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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새벽, 런던 한복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상이 세워졌다. 누가 언제 설치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언론 보도와 SNS를 타고 전파된 이 게릴라 동상의 소식을 접하고 사람들은 다음 날 아침부터 이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조형물이 자리 잡은 곳은 워털루 플레이스. 영국 제국의 승리와 영광을 기념하는 인물들이 줄지어 있는 공간이다. 과거 대영제국 시절, 제국주의 땅따먹기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과 이 일에 헌신한 인물들이 놓인 일종의 기억의 무대 같은 장소다.
그 사이로 이질감이 느껴지는 작품 하나가 끼어들었다. 양복 입은 한 남자가 커다란 깃발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깃발은 그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그는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상태다. 이미 한 발은 받침대의 경계를 넘어선 채 공중을 내딛고 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추락할 것 같다.
그는 왜 공중에 발을 내딛고 있을까? 깃발은 왜 그의 눈을 가리고 있을까? 왜 하필 지금, 이 장소인가? 기념과 찬양의 목적으로 조성된 공간에 놓인 눈 가린 남성. 이 동상을 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불편함과 긴장을 느꼈다.
거침없이 걷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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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제작자의 정체는 금방 드러났다. 익명으로 활동해 온 거리 예술가 뱅크시다. 그는 그동안 이름보다 이미지로, 설명보다 장면을 통해 사회를 비틀어 표현해 왔다. 작품에 특정한 해석을 덧붙이기보다 보는 이가 스스로 의미를 읽어내도록 만들었다.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앞을 보지 못한 채 나아감, 멈추지 않는 태도, 그 끝에 놓인 추락의 가능성. 많은 사람들은 한 집단이 공유하는 굳건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맹목적인 따름이다.
깃발은 국가, 소속, 집단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깃발은 보호와 결집의 기능 대신, 사람의 시야를 가리고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결국 그를 위험으로 이끄는 수단이 되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따르고 동일체를 이뤄내는 집단의 태도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지방 선거를 앞둔 영국의 현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영국의 극우 정당 지지율이 고공 행진하고 있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과거, 전쟁의 참상과 소비문화의 이중성을 드러내거나 권위의 상징을 뒤틀어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뤄냈다. 인간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고 파문을 일으켰다. 이번 작품 역시 시대가 공유하는 태도를 포착해 낸 결과물로 읽힌다.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인이 사진을 퍼 나르며 공감할 만한 공통의 정서를 건드린 것이다.
뱅크시의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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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세계적인 경매 회사 소더비에서 뱅크시의 '풍선 소녀'가 출품되었다. 하트 모양 풍선을 놓치는 어린아이를 통해 희망과 상실의 감정을 동시에 담아낸 작품이다. 치열한 경쟁 끝에 약 100만 파운드(한화로 약 20억)에 낙찰되었다. 낙찰 확정과 동시에 충격적인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작품이 걸려 있던 액자 내부에서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그림이 액자 아래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길게 잘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당황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내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장치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경매 참가자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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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이후, 작가는 직접 계획한 퍼포먼스임을 밝혔다.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리는 순간, 작가 스스로 작품을 훼손해 버린 것이다. 예술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구조를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이렇게 파괴된 작품이 오히려 더 큰 주목을 받았다는 것. 새로운 제목 'Love is in the Bin'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며, 그 가치는 더욱 상승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순간에 작품을 파괴해 버리며 상품으로 소비되는 예술의 운명을 냉소적으로 고발하는 것. 이것이 뱅크시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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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뱅크시의 작품은 꽤 알려져 있다. 예루살렘 벽에 그려진 벽화. 이른바 '꽃을 던지는 남자'는 시위대가 던져야 할 것은 폭력이 아닌 꽃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분노와 저항의 방식에 질문을 던졌다. 브라이튼에 등장한 '키스하는 경찰'은 권위의 상징인 경찰을 통해 동성애를 대하는 사회적 편견을 고발했다. '디즈멀랜드'와 같은 프로젝트에서는 놀이공원이라는 즐거움의 공간을 불편하고 음울한 장소로 재구성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드러냈다. 정치 역시 그의 관찰 대상이었다. 민주주의 제도와 실제 작동 사이의 간극을 풍자하기 위해 영국 의회에 침팬지를 채워 넣었다.
뱅크시의 작품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일관된다. 권력, 전쟁, 자본,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태도를 배경으로, 인간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계의 구조를 다시 돌이켜 보고 성찰하게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특정한 시기에 등장해 시대의 고민과 불안을 반영하는 거울처럼 여겨진다. 이번 런던에 등장한 동상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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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에는 통상 195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각 국가는 서로 다른 국기와 상징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낸다. 일정한 국경을 기반으로 영토를 구획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세워 통치 체계를 유지한다. 이른바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근대 국가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춘 시스템 속에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전체를 보았을 때, 이러한 국가 질서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명확한 국경선이 지도에 새겨지고, 서로 구분된 국가 단위로 세계가 조직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20세기 초. 특히,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로 볼 수 있다. 수만 년의 인류 역사 중 고작 100년이다.
현재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정치적, 사회적 구조는 절대적이거나 영속적인 질서로 보기 어렵다. 특정 시대의 산물이다. 제도와 질서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으며 지금의 국가 체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대와 체제가 달라져도 일관되었던 가치는 정의에 대한 요구였다. 정의가 바로 설 때 인간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사회는 발전했다. 뱅크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이번 작품은 국가주의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우리가 속한 국가 체제나 이념,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깃발로 눈을 가린 것처럼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극단으로 치우친 믿음은 인간의 시야를 제한하고 낭떠러지로 몰아세운다. 특히 그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이 '국가'일 때, 그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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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모습을 철저히 숨긴 뱅크시. 그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다. 가장 널리 거론되는 인물은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로빈 거닝햄. 그의 거주지 이동 경로와 뱅크시 작품이 등장한 위치가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점에서 여러 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아왔다. 또 다른 추정으로는, 음악 그룹 Massive Attack의 멤버인 로버트 델 나자가 지목되었다. 밴드 투어 일정과 작품 출현 시점이 겹친다는 점이 추정의 근거다. 다만, 이 모든 주장은 추정에 머무를 뿐,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이러한 미스테리함이 뱅크시라는 존재를 더욱 강력한 상징으로 만든다.
익명성은 뱅크시 작업의 핵심 요소다. 작가의 명성, 배경과 차단된 관객은 작품에 담긴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다. 법적 제약과 제도적 통제로부터도 자유롭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에서 권력과 사회를 향한 비판을 지속할 수 있다. 뱅크시의 익명성은 그가 예술을 구현하는 하나의 전략이며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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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 익명의 작가가 만든 작품에 대한 도시의 반응이다. 보통 허가 없이 설치된 구조물은 철거 대상이 되지만, 이번 동상이 설치된 이후, 이를 관할하는 웨스트민스터 시 당국은 즉각적인 철거 대신 작품을 보호하기로 했다.
뱅크시의 또 다른 작품, '법 봉으로 때리는 판사'의 경우엔 왕립 법원 벽에 그려져 문화재 보호의 대상이라는 이유로 철거된 바 있다. 벽화에는 판사가 무방비 상태의 시위자를 법 봉으로 내려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번 작품은 이전과 달리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규정과 질서를 흔드는 표현의 수용. 그 긴장 속에서 도시는 생명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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