.

이 스펙트럼의 골자는, 우리가 '나'라고 통칭하는 것은 다양한 기준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켄 윌버가 그림자(shadow)라 일컬은 용어는 칼 융이나 필 스터츠 같은 많은 학자들이 사용한 개념이기도 한데, 공통적으로 스스로 수용하지 않고 무의식 속에 억압한 자신의 일부분을 말합니다. 이를 활용하여 자아의 기준을 구분하여 배치할 수 있습니다. 의식적 자아인 내가 그림자인 나를 용서하지 않는 상황. 또는 반대로, 그림자인 내가 의식적 자아인 나를 용서하지 않는 상황.
저의 개인적 얘기로 이 그림자(shadow)를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듯 합니다. 저의 그림자는 군대 신병 시절, 의경으로 지원하여 자대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소위 '고문관'으로 낙인찍혀, 한동안 심한 구타를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심하게 위축되어 간단한 업무도 이상하리만큼 수행하지 못했던 시절의 제 모습입니다. 다행히 몇개월이 지나면서 생활 적응을 하고, 업무 수행 능력도 늘고, 그러다보니 맞을 일이 적어지는 선순환에 접어들긴 했지만, 그 전의 모습은 그림자로 무의식의 서랍장 속 손도 닿지 않을 깊은 곳에 두었습니다.
꽤 오랫동안, 현실의 자아는 그 그림자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한창 구타를 당하던 그 당시 저는 스스로 '맞아도 싸다'는 자학적인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맞아도 쌀 정도로 무능력했다는 점이 스스로에 대한 죄가 되어 현실의 저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왜곡된 프레임이 자리잡아 버린 것이죠. 그래서, 그런 죄를 지은 그림자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그림자도 현실의 저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군대, 게다가 의경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응하는 과정에서의 미숙함이 비합리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황당한 논리에다, 가까스로 이를 이겨낸 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현실의 제가 그림자에게 가혹한 죄를 지은 것이고, 용서할 마음이 생길 리 없는 것이죠. 분명히 둘 다 저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두 자아 사이의 적대감은 지금도 생생히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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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 전문가들의 책들을 보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그림자를 갖는다고 합니다. 그림자는 현실의 자아가 무의식으로 숨긴 대상이라는 점에서 관계를 맺기 가장 힘든 자아이고, 그만큼 서로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서 이 현실적 자아와 그림자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공감하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분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꽤 많으실 거라고 예상합니다. 우리는 너무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스스로에게 가혹해지기 쉬운 환경에서 성장해 왔으니까요. 각자의 그림자가 떠오르고, 그 그림자와의 관계와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느끼셨다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비극적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렇게 현실의 자아와 그림자의 관계개선을 해보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아주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리게 됐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용서라는 걸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었죠. 이 경우는 '용서할 수 없다'는 표현에서 '용서할 능력이 없다'는 의미에 가까운 상태이겠습니다.
자아와 자아 사이의 갈등에서 용서하기가 어려운 것은, 잘못한 바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그 잘못의 기준은 순전히 본인 스스로가 만든 기준이죠. 그래서 잘못을 아주 확실하고 자명하게 아는 겁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인정욕구가 강했고 그것이 학업성적이나 교우관계에 핵심적인 동기로 기능했습니다. 제가 속한 집단에서의 인정이라는 건 저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기준이었죠. 그런 저에게 있어 매일 구타당하고 무시당하는 신병 고문관이라는 그림자가 형성된 건, 저의 인정욕구가 만든 기준에 너무 턱없이 밑돌았기 때문일 겁니다.
스스로 기준을 바꾸면 해결될 일이긴 합니다. 누군가의 허락을 받을 일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 기준을 형성한 가치관, 그 가치관의 기반이 된 세계관, 이 모든 것들이 자아의 일부이니까요. 그 기준이라는 건 단순히 시험 커트라인을 몇점 조정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바뀌는 문제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 불편하면서 심오하기까지한 이 결정과 실행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모르겠다는 고민. 많은 책을 보고 상담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이 고민에 다다르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찮게 이 영상을 보고 '아이들은 항상 부모를 용서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연스레 저와 제 아이의 관계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아이를 키우시는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아무리 감정을 추스리려 노력해도 가끔은 '굳이 이렇게까지 혼낼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혼낼 때가 있습니다. 애는 펑펑 울거나, 흐느끼며 어디 웅크려있거나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린 저에게는 이내 후회의 마음이 찾아들고 내가 왜 그랬을까, 애랑 이렇게 멀어지는 건 아니겠지, 이러다 사춘기 때 아예 나와 상종도 안하면 어쩌지 등등 별에 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골똘이 하고 있을 때 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안기고, 웃긴 표정을 짓고, 같이 놀자고 합니다. 어른과 어른 사이에서의 갈등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관계회복 속도를 보이죠. 그럴 때 저 말이 항상 떠오릅니다. 아이들은 항상 부모를 용서한다.
제 아이가 그렇게 감정 컨트롤 못하고 자신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 상처를 준 아빠를 용서한다는 건, 저의 잘못을 없애주는 건 아닙니다. 그저, 꾸짖거나 벌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원래의 관계로 돌아온 것이죠. 아이가 부모를 용서한다고 해서 부모의 모든 행동이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되진 않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부모의 몫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용서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은 잘못대로 두더라도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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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마리를 통해 깨닫게 됐습니다. 기준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점. 내가 나에게 높은 기준을 갖고 있더라도, 나의 행동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말이죠. 나 자신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원인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이 깨달음을 계기로 저는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됐고, 그림자와의 화해를 조금씩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화해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같은 증상이 줄어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남에게도 너그러워졌다는 점입니다. 남에 대한 용서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둥글둥글한 성격을 갖게 됐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타인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고통이 줄어들게 된 것이죠.
나 자신에 대해 '용서라는 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동안에, 사실은 남에게도 용서를 어떻게 하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거의 모든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왔던 겁니다. 그만큼 타인으로 인해 분노를 느끼고, 그에 대해 꾸짖으려 했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더 큰 괴로움을 느꼈을 겁니다. 굳이 따지자면 용서를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것이겠네요. 능력이 없다는 의미로써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자신에게는 선택적으로 너그러운 기준을 적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남이 저지르면 죄를 묻지만 자신은 얼마든지 그런 행동을 서슴치 않는 이들이 있죠. 이들은 스스로를 용서하기도 이전에, 스스로는 애초에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인식합니다. 그런 이들이 정치적 권력까지 갖게 되어 이를 활용하는 것을 목격할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자랑인 촛불혁명과 빛의 혁명도 모두 그렇게 정치권력을 이용한 잘못에 대해 시민들의 분노가 응집되고, 그것이 평화적 방식에 따라 처벌로 이어진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습니다.
용서를 할 줄 모른다면, 그 의지가 퇴색됩니다.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하지 못한다면, 용서를 못하는 결과가 상수처럼 굳어지게 됩니다. 누군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수동적으로 정해져 버립니다.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해 노여워하거나 벌을 주거나 꾸짖는 것이 반복되는 동안, 나의 의지가 반영될 수 없습니다.
내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을 때, 권력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할 수 있을 때,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힘을 갖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그런 힘을 온전히 갖고 있는 채로,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이어가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다음 편에서는 자아의 스펙트럼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면서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보겠습니다.

편집: 꾸물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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